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짐을 줄이고 줄였는데도 12kg이 넘었다.
▲ 우리 부부의 배낭 짐을 줄이고 줄였는데도 12kg이 넘었다.
ⓒ 박성경

관련사진보기


순례 첫 날 아침 비가 내렸다. 어깨도 발걸음도 무거운 출발이었다.
 순례 첫 날 아침 비가 내렸다. 어깨도 발걸음도 무거운 출발이었다.
ⓒ 박성경

관련사진보기


드디어 한국에서부터 쌌다 풀었다를 수십 번 해왔던 배낭을 짊어지고 순례길을 걷는 첫 날.

짊어진 짐의 무게가 카메라를 합쳐 12.5kg이나 되었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걸어야 할 길이 25km나 되었기에 설렘과 기대 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숙소 바깥으로 첫 발을 내딛은 아침. 짊어질 짐의 무게와 넘어야 할 산의 높이와 걸어야 할 길이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세찬 비가 눈앞에 내리치는 것이 참으로 불편하고 난감한 문제였으며, 피레네 산맥에는 비가 아닌 눈이 펑펑 내려 우리가 원래 가려고 했던 오리송 루트가 폐쇄됐단 소식이 우리 부부가 당면한 정말 거대한 문제였다.

가장 아름다운 구간으로 꼽히는 오리송 루트

생 장 피드 포르에서 출발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일명 '프랑스 길'을 걷는 순례자들 대부분은 오리송(Orisson)을 지나 피레네 산맥을 넘는 루트를 선택한다. 이 루트는 피레네 산맥의 높은 경사를 타고 넘어야 하는 힘겨움이 있지만, 웅장한 피레네 산맥의 풍경과 길을 따라 펼쳐진 울창한 활엽수림 때문에 순례길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구간이라고 손꼽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프랑스와 스페인의 옛 국경을 나타내는 흔적이 있어 국경을 넘어 순례길을 걷는다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도 있기에 우리 부부 역시 이 길을 선택하고 준비했었다. ('오리송 루트'는 나폴레옹 부대가 이베리아 반도를 침공할 당시 이 루트를 이용했다고 해서 '나폴레옹 루트'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길을 나섰을 때는 이 오리송 루트가 폭설로 인해 폐쇄됐다.

오리송 루트에 눈이 쌓여 있다는 정보는 전날 순례자 사무실에서 가장 먼저 들었다. 오리송 주변에 눈이 많이 내려 일반 순례자가 그곳을 지나기에는 아주 위험하니, 만약 그 길로 가려거든 신상정보를 적어놓고 무슨 문제가 생겨도 본인의 책임이라는 내용에 사인을 해놓고 가라고 했다.

12.5kg의 무게를 짊어지고 산길을 걸으며 고행을 하게 되리라곤 생각했지만, 목숨 떼놓고 순례를 하게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우리 부부는 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우리는 그 설명을 듣고서도 오리송 길로 꼭 걷고 싶다는 생각으로 순례를 준비했었기에 순례자 사무실엔 슬쩍 그 길로 가지 않는다고 말해놓고 오리송 길로 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길을 나서는 날 아침, 미국에서 순례를 온 '칼린'이 오리송 루트가 아예 폐쇄됐다고 알려줬다. 오리송에서 하루를 묵은 사람들도 그쪽 루트로 피레네 산맥을 넘지 못하고 모두 버스를 타고 산 아래 마을로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날 오리송 루트는 폐쇄됐고, 오리송에 묵은 순례자들도 모두 버스를 타고 내려와야 했다.
▲ 눈 쌓인 피레네 산맥 이날 오리송 루트는 폐쇄됐고, 오리송에 묵은 순례자들도 모두 버스를 타고 내려와야 했다.
ⓒ 박성경

관련사진보기


이날 모든 순례자는 발카를로스 루트를 걸었다.
 이날 모든 순례자는 발카를로스 루트를 걸었다.
ⓒ 박성경

관련사진보기


칼린의 말은 사실이었다. 정말 피레네 산맥으로 발을 넣고 보니 멀리 산 정상에는 하얗게 눈이 쌓여 있었고, 오리송 루트 폐쇄로 버스를 타고 내려온 순례자들을 다수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날, 산티아고로 향하는 프랑스길 순례에 나선 이들은 모두 오리송 루트가 아닌 발카를로스 루트를 걷게 됐다. 발카를로스 루트는 계곡을 따라 완만한 산길을 걷는 이점이 있지만 경치는 오리송 루트에 비해 좀 떨어진다고 한다.

그런데 서운하고 아쉽고 하는 감정이 별 필요치 않다. 순례자가 맞은 첫 날, 첫 피레네의 느낌은 루트가 바뀌었고 아니었고와 상관없이 싱그럽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어느새 비도 그쳐 억수같은 비를 맞으며 내딛었던 첫 걸음보다는 발걸음도 훨씬 가벼워졌다.

