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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엣 동상의 가슴을 만지면 사랑에 행운이 따른다며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다양한 포즈를 취해 사진을 찍는다.
 줄리엣 동상의 가슴을 만지면 사랑에 행운이 따른다며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다양한 포즈를 취해 사진을 찍는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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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여행 나흘째(2일), 잠에서 깬 아내가 호텔 창밖으로 손을 내밉니다.

"비오나 봐요! 좀 많이 내릴 것 같은데요!"
"오늘 비온다고 했었지. 그래서 일정도 바꾸고!"
"어젠 유서깊은 성당에서 새해 소망도 빌고, 낙조에 물든 베네치아! 정말 멋졌어요."
"오늘은 '사랑의 도시' 베르나로 간댔지!"

아내는 베네치아에서의 붉은 노을에 대한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가 봅니다. 휴대폰에 담은 사진을 보고 또 봅니다.

사랑과 예술이 숨쉬는 베로나

이른 아침, 우리는 이탈리아 북부 베네치아에서 베로나로 이동합니다. 새벽부터 내리는 비가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습니다.

여행 가이드가 날씨와 일정을 소개합니다.

"오늘 예보상으론 최저가 –2도이고, 낮에는 5도라네요. 베로나를 끝으로 북부 이탈리아 일정을 마칩니다. 아레나 경기장에선 2000년 전 역사의 숨결을, 또 줄리엣의 집에서는 운명적인 사랑이 뭔가를 느껴 볼 거예요."

차에 오르자 빗줄기가 오락가락합니다. 이탈리아는 겨울철이 우기입니다. 여름은 기온이 높고 건조합니다. 대신, 겨울은 우리나라보다는 좀 따뜻하며 비가 자주 온다고 합니다. 이른바 지중해성 기후의 특징이지요. 지금 한겨울인데도 파릇파릇 새싹이 나 있는 걸로 봐서 우리나라 초봄과 같은 날씨입니다.

유유히 흐르는 아디제강의 뿌연 안개가 낮게 깔려있습니다. 알프스산맥에서 시작된 아디제강은 베로나의 젖줄이 되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흐릅니다. 낮은 언덕에 펼쳐지는 포도밭이 풍요로워 보입니다.

중세풍의 성벽이 있는 베로나 시가지이다.
 중세풍의 성벽이 있는 베로나 시가지이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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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엣 집 가는 길이다. 좁은 골목이 고풍스럽다.
 줄리엣 집 가는 길이다. 좁은 골목이 고풍스럽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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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나는 이탈리아 밀라노와 베네치아 사이에 있습니다. 촘촘히 들어앉은 건물과 붉은 지붕이 아름다운 거리로 이어집니다. 거리는 중세시대의 성곽이 그대로 남아 있어 옛 풍경을 간직하고, 나름의 멋을 풍깁니다.

비오는 날, 베로나 시가지 성곽을 따라 걸으니 마치 우리나라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 낭만적인 기분이 듭니다.

아레나 경기장, 검투사의 숨결에서 오페라의 선율로

우리는 베로나 브라 광장에 도착합니다. 광장에는 작은 공원이 있고, 분수가 있습니다. 브라 광장의 주인은 아무래도 아레나 경기장 같습니다. 2000여 년을 지켜온 건축물의 위용이 우리를 압도합니다.

베로나 브라 광장에 있는 2000여 년 전의 아레나 경기장이다. 위용이 대단하다.
 베로나 브라 광장에 있는 2000여 년 전의 아레나 경기장이다. 위용이 대단하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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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나 경기장은 AD 1세기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여기저기 보수를 한 흔적이 있지만 원래의 형태를 유지하고, 그 오랜 세월을 버티고 있다니 놀라울 뿐입니다. 선조들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후손들이 유지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정신이 부럽습니다.

아레나의 원래 뜻은 모래를 뜻한다고 합니다. 아레나 경기장은 원래 검투사들의 결투장이었습니다. 검투사들이 경기를 벌일 때 바닥에 우리 씨름판처럼 모래를 깔았다고 합니다. '아레라'라는 이름도 모래가 깔린 경기장이라 해서 붙여진 것 같습니다.

아레라 경기장은 로마의 콜로세움, 나폴리 카푸아 원형극장과 함께 이탈리아 고대 3대경기장으로 꼽힙니다.

베로나 브라 광장에는 아레나 경기장이 있고, 의회건물로 쓰이는 옛 궁전도 있다.
 베로나 브라 광장에는 아레나 경기장이 있고, 의회건물로 쓰이는 옛 궁전도 있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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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투사 경기는 사람과 사람 또는 사람과 맹수가 전투를 벌이는 일종의 스포츠경기였습니다. 권력자는 검투사 경기를 시민들의 용기와 충성을 자극하고,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고자 했던 유흥거리로 거행했습니다. 대부분의 검투사는 전쟁포로나 노예, 범죄자들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죽음을 불사한 혈투를 벌이고, 승리를 얻은 검투사는 관중들의 열광적인 환호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곳 아레나 경기장은 검투사들의 경기가 금지된 이후, 1913년 베르디 탄생 100주년 기념 오페라 <아이다>를 초연한 계기로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아레나 경기장에서는 매년 6월말부터 8월말까지 오페라축제가 열립니다. 오페라축제는 이탈리아가 낳은 대표적인 작곡가 베르디와 푸치니의 작품을 중심으로 공연을 합니다. 오페라축제가 열릴 때는 그야말로 한여름 밤의 열기로 대단하다고 합니다. 축제기간 동안에는 인구 30만 명이 안 되는 작은 도시 베로나에 그들 인구의 배가 넘는 관광객들로 넘쳐난다고 합니다. 아레나 경기장의 오페라축제가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케 합니다.

