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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망우당공원에 세워져 있는 홍의장군 동상, 이 사진과 실제 동상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본문을 다 읽은 후 맨 아래 동상 사진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대구 망우당공원에 세워져 있는 홍의장군 동상, 이 사진과 실제 동상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본문을 다 읽은 후 맨 아래 동상 사진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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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역사유적이나 문화유산을 답사할 때는 대상에 대한 배경지식부터 먼저 습득해야 한다. 역사서나 전문가의 기행문을 읽는 것이 최선이고, 그럴 여유가 없다면 현지의 안내판을 유심히 읽는 정도의 성의는 보여야 옳다. 물론 박물관이나 기념관이 있는 지역에서는 당연히 그곳부터 방문할 일이다. 대구광역시의 망우당 공원도 마찬가지이다.

공원관리사무소 앞에 차를 세우면 대뜸 길 맞은편의 '임란의병관'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 점에서, 임란의병관은 위치 선정이 아주 잘 된 건물이다. 또한 공원 전체 안내도를 의병관 왼쪽 앞에 세워둔 것도 매우 적절하다. 안내도는, 말은 없지만, '(1) 임란의병관 내부, (2) 임란 호국 영남 충의단, (3) 홍의장군 동상'의 차례로 둘러보는 것이 좋다고 친절하게 길잡이를 해준다.

"오직 나라가 있음을 알았지 내 몸 있는 줄은 몰랐도다"

대구 망우당공원의 임란의병관. 아주 충실한 전시 내용을 보여준다.
 대구 망우당공원의 임란의병관. 아주 충실한 전시 내용을 보여준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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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관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에 작은 입간판이 하나 서 있다. 붉은 색 큰 글자로 된 제목 '임진왜란'이 뚜렷하고, 그 아래에 본문이 이어진다. 본문은 사뭇 간결하여 '어째서 일어났는가? 어떻게 극복했는가? 해답이 이곳에 있습니다. 역사를 바로 알아 민족 정기를 세웁시다' 식이다.

임란의병관에 입장한다. 현관 정면 벽에 새겨진 '의병장 어록' 세 문장이 가장 먼저 답사자를 맞이한다. 곽재우가 "마땅히 나라를 위해 적을 토벌하는 것이니 적의 머리를 올려 전공을 세움은 의리상 옳지 않은 일이다(人當爲國討敵 獻首要功 於義不可)" 하고 답사자에게 말을 건넨다. 이어, 임진왜란 초기 경상도 지역 의병군을 총지휘했던 김면의 "오직 나라가 있음을 알았지 내 몸 있는 줄은 몰랐도다(只知有國 不知有身)" 하는 유언이 고령 도암서원에서부터 이곳까지 커다랗게 울려온다.

경북 고령군 쌍림면 구곡리 도암서원 강당(2) 앞 누각 상평루(常平樓)의 모습. 숫자1의 바로 오른쪽에 신도비가 있고, 신도비 우측에 김면 장군의 묘소가 있다.
 경북 고령군 쌍림면 구곡리 도암서원 강당(2) 앞 누각 상평루(常平樓)의 모습. 숫자1의 바로 오른쪽에 신도비가 있고, 신도비 우측에 김면 장군의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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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면은 무더운 한여름철에도 잠자리에서까지 갑옷을 입은 채 살았던 의병장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일찍 병사했다. 이로의 <용사일기(龍蛇日記)>에 따르면,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 창의와 전투를 독려하는 관직) 김성일은 김면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이제 나라가 망했도다!" 하고 탄식하면서 선조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이로

이로(李魯)는 1544년(중종 39)에 태어나 1598년(선조 31) 타계했다. 과거 합격 후 여러 벼슬을 역임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종도(趙宗道)와 함께 창의를 결의, 고향으로 돌아와 (경남) 삼가, 단성에서 동생 지(旨)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그 후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의 막료(幕僚, 참모)로 활약하였으며, 진주성 싸움에도 종군했다.

이로는 임진왜란 중 겪은 내용을 <용사일기>로 남겼다. <용사일기>는 왜란 발발 직후부터 약 15개월 동안의 전쟁 상황이 매우 상세하고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 자료 및 문학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로는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박진로 62-4 낙산서원(洛山書院)에서 제향되고 있다. 낙산서원이 창건된 시기는 1802년(순조 2)으로, 본래는 경덕사(景德祠)였다.

