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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동구 금남로 옛 전남도청 앞 광장. 최근 문화의 전당으로 조성된 이 건물은 5.18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시민들이 최후까지 싸웠던 곳이다.
 광주 동구 금남로 옛 전남도청 앞 광장. 최근 문화의 전당으로 조성된 이 건물은 5.18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시민들이 최후까지 싸웠던 곳이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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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한편에는 자신들의 욕망을 원 없이 실현하고 있는 정치 천재들의 땅 영남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헌법상 기본권인 피선거권조차 써먹을 일 없이 반민주적으로 욕망을 거세당한 정치 바보들의 땅 호남이 있다."

책 <아주 낯선 상식>의 한 문장이다. 저자는 광주 출생 김욱 교수로 서남대에서 헌법을 가르친다. 야당 정치인들이 '민주성지'라 추켜세우며 고개 숙이는 호남이 왜 '정치 바보들의 땅'인지 고개를 갸웃거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글은 어떤가. 지난 2012년 대선 직후 <오마이뉴스> 이주빈 기자가 쓴 기사("흩어진 꽃잎이 뺨을 때린다, 울지 마라 광주!")의 일부다.

"광주에 대한 기득권을 쥐고 있는 세력은 다름 아닌 광주를 슬로건 속에 박제시킨 세력들이다. 이들은 그 슬로건 실행의 개념으로 '광주의 전략적 선택'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나를 포함한 아둔한 지식인들은 그 용어가 전제하는 치명적 덫을 옳게 분별해내지 못했다.

'광주의 전략적 선택'이란 용어엔 이미 욕망 배제, 가치 우선의 선택이 강제되어 있다. 거칠게 얘기해서 자신들은 줄곧 욕망의 선택을 해왔으면서 광주에게는 늘 가치 우선의 선택을 강요해온 것이다. 그리고 나 같은 언론인을 비롯한 지식인들은 그 강제에 부역했다. 광주가 욕망을 거세당한 죽은 도시가 되는 데 부역한 것이다. 부끄럽고, 죄스럽다."

아직 잘 모르겠다고? 그럼 다시 책을 보자. 우선 '신성 호남'과 '세속 호남'이란 개념에 대해서다. '신성 호남'은 '민주성지'나 '진보정당의 뿌리'란 수식어로 상징된다. 그에 대비되는 개념인 '세속 호남'은 잘 살고 싶은 지역의 욕망이 투영된 말이다. '신성 호남'은 의무감이 돼 '세속 호남'을 가로막는다. 지역을 위해 투표하는 건 '격'이 떨어져 보이니 '민주성지' 호남이 그래선 안 된다는 당위 명제가 자연스레 성립된다.

그렇다면 다시 2012년 대선으로 돌아가자. 이주빈 기자는 같은 기사에서 "갑갑할 정도로 가치를 더 따지는 문재인 후보보다 '다시 잘 살게 해주겠다'는 박근혜 후보가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켜 줄 MB의 대체재로 더 적합하다고 유권자들은 판단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득표율 지도에서 외딴 섬처럼 홀로 노랗게 물들었던 호남은, 잘 살기 싫었던 것일까?

같은 맥락이다. 역설적이게도 '호남정신'이 더욱 신성화될수록 '호남의 욕망'은 점점 밀려날 수밖에 없는 구도다. 아니, 그들은 사회 속에서 강요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얼마든지 욕망을 위해 투표할 수 있지만, 너희는 안 돼.'

호남이 '전략적 선택'에 내몰린 이유

'호남 없는 개혁'에 대하여 <아주 낯선 상식> (김욱 지음 / 개마고원 펴냄 / 2015.11 / 1만5000원)
 '호남 없는 개혁'에 대하여 <아주 낯선 상식> (김욱 지음 / 개마고원 펴냄 / 2015.11 / 1만5000원)
ⓒ 개마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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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주요 공격대상인 '영남패권주의'를, 저자는 "영남인들이 정치권력을 통해 호남을 차별·배제함으로써 정치·경제적 기득권을 확대재생산하고 이러한 지역적 지배관계에 대해 사회문화 차원에서 이데올로기적 동의를 얻어내는 헤게모니"로 규정했다.