발카를로스 루트 걸을 때 꼭 명심해야 할 것

누군가는 자신이 지닌 삶의 무게 만큼 짐을 짊어지고 순례길을 나선다고 하는데, 사실 짊어진 삶의 무게만 아니면 이 발카를로스 루트도 연신 감탄사를 연발할 만큼 풍경은 아름답고 계곡물 소리는 정겨웠으며 공기는 맑고 상쾌했다.

그런데 발카를로스 루트를 걸을 때 꼭 명심해야 할 부분이 하나 있다. 아름다운 산길이 아닌 아스팔트가 깔린 차도로 접어들지 않게 신경을 바짝 써야 한다는 것. 차도로 잘못 접어들게 되면 멋진 풍경도 놓치고 쌩쌩 달리는 차들 옆으로 위험하게 걸어야 한다.

우리 부부는 생 장 피드 포르를 나서면서부터 길을 잘못 들어 차도로 걸었다가,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 마을인 아르네기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부터는 제대로 산길로 접어들었다가, 또 다시 차도로 나오기를 반복했다.

지팡이를 짚은 순례자의 모습이 그려진 표지판을 따라 걸어야 한다.
▲ 순례 표지판 지팡이를 짚은 순례자의 모습이 그려진 표지판을 따라 걸어야 한다.
ⓒ 박성경

관련사진보기


깨끗한 자연 속에 자리한 아름다운 마을이다.
▲ 발카를로스(Valcarlos) 마을 깨끗한 자연 속에 자리한 아름다운 마을이다.
ⓒ 박성경

관련사진보기


위에 있는 사진에 나오는 배낭 메고 지팡이 든 순례자 그림이 있는 표지판이 도보자를 위한 표시이므로, 표지판이 나타날 때마다 잘 보고 차도로 빠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생 장 피드 포르의 순례자 사무소에서 나눠주는 설명서에 처음 발카를로스 루트로 접어드는 도보길을 커다랗게 사진까지 찍어 자세히 알려주므로 그걸 잘 챙겨야 한다. 길이 의외로 헷갈린다. 우리 부부가 처음부터 길을 헤맨 건 순례자 사무소에서 주는 그 사진을 휙 보고 그냥 버렸기 때문이다.

발카를로스 루트란 발카를로스(Valcarlos) 마을을 지난다고 붙여진 이름이란 건 발카를로스 마을에 도착해서 알았다. 이 길로 올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마을 참 예쁘다.

발카를로스는 소박한 산티아고 성당(Iglesia de Santiago)을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는데, 우리는 피레네의 산세가 멋지게 펼쳐지는 광장의 벤치에 앉아 도시락을 먹었다.

사실 도시락은 오리송 루트를 걷는다 생각하고 준비한 것이었다. 오리송 루트에선 오리송을 지나면 쉴 만한 마을이 없어 식당과 휴게 시설도 이용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음식이랑 물을 충분히 준비해 뒀던 건데, 알베르게도 있고 식당도 있고 바도 있는 발카를로스 노천에서 도시락을 까먹게 되니 좀 억울하긴 했다.

그런데 언제 또 우리 부부가 이렇게 피레네 산자락의 아름다운 풍경을 내려다보며 도시락을 먹겠는가. 도시락 무게 만큼의 배낭 무게도 덜고, 휴식으로 힘은 더 챙겨서 다시 길을 나섰다.

순례자들끼리 주고 받는 인사 "부엔 카미노"

순례자들이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걷고 있다.
 순례자들이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걷고 있다.
ⓒ 박성경

관련사진보기


순례의 첫 날은 그랬다.

뭐든 다 아름다워 보였다. 누구든 반가웠다. 배낭이 천근만근 무거운 것도 당연하다 생각됐다. 발바닥에 불이 나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다리가 휘청거려도 즐거웠다. 순례는 그런 것이라, 힘들어야 순례라, 순례길에 오른 모두가 그러하리라.

그래서 마냥 "Buen Camino(부엔 카미노)~" 였다.(Buen Camino 직역을 하면 '좋은 길'이란 의미. 순례자들끼리의 인사말로 쓰인다.)

아침에 오리송 길이 폐쇄됐다는 소중한 정보를 줬던 칼린(아래 사진의 가장 왼쪽)과 그녀의 친구들을 샘터에서 다시 만났을 때도 "부엔 카미노~"를 힘차게 외쳤다. 그런데 너무 반가웠던 나머지 그 샘터의 물이 먹을 수 있는 물인지 아닌지를 보지도 않고, 물병에 남은 물을 '쫄딱' 마셔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수도꼭지에 빨간 X자 표시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는데, 앞으로 발카를로스 루트의 가장 험난한 여정이 남았는데, 이를 어째...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

가장 왼쪽에서 밝게 웃고 있는 사람이 아침부터 우리 부부의 순례에 도움을 준 '칼린'이다.
 가장 왼쪽에서 밝게 웃고 있는 사람이 아침부터 우리 부부의 순례에 도움을 준 '칼린'이다.
ⓒ 박성경

관련사진보기


발카를로스 루트는 산길 경사가 오리송 루트에 비해 심하지 않다고 하지만 이 길에도 숨이 깔딱깔딱 넘어갈 것만 같은 '깔딱고개'가 있다. 바로 발카를로스 루트의 정상, 해발 1057m에 이르는 이바녜타 언덕(Puetro de Ibaneta)이다.