"김면은 초야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는데 왜란이 일어나자 몸을 돌보지 않고 의병을 일으켜 여러 번 적의 예봉을 꺾었습니다. 낙동강 오른쪽이 보존된 것은 대체로 그의 공로입니다. (중략) 쌓이고 쌓인 피로로 말미암아 혹독한 병에 걸려 진중(陣中)에서 죽었으니 이는 하늘이 돕지 않아 생겨난 일입니다."

김성일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곽재우와 김면의 말이 평어인데 비해 "이 한 목숨 바쳐 나라에 보답함이 신의 소원입니다(一死報國 臣之願也)"  하는 김성일의 발언은 경어체이다. 듣는 사람이 임금이기 때문이다.

김성일은 임진왜란 발발 직후 체포된다. 통신사로 바다를 건너갔다가 돌아와 "쥐새끼 같은 도요토미는 전쟁을 일으킬 만한 위인이 못 됩니다" 하고 보고했다는 이유로 선조는 그를 죽이려 한다. 영의정 이산해와 좌의정 류성룡이 나서서 선조에게 "경상도 지역에서 김성일만큼 신망을 얻고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의병을 일으키는 임무를 수행할 최고 적임자입니다" 하고 적극 변호한다.

이 대목은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 29권에 '특히 관군과 의병 간의 알력이 심했던 경상도에서 초유사 김성일은 관군과 의병 간의 알력을 조절할 수 있었고, 일본군 격퇴를 위해 공동 전선을 형성시키기도 하였다' 같은 기술로 재현되기도 한다. 결국 김성일은 경상우도 초유사에 임명되고, 이때 "일사보국 신지원야" 라는 '어록'을 남긴다. 

안동의 학봉(김성일)기념관. 사진을 기준으로, 기념관 오른쪽에 김성일 고택이 있다.
 안동의 학봉(김성일)기념관. 사진을 기준으로, 기념관 오른쪽에 김성일 고택이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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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망우당(곽재우의 호) 공원'이므로 세 사람의 '어록' 중 곽재우의 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생각해 본다. <용사일기>에 따르면, 곽재우는 수하 장졸들에게 '나라를 위해 적을 토벌하는 것은 백성으로서 당연한 의무인즉 적의 머리를 (조정에) 올려 (개인의) 전공을 세우려 하지 말라'면서 죽은 적군의 목을 베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그 바람에 곽재우 의병군은 적을 많이 죽이기는 했지만 "공을 탐내어 (죽은) 적의 목 베는 일을 좋아하다가는 반드시 해를 입게 될 것"이라는 대장의 지시를 지키느라 적의 수급을 취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나라를 위해 적과 싸우는 것은 백성의 당연한 도리"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의 막료(참모)로 종군 중이던 이로가 곽재우에게 "그대의 본뜻은 매우 착하지만 이 전쟁에 참가한 우리 장졸들 중 누가 공로와 이름 얻기를 마다하겠소? 그렇게 하면 결국 장졸들의 전의가 떨어질 것이오" 하고 의견을 말했다.

그 후 곽재우는 기강(岐江, 경남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의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지점)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 비로소 적의 목을 베는 일을 허락했다. 장졸들이 물에 뛰어들어 예순이 넘는 적의 수급을 베었다. 곽재우는 이를 모두 부하들의 공으로 돌렸다.

곽재우 의병군이 일본군을 제압하는 기강 일대.
 곽재우 의병군이 일본군을 제압하는 기강 일대.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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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군관 조사남(曺士男)이 가장 먼저 적선에 뛰어올라 칼을 휘두르며 적을 참수했다. 조사남은 왜란이 발발한 지 불과 대엿새만에 현풍의령·창녕·영산 등지가 모두 적군의 손에 쑥대밭이 되는 것을 보고 격분하여 직접 의병을 일으켰고, 그 후 곽재우를 도와 (경북) 현풍·(경남) 의령·창녕·삼가·초계·합천 등지의 숱한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운 장수였다.

하지만 그런 조사남도 죽은 체 누워있던 왜군의 불쑥 치켜든 칼을 피하지는 못했다. 조사남이 피습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곽재우는 눈물을 쏟으면서 "내가 적의 목을 베는 것을 금지했던 것이 바로 이런 일이 생길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내가 아끼는 조 군관이 이런 일을 당했구나!" 하고 탄식했다. 조사남은 종전 뒤 승지에 추증되었다.