저자는 여기에 더 나아가 "새정치민주연합(현재 더불어민주당으로 개명했지만 책에서 사용된 단어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기사에서도 새정치민주연합으로 씁니다. - 기자 말)이 대선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영남에서 득표력이 있는 '영남후보'를 내세워 '호남몰표'로 뒷받침해야 하고, 그렇게 당선된 영남 대통령은 '민주성지' 호남의 정신적 양해 속에서 세속적인 영남을 물질적으로 유혹해 지역주의를 구조적으로 타파해야 한다'는 '은폐된 투항적 영남패권주의'도 '위선적 정치공학'"이라고 비판했다.

앞서 이주빈 기자의 글에서 등장한 '전략적 선택'이란 단어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호남이 인구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영남 정치인을 후보로 내세워 몰표로 지지한다는 의미다. 호남은 '광주학살'의 가해정당이 정권을 잡지 못하도록 '분열 없는 반새누리당 전선'을 운명처럼 받아들여 왔다. 이는 가혹한 조롱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책은 "자의건 타의건 5·18은 광주가 욕망을 거세당한 근원"이라면서 "광주가 욕망만으로 살기를 원하는 건 아니지만 욕망 없이 살기를 원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호남의 욕망은 어떻게 표출할 수 있을까. 저자는 지금의 틀 속에서 바뀌는 건 없다고 잘라 말한다.

"문제는 어떻게 잃어버린 욕망의 정치를 복원하는가이다. 5·18의 전국화를 구걸하기 위해 영남패권주의에 굴복하는 것? 그래서 누군가 전두환에게 세배하고 일해공원에서 산책을 즐기다 탈정치화된 5·18 기념식에 참석해주면 감지덕지하는 것? 새정치민주연합에 몰표를 던지며 일편단심하는 것? 표 받은 후엔 전국정당을 위해 호남이라는 지역 관념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해도 너그럽게 이해해주는 것? 진보세력의 '신성 광주'에 혹하는 것? 죄의식을 건드리며 호남'만'은 대동세상의 기대를 저버려선 안 된다고 부추기는 착한 현혹에 뿌듯해 하는 것? 모두 아니다! 절대 아니다!!" - 67쪽

저자는 "호남의 욕망을 배신할 경우 철저하고 가혹하게 응징해야만 한다"고 덧붙인다. 지역의 이익을 위해 투표하는 행위가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투표에 대한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는 사실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표 찍는 인질'로 정권창출에 이바지해도, 돌아오는 건 무엇인가.

호남 중진의원은 모두 '지역주의 부패세력'인가

가칭 '국민의당' 창당을 추진중인 무소속 안철수 의원이 지난 11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를 찾아 한상진 공동창당준비위원장 등과 함께 참배하고 있다. 안 의원 왼쪽 너머로 이날 국민의당 합류를 선언한 무소속 권은희 의원이 서 있다.
 가칭 '국민의당' 창당을 추진중인 무소속 안철수 의원이 지난 11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를 찾아 한상진 공동창당준비위원장 등과 함께 참배하고 있다. 안 의원 왼쪽 너머로 이날 국민의당 합류를 선언한 무소속 권은희 의원이 서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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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 18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5·18민주화운동 35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박관현 열사 묘역을 둘러보고 있다.
▲ 박관현 열사 묘역 찾은 문재인 대표 지난해 5월 18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5·18민주화운동 35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박관현 열사 묘역을 둘러보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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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하디짠한' 호남은 볼모로 잡힌 '전략적 선택'으로 치른 선거조차 새정치민주연합의 패배에 "오메, 으째야 쓰까"란 탄식을 내뱉어야만 한다. '반민주 세력을 집권시킬 수는 없다'란 겁박 앞에 '신성 호남'은 언제까지 이런 일을 반복해야 하는가. 이런 경향성에만 기대는 건 너무 비겁한 일이지 않은가.

야권분열을 우려하면서도 호남에 대한 배려가 없다. 5·18 묘역을 찾아 참배하면서도 호남 정치인들에게 박하다. 몰표를 받아도 선거가 끝나면 전국당을 위해 호남색을 지워야 한다는 명분으로 등을 돌린다. 