오리송 루트에 비해 발카를로스 루트는 경사도 완만하고 거리도 1km 남짓 짧다는 지식만 있었기에 걷는 내내 '아... 훨씬 쉽겠구나'했다. 하지만 그 짧은 지식 때문에 길은 더 멀게 느껴지고 고개는 더 높아 보였으며 힘은 훨씬 많이 들었다. 게다가 남은 일정을 고려하지 않고 남은 물도 다 마셔버렸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표정으로 사진을 찍은 이후에 이바녜따 언덕에 오르기까지 사진 한 장 없는 이유는 정말, 레알(real), 힘들어서다.

'장미의 계곡'이란 뜻을 지닌 '론세스바예스'라는 지명이 생긴 유래와 그에 관한 전설이 전해진다
▲ 롤랑의 기념비 '장미의 계곡'이란 뜻을 지닌 '론세스바예스'라는 지명이 생긴 유래와 그에 관한 전설이 전해진다
ⓒ 박성경

관련사진보기


독일 순례자와 남편이 정보를 나누며 걷고 있다.
▲ 산 살바도르 소성당 독일 순례자와 남편이 정보를 나누며 걷고 있다.
ⓒ 박성경

관련사진보기


숨이 홀딱 넘어갈 만큼 힘든 길을 걸은 뒤에 시원하지 않은 바람이 있겠으며, 멋있게 보이지 않는 산과 하늘이 있겠는가. 하지만 이바녜타 언덕(Puetro de Ibaneta)에서 바라본 풍경은 정말 끝내줬다.

설산을 뒤로 한 롤랑의 기념비는 그 사연을 잊을 정도로 바람 속에서 처연했고, 산 살바도르 소성당은 푸른 하늘 아래 드리운 선들이 화려하지 않아 오히려 아름다웠다.

롤랑의 전설과 론세스바예스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하자면 이렇다.

778년 8월 15일 기독교 세력인 샤를마뉴와 그의 군대는 이슬람 군대로부터 '사라고사'를 탈환하려는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피레네 산맥을 넘던 중 후방을 맡고 있던 롤랑의 부대가 사라고사의 마르실리오 왕으로부터 습격을 받게 되었다. 위험에 처한 롤랑은 일찍부터 왕의 도움을 청할 수 있었던 전설의 뿔 나팔 '올리판테'를 불면 됐었는데, 자존심과 책임감이 강한 나머지 60여 명의 부하만 남게 되어서야 나팔을 분다. 하지만 왕의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롤랑은 전사하고 만다.

뒤늦게 전투에 패한 것을 알게 된 샤를마뉴는 이곳에 도착해 죽은 병사들을 위한 가톨릭식 무덤을 마련하라고 병사들에게 명령했는데, 병사들은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를 구분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에 샤를마뉴는 그들을 구분할 수 있는 증표를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했고, 이후 입에서 장미가 피어나는 시체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로시스 바예(Rosis Valle, 장미의 계곡) 즉, 론세스바예스(Roncessvalles)라는 지명의 기원이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샤를마뉴가 얼굴을 스페인으로 향한 채 죽어있는 롤랑을 발견한 곳이 이바녜타 정상 혹은 산 살바도르 소성당 터였다고 한다.

공립 알베르게(순례자 숙소)가 있는 산타 마리아 왕립 성당  광장에서 순례자들이 쉬고 있다.
▲ 론세스바예스 (Roncessvalles) 공립 알베르게(순례자 숙소)가 있는 산타 마리아 왕립 성당 광장에서 순례자들이 쉬고 있다.
ⓒ 박성경

관련사진보기


구구절절 이렇게 사연이 깊어 도착도 이리 힘들었을까 싶다. 아니, 구구절절 그렇게 슬프고 아름답고 역사 깊기까지 한 사연이 있으니 이리 풍경이 예쁘나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바녜타 언덕을 힘겹게 오르고 난 뒤에도 '이제 다 왔나...',  '정말 다 왔나...' 몇 번이나 코너를 돌고 돌아 길 아래로 펼쳐진 론세스바예스의 풍경을 봤을 때, 나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단 하나, "감격스럽구나!" 였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가봤기 때문에 난 말할 수 있다. 사실 순례가 끝나는 날 산티아고 대성당 앞 광장에 섰을 때보다 순례의 첫 날, 저 론세스바예스의 광장을 내려다 봤을 때가 더 감격스러웠노라고.



태그:#산티아고 순례, #카미노 데 산티아고, #론세스바예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