임란의병관의 '조선 의병의 무기' 게시물
 임란의병관의 '조선 의병의 무기' 게시물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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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관 현관에서 세 사람의 어록을 새겨 읽은 후 왼쪽으로 들어선다. 의병관 내부는 '임진왜란 당시 동아시아 정세, 임진왜란 개요, 임진왜란 전투 일지, 임진왜란 3대 대첩, 임진왜란 당시 의병, 임진왜란 당시 영남 의병, 왜군의 침입 경로, 조선군의 배치, 영남 의병의 활동, 영남 지역의 주요 의병장과 활동상, 영남 의병의 공적, 조선 의병의 무기, 왜군의 무기, 정유재란 개요, 왜군의 침입 및 퇴각 경로, 피해와 반성' 등의 전시물들을 차례 차례 보여준다.

목록들만 훑어보아도 '이 의병관은 임진왜란을 처음부터 끝까지 논리정연하게 정리해낸 역사서 한 권의 무게를 갖추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저절로 일어난다. 실제로도 망우당공원의 임란의병관은 다른 어느 지역의 임진왜란 전시관에 견주어 결코 뒤지지 않는 충실성을 자랑하고 있다. 전란의 전체 흐름은 물론 각 단위 사건에 대한 명료한 해설뿐만 아니라, 홍의장군의 칼 등 생생한 실물들과 적절한 사진 및 그림이 곁들여진 전시물들은 전쟁의 실감을 새록새록 느끼게 해준다.

임진왜란을 처음부터 끝까지 잘 정리한 대구 임란의병관

전시물들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살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예를 들어 '조선 의병의 무기'를 꼼꼼하게 읽으면 비격진천뢰, 총통, 신기전 등에 대해 예전에 미처 알지 못했던 지식들을 '내 것'으로 삼을 수 있다. 비격진천뢰가 '일종의 시한폭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로켓 추진 화살'인 신기전이 '한 번에 100대'를 쏘았다는 해설 앞에서는 깜짝 놀라는 기분을 맛본다.

총통 사진 아래에는 그것이 '화포'이며 '왜군에게는 없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물론 '조선 의병의 무기' 옆에 있는 '왜군의 무기'를 보면 '일본 수군의 주력선'인 안택선은 '빠르다'는 특징을 가졌고, 조총이 일본군의 '주요 개인 무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조총을 보유한 덕분에 전쟁 초기에 일본군은 '조선보다 유리'했다.

임란 호국 영남 충의단. 임란의병관과 홍의장군 동상 사이에 있다.
 임란 호국 영남 충의단. 임란의병관과 홍의장군 동상 사이에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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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관의 전시물들을 유심히 살펴본 후 '임란 호국 영남 충의단'으로 이동한다. 임진왜란 당시 목숨을 바쳐 적들과 싸웠던 영남 지역 의사 315분의 위패를 모신 제단이다. 위패들은 태극기가 그려진 1층 출입문 안에 모셔져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보통 때에는 굳게 잠겨 있어 일반인이 참배를 할 수가 없다. 다만 '壬亂 護國 嶺南 忠義壇' 아홉 자가 김창숙 선생의 글씨라는 사실을 확인하며 다시 한번 탑을 쳐다본다.

충의단 앞인 만큼 조금 전 의병관에서 읽은 '영남 의병의 공적'을 되새겨 본다. 전쟁 당시 경상도는 '(일본군이) 곡창 지대인 전라도를 침략하기 위한 진출로'였고, '전선이 확대됨에 따라 일본과 최전선을 연결하는 보급로'라는 점에서 '전략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왜군은 개전 초기부터 전라도 지역으로 침입하여 군량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임진왜란 의병의 모습(대구 망우당공원 임란의병관)
 임진왜란 의병의 모습(대구 망우당공원 임란의병관)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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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본군의 의도는 '경상도의 의병과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에 의해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래서 '왜군은 군대를 분산시켜 낙동강을 건너 전라도 지역으로 침입하려' 들었고, 자연히 '경상도 의병들은 낙동강을 지키기 위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이러한 '영남 의병의 활약은 전락적으로는 적의 후방을 교란시키고 왜군의 병력을 분산시켰으며, 경제적으로는 낙동강 수로의 장악으로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영남 의병의 활약에 막힌 '왜군은 전라도에서 군량을 확보한다는 초기 전쟁 전략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고, 안전한 보급 기지와 전쟁 물자의 운송 경로를 확보하지 못한 왜군이 시간이 갈수록 패전을 거듭하게 만든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왜적 퇴치에 큰 몫을 한 의병 봉기 