늦은 여름밤, 하늘이 보이는 고풍스런 경기장에서 오페라가 공연되는 광경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뜁니다. 로마식 원형경기장에서의 오페라 연주는 오래된 과거와 오늘을 사는 현재가 만나는 어떤 독특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야외무대인데도 이곳에서는 미세한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음향효과가 뛰어나다고 합니다.

우리는 아레나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습니다. 터널처럼 이어진 구조에 중간 중간 출입문이 있습니다.

아레나 경기장의 안. 그 위용이 대단하다.
 아레나 경기장의 안. 그 위용이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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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나 경기장의 위용.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아레나 경기장의 위용.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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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나 경기장은 그야말로 거대한 경기장입니다. 큰 지름 75m, 작은 지름 44m의 타원형인데, 최대 수용인원이 2만 2000명이라 합니다. 2000여 년 전에 지어졌다는 건축물이 이렇게 큰 규모라니!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관중석의 스탠드는 현대식 경기장 구조와 다를 바 없습니다. 스탠드의 계단이 상당히 높습니다. 반들반들 윤기나는 분홍빛 대리석 색깔이 섞여 있어 관중석 자체가 예술품입니다.

아내가 한 바퀴 경기장을 돌고 나오며 한마디 합니다.

"검투사들이 목숨을 건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듯한데, 여기서 또 아름다운 선율의 오페라가 공연된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네요!"

사랑의 맹세가 있는 줄리엣의 집

우리의 발길은 베로나의 또 다른 명소, 줄리엣의 집으로 향합니다. 좁고 소박한 길을 따라 가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골목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로미오와 줄리엣>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로나가 <로미오와 줄리엣>의 작품 속 두 젊은이의 러브스토리의 무대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줄리엣의 집. 오른쪽에 발코니가 보인다. 로미오가 부르면 줄리엣이 발코니로 나와 고개를 내밀 것 같다.
 줄리엣의 집. 오른쪽에 발코니가 보인다. 로미오가 부르면 줄리엣이 발코니로 나와 고개를 내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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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나 시에서는 이를 이용해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가 된 여기에다 줄리엣의 집을 지정하였다 합니다. 관광산업 차원의 아이디어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곳이 베로나를 찾는 관광객들의 명소가 되었다니, 이색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남원에서 판소리 <춘향가>에 등장하는 성춘향과 이몽룡의 무대로 남원 광한루를 홍보하는 것과 같아 보입니다.

어찌되었건 줄리엣의 집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열정과 슬픈 사랑이야기에 애달파하고, 공감하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것 같습니다.

줄리엣 상 앞에서 다정한 포즈를 취한 연인들.
 줄리엣 상 앞에서 다정한 포즈를 취한 연인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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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들이 뜰 안에 있는 줄리엣 동상의 가슴을 만지려고 야단들입니다. 조각상의 오른쪽 가슴을 어루만지면 사랑에 행운이 따른다는 속설에 저마다 즐거운 표정으로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스쳤는지 오른쪽 가슴은 반질반질합니다.

아내가 나를 찾습니다.

"여보, 당신도 저 사람들처럼 포즈 취해봐요."
"난 싫어! 남세스럽게 뭘!"

나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내는 카메라를 내게 넘기고, 줄리엣 옆에서 포즈를 취합니다.

아내도 줄리엣 상 앞에서 인증샷을 남겼다.
 아내도 줄리엣 상 앞에서 인증샷을 남겼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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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엣의 집은 세계 각지에서 온 수많은 연인들이 사랑의 맹세를 대신하는 흔적을 남깁니다. 자기들의 변치 않을 사랑을 열쇠로 채우고, 벽에는 자기들만의 사랑의 메시지를 낙서로 남깁니다.

줄리엣의 집 벽에 많은 사람들이 낙서를 했다. 연인들의 사랑의 맹세가 담겨있다.
 줄리엣의 집 벽에 많은 사람들이 낙서를 했다. 연인들의 사랑의 맹세가 담겨있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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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를 보면서 나는 서레너드 위팅, 올리비아 핫세가 주연한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사를 떠올립니다.

"오, 나의 영원한 줄리엣! 이 달이 다 지기 전까지 당신을 기다리게 하지 않겠어요."
"달에 대고 맹세하지 마세요. 주기에 따라 바뀌는 달은 변덕이 심하니까! 당신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가슴에 대고 맹세하세요."

변덕부리지 않고 가슴으로 하는 맹세, 그것은 심정 깊은 사랑일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것은 서로를 향한 따뜻한 가슴, 바로 사랑입니다.

나는 줄리엣의 집을 나오며 아내의 언 손을 꼭 잡았습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12월 29일부터 1월 6일까지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태그:#이탈리아, #베로나, #아레나 경기장, #줄리엣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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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 밑동네 작은 농부로 살고 있습니다. 소박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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