책이 인용한 새정치민주연합 측 자료에 따르면 2015년 1월 18일 기준으로 호남 권리당원 비율은 55.5%에 달하지만 대의원은 고작 15.7%다. 반면 영남 권리당원 비율은 3.3%에 불과하지만 대의원은 18.5%다. 저자는 '새누리당은 당 차원이든 정권 차원이든 호남을 위해 이런 배려를 꿈도 꾸지 않는데 새정치민주연합은 당 차원이든 정권 차원이든 얼마나 영남에 우호적이냐'고 묻는다.

또한 저자는 김영삼은 부산에서만 7선, 비례대표 1선을 하고 대통령이 됐고, 여권 유력 대선주자인 김무성도 부산에서만 5선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정동영의 경우 전주에서 2선을 하고 대통령 낙선 후 다시 고향출마를 한다는 이유로 총공세를 당했다고 지적했다.

저자는 정동영을 "세계 정치사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호남 출신 중진의원은 호남지역에 출마하면 안 된다'는 반민주적 이데올로기의 흔하디흔한 희생양 중 한 명이었다"고 평했다. 이런 기류 속에 호남의 정치 대표들은 '지역주의 부패세력'으로 전락해야만 했다.

물론 새누리당에서도 영남 지역구 의원이 험지 출마를 강요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는 서로 다른 문제라고 설명했다. 새누리당에서 행해지는 '다선의원의 고향제거'는 수뇌부의 영남패권주의를 위한 지역관리 차원이지만 호남에서는 '분리 제거'란 이데올로기를 띤다는 것이다.

이제 호남은 '세속화'될 필요가 있다

4·29재보선에서 광주 서을 국회의원에 도전하는 천정배 무소속 후보가 7일 광주시의회에서 '호남정치 비전 기자회견'을 열었다.
 4·29재보선에서 광주 서을 국회의원에 도전하는 천정배 무소속 후보가 7일 광주시의회에서 '호남정치 비전 기자회견'을 열었다.
ⓒ 천정배 후보 선거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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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궁극적으로 호남의 일당 독재가 깨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호남에서 새누리당과 경쟁할 여러 정당이 출현해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한 매체는 천정배 무소속 당선 직후 당시 조국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원이 이런 말을 했다고 보도했다. "내가 호남사람이라도 새정치연합을 안 찍는다. 돈 대주고, 힘 대주는데 의사결정에선 소외된다고 여긴다면 찍을 이유가 없다." 저자는 이 발언의 함의에 대해 다른 해석을 했지만, 자체만 놓고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책의 내용 모두에 온전히 동의하지 않지만, 이 하나는 분명히 말하고 싶다. 호남은 이제 할 만큼 했다. 심지어 새누리당에 한 표를 던진다고 해서 그 누가 돌을 던지랴. 호남은 '세속화'될 필요가 있다. 이제 호남의 '전략적 선택'을 강요하며 호사를 누렸던 세력이 답할 차례다.

"'분열하면 진다'는 겁박이 통하려면 최소한 '분열하지 않으면 이긴다'는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승리를 통해 분열하지 않은 세속적 대가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위선 떨지 않고 말한다면, 호남이라는 지역 단위로 투표했으므로 호남도 (영남이 수십 년을 악착같이 그랬던 것처럼) 지역(출신)단위의 대가를 얻을 수 있어야만 한다. 새정치민주연합은 그것을 보장하겠다는 정치 이데올로기적 신념을 가지고 있는가?" - 81쪽

극단적인 가정이지만, 호남에서 '새누리당'이 다수당이 된다고 해도 이상하게 볼 일만은 아닌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기 전에, 김욱 교수가 책에서 풀어놓은 문제들이 공론화돼 활발한 논쟁이 벌어지길 바란다. 이제는 '쉬쉬'하지만 말고 공적 담론을 통해 털고 가자는 얘기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모두에게 '아주 낯선 상식'으로만 남겨둘 수 없는 시간이 왔다.

덧붙이는 글 | <아주 낯선 상식> (김욱 지음 / 개마고원 펴냄 / 2015.11 / 1만5000원)



아주 낯선 상식 - '호남 없는 개혁'에 대하여

김욱 지음, 개마고원(2015)


태그:#김욱, #아주낯선상식, #개마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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