'의병의 궐기는 향토와 동족의 방어를 위한 것이었고, 더 나아가 일본의 야만성에 대한 민족 감정의 발로였다. 유교적 윤리를 철저한 사회적 규범으로 하고 있었던 조선은 고려 말부터 왜구의 계속적인 약탈 행위로 인하여 일본인을 침략자로 여겼으며 문화적으로 멸시하여 '왜' 또는 '섬오랑캐'라고 불렀다. 이러한 일본으로부터 침략을 받아 민족적 저항운동으로 일어난 것이 의병의 봉기였다.'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12권

'일반 민중들은 관권에 의한 강제 징집으로 무능한 장군의 지휘를 받아 전국의 전선을 전전하며 싸우기 보다는 평소 잘 알고 신뢰할 수 있는 의병장의 휘하에서 싸우기를 바랐을 것이며, 향토 주변에서 부모와 처자를 보호하기에는 관군보다 의병으로 가는 것이 유리하였다.' -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29권

임진왜란 당시 전국의 의병은 약 2만 3천여 명으로, 관군의 1/4에 이르는 대단한 규모였다. 그 중 1만 2천여 명이 영남 의병으로, 전체 의병의 절반을 넘었다. 목숨을 던져 나라와 향토, 그리고 가족을 지키려 했던 영남 의병들의 정신과 기개를 떠올리며 '임란 호국 영남 충의단' 앞에서 잠깐 묵념을 한다.

'기강 승첩' 기록화(대구 망우당공원 임란의병관)
 '기강 승첩' 기록화(대구 망우당공원 임란의병관)
ⓒ 임란의병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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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 장군 동상을 바라보며 얕은 오르막을 걷는다. 동상 앞면에 부착되어 있는 금빛 동판은 이 기마상의 공식 명칭이 '홍의장군 곽재우 선생 상(紅衣將軍 郭再祐 先生 像)'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장군 상'이 아니라 '선생 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은 '장군'보다 '선생'이 더 높은 존칭이기 때문인데, 실제로도 곽재우는 왜란 발발 탓에 장군 역할을 했지만 본래 선비였다.

홍의장군은 '붉은 옷을 입은 장군'이라는 뜻

'붉은 옷을 입은 장군'이라는 뜻의 홍의장군은 의병장 곽재우를 일컫는 별칭이다. 이 별칭은 장군 본인이 직접 지었다. '홍의 장군' 네 글자가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사례를, 영조와 정조 때의 기록은 제외하고, 선조 당시의 기사에서만 찾아 읽어본다.

'현풍 사람 곽재우는 (중략) 항상 붉은 옷을 입고 스스로 "홍의 장군"이라 일컬었는데, 적진을 드나들면서 나는 듯이 치고 달려 적이 탄환과 화살을 일제히 쏘아댔지만 맞출 수 없었다. 충의롭고 곧고 과감하였으므로 군사들의 인심을 얻어 사람들이 자원하여 전투에 참여했다. 임기 응변에 능하여 (그의 수하에서는) 다치거나 꺾이는 군사가 없었다.' - <수정선조실록> 1592년 6월 1일 기사

망우당공원에는 임란의병관, 충의당, 홍의장군 동상 외에 얼핏 보면 팔각정처럼 여겨지는 '망우당기념관'도 있다. 그러나 이곳에 있던 유품 등은 임란의병관으로 옮겨졌고 사실상은 폐쇄되었다. 사진의 동판은 망우당기념관 벽에 붙어 있는 장군의 좌상이다.
 망우당공원에는 임란의병관, 충의당, 홍의장군 동상 외에 얼핏 보면 팔각정처럼 여겨지는 '망우당기념관'도 있다. 그러나 이곳에 있던 유품 등은 임란의병관으로 옮겨졌고 사실상은 폐쇄되었다. 사진의 동판은 망우당기념관 벽에 붙어 있는 장군의 좌상이다.
ⓒ 망우당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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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는 (전국 의병 중) 가장 먼저 (1592년 4월 22일) 군사를 일으켜 (중략) 그 아비가 명나라 북경에 갔을 때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붉은 비단 철릭(帖裏)을 입고서, 장사(將士)들을 거느리고 의령현 경내 및 낙동강 가를 마구 누비면서 왜적을 보면 그 수를 불문하고 반드시 말을 달려 돌격하니, 화살에 맞는 적이 많아서 그를 보면 바로 퇴각하여 달아나 감히 대항하지 못합니다. 왜적에게 사로 잡혔던 사람이 돌아와 "왜적들이 '이 지방에는 홍의 장군이 있으니 조심하여 피해야 한다.'고 했다." 합니다.' - <선조실록> 1592년 6월 28일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 장계

'진주가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 (중략) 곽재우는 선봉장 심대승으로 하여금 북산에 올라가 햇불을 들고 나팔을 불며 방포(放砲)하면서 성중에다 대고 크게 외치게 하기를 "전라도의 원병 1만여  명과 의령의 홍의 장군이 합세하여 내일 아침에 와서 적을 죽이기로 했다." 하니, 성안에 있는 사람들 역시 크게 외치면서 서로 호응하였습니다.' - <선조실록> 1592년 12월 5일 경상우도 관찰사 김성일 장계

'곽재우는 인품이 순박 강개하고 큰 뜻을 품었다. 왜란이 일어난 초기에 일개 서생(書生, 벼슬이 없는 선비)으로 분연히 의병을 일으켰고 재산을 모두 털어서 의병들을 먹였다. (중략) 적을 만났을 때는 반드시 홍의를 입고 곧장 진격하였으므로 적은 그를 천강(天降, 하늘에서 내려온) 홍의 장군이라 불렀다. (중략) 추호도 백성을 괴롭힌 일이 없으며, 벼슬을 버리고 떠나갈 때는 신 한 컬레에 말 한 필뿐 행리(行李, 옮겨다닐 때의 차림새와 소유한 물품)라고는 없었으므로 (이 말을) 듣는 자들이 모두 찬탄하였다.' - <선조실록> 1600년 6월 22일 사관

대구 망우당공원의 홍의장군 동상. 왼쪽 사진은 2010년 11월 29일에, 오른쪽 사진은 2016년 1월 22일에 찍었다. 약 5년 2개월의 시차가 나는 두 사진에서 가장 큰 차이는 동판의 빛깔이다. 언젠가 동판의 녹을 닦아낸 모양이다. 그러나 홍의장군 동상임에도 기마상의 인물은 푸른 옷을 입고 있다. 이 기사 맨 앞에 올려져 있는 사진의 홍의는 기자가 포토샵으로 붉게 칠을 한 것이다.
 대구 망우당공원의 홍의장군 동상. 왼쪽 사진은 2010년 11월 29일에, 오른쪽 사진은 2016년 1월 22일에 찍었다. 약 5년 2개월의 시차가 나는 두 사진에서 가장 큰 차이는 동판의 빛깔이다. 언젠가 동판의 녹을 닦아낸 모양이다. 그러나 홍의장군 동상임에도 기마상의 인물은 푸른 옷을 입고 있다. 이 기사 맨 앞에 올려져 있는 사진의 홍의는 기자가 포토샵으로 붉게 칠을 한 것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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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놀라운 일이다. 눈앞에 서 있는 동상의 홍의장군은 푸른 옷을 입고 있다. 2010년 11월 29일에 방문했을 때도 푸른 옷이었는데 2016년 1월 22일에도 여전히 푸른 옷이다(위의 사진 참조). 기마상 아래 받침석에 붙은 동판들은 말끔하게 닦여 본래의 금빛을 되찾았건만 장군의 옷은 예나 지금이나 짙푸른 녹색을 하고 있다. 홍의 장군은 도대체 어디로 가신 것일까!

홍의장군은 왜 푸른 옷을 입고 계시는 것일까

기마상 받침석 옆면에 붙어 있는 '건립문' 동판은 "우리 겨레가 임진왜란의 큰 국난(國難, 나라의 어려움)을 극복함에 있어서 솔선기의(起義. 의병을 일으킴)하여 백전불패의 위훈(偉勳, 큰 업적)을 세우신 홍의장군 곽망우당 선생의 애국지성(至誠, 지극한 정성)과 그 정신 그 모습을 영원히 추모하며 더욱 빛내고자 (선생이 1592년 5월 22일 기의하신 지 380년 되는 오늘 1972년 4월 22일) 이 자리에 본상(本像, 이 동상)을 세우게 되었다"면서 "(이 기마상을) 준공, 제막하게 되니 진실로 온 겨레의 기쁨이라"고 감격을 토로하고 있다.

그런데도 홍의장군은 어디 가시고 지금 이 자리에 아니 계시는 것일까! 동상을 쳐다보니, 오른팔을 높이 치켜든 채 힘차게 말을 달리는 홍의장군께서는 멀리 바라보시며 오늘도 왜적을 준엄하게 꾸짖으시는 듯하다. 하지만 놀랍게도 장군의 우렁찬 음성은 "나에게 붉은 옷을 입혀다오!"라는 팔공산의 메아리로 변해 망우당공원의 허공을 맴돌고 있다.



태그:#망우공원, #곽재우, #홍의장군, #김면, #김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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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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