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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1월 22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한-아세안 정상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1월 22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한-아세안 정상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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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민주국가에서 국민은 그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

프랑스 정치학자 알렉시스 토크빌이 한 말이다. 언젠가부터 이 인용구가 한국사회에서 진리처럼 통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 말이 사실일까?

한국은 '정부'라고 할 것도 없이, 대통령 개인의 뜻이 한 치 오차도 없이 실현되는 나라이니, '정부'를 그냥 '대통령'으로 바꿔도 좋겠다. 어쩌면 박 대통령이 후보 시절에 내세웠던 구호, '내 꿈이 이뤄지는 나라'가 이것을 염두에 두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토크빌의 말대로라면, 우리 국민 수준이 박근혜 대통령 수준이라는 뜻이 될 것이다.

'지도자 수준이 곧 국민 수준'이라는 말이 우리 자신에게 모욕이 될지 칭찬이 될지 모르겠으나, 토크빌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이 말이 '선출된 독재'를 정당화하는 데 악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민주적 절차를 통해 집권한 지도자라 하더라도, 그가 위임받은 권력을 국민의 뜻과 어긋나게 악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우리는 그저 '국민 수준이 낮아서 그런 지도자를 뽑았으니 별수 없다'며 넋 놓고 있어야 할까?

게다가 토크빌의 말이 꼭 옳은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한국 국민은 지난 3년간 대통령과 지속해서 '다른 수준'의 사고능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최근 이슈만 해도 그렇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해 찬성하는 사람보다 더 많은 국민이 반대했고, '복면 금지법'에 대해서도 더 많은 국민이 반대하고 있다.

그뿐인가.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1월 14일 1차 민중총궐기 대회를 '테러'로 비난하면서 '노동개혁'을 밀어붙이고 있다. 우리 국민은 대통령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오히려 국민 대다수는 노동개혁안을 '재앙'으로 보고 있다. 전국의 시민들 7만여 명에게 투표로 의견을 물은 결과, 무려 96%가 '개혁'이 아니라 '재앙'이라고 답한 것이다. 이래도 우리 국민이 박근혜 대통령과 같은 수준이란 말인가?

토크빌이 경험하지 못한 한국의 독과점 언론

토크빌을 한국사회에 적용할 수 없는 이유가 또 있다. 바로 토크빌이 보지도, 듣지도 못했을 '독과점 언론'이 그것이다. 토크빌은 19세기 초에 태어나 19세기 중반까지 살았다. 그가 활동하던 당시 언론 환경은 지금과 크게 달랐다.

당시는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없던 시대였으니 신문과 잡지만이 유일한 매체였다. 여기에, 소수가 다수의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거대 언론 기업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한 언론사가 신문과 방송은 물론, 인터넷과 옥외 광고판까지 손에 쥐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토크빌이 살았던 당시 저널리즘은 '당파언론'에 가까웠다. 언론은 '중립보도'를 자임하지 않았고, 각기 지지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을 후원하면서 그들로부터 금전적 지원을 받았다. '막장언론'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당시는 모든 매체가 영세했고 영향력도 모두 고만고만했기에, 지금과 같은 여론 독과점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많은 매체가 비슷한 크기의 목소리로 독자들에게 다양한 시각을 제공하는 순기능도 있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에 언론의 '중립보도'가 정착되기 시작했지만, 불행히도 같은 시기에 언론활동을 이윤추구의 수단으로 삼는 '언론기업'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오늘날 언론은 '중립'을 표방하고 많은 독자도 그렇게 믿지만, 사실은 자본권력이나 정치권력과 결탁해 국민의 판단을 교묘하게 조종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면에서 한국 국민 대다수가 노동 개악에 반대한다는 '을들의 투표' 결과는 무척 놀랍다. 이제 한국 사회는 상식적으로 사고하기조차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수신료와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은 정부 홍보 매체가 된 지 오래고, <조중동>으로 불리는 보수언론은 일간지뿐 아니라, 종편 방송사마저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 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심사 과정을 통해) 무더기 방송허가를 얻은 종편은, 듣기 민망한 수준의 억지와 막말을 '뉴스'와 '시사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내보내고 있다. 본래 '막말'이라는 게 정보로서의 가치는 없어도 원초적 흥미는 자극하는 법이라, 가정집 거실·식당·버스 터미널 등에서 '생각 없이 켜놓는 방송'으로서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노동자와 '헝그리 정신 부족' 탓하는 <연합뉴스>

<연합뉴스> 기사 "한국에 '헝그리 정신'이 사라졌나... 노동의욕 61개국 중 54위" 갈무리
 <연합뉴스> 기사 "한국에 '헝그리 정신'이 사라졌나... 노동의욕 61개국 중 54위" 갈무리
ⓒ 연합뉴스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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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는 생각의 재료 역할을 한다. 썩은 재료로 맛있고 영양가 높은 음식을 만들 수 없듯, 부정확하고 왜곡된 정보로 세상에 대해 바른 판단을 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연합뉴스>가 최근 크게 주목받았다. "한국에 '헝그리 정신'이 사라졌나... 노동의욕 61개국 중 54위"라는 기사 때문이었다.

형태는 다르고 매번 주목받지도 않지만, 이런 식의 보도는 대다수 언론에서 일상적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식의 왜곡되고 몰상식한 뉴스가 득세하는 사실은, 한국에서 최소한의 상식을 가지고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토크빌의 말을 한국적 상황에 맞게 바꿀 필요가 있다. '대통령 수준'인 것은 한국 언론이지, 한국 유권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합뉴스>는 최근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원이 발표한 <2015 세계인재보고서> 내용을 요약 보도하고 이에 대해 논평했다. 세계 61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한국은 전체 국가 순위에서 31위에 올랐고, 1위는 스위스를 비롯해 덴마크·룩셈부르크·노르웨이·네덜란드·핀란드 등의 유럽 복지국가가 상위를 차지했다.

<연합뉴스>의 기사는 '노동자 의욕(Worker Motivation)' 순위에 특별한 주안점을 두었는데, 이 점수가 종합순위에 한참 못 미치는 54위에 머물렀다. 이 순위 역시 1위가 스위스였고, 덴마크·노르웨이·아일랜드·룩셈부르크 순서로 앞과 비슷한 유럽 국가들이 선두를 달렸다. 한국 노동자의 의욕이 떨어지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여기서 <연합뉴스>는 전경련 관계자의 발언을 인용한다. "한국의 노동자 의욕이 낮은 것으로 평가받은 데 대해 임상혁 전국경제인연합회 상무는 '헝그리 정신이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유럽의 나라들이 상위권을 휩쓴 비결이 '헝그리 정신' 때문이었다는 말인가?

앞서 언급된 보고서는 국가의 인재 경쟁력을 '투자개발', '공교육 투자', '유능한 고위 경영진', '주거비와 생계비용' 등 나름 체계적 요인으로 분석하고 있다. 만약 기자가 이를 논평할 능력이 없다면, 최소한의 합리적 언어와 사고를 갖춘 사람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연합뉴스>는 재계를 일방적으로 대변하는 사람을 인터뷰하고, '헝그리 정신'이라는 지극히 비합리적이고 주관적인 언어를 인용하면서 그것을 제목으로까지 뽑았다.

정부, 재계가 싫어할 내용 누락시킨 기사

인재 경쟁력과 노동의욕에서 선두를 달리는 스위스·덴마크·노르웨이·핀란드·룩셈부르크는 우리나라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우선 노동시간이 절대적으로 짧고, 임금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으며, 피고용자 보호를 위한 정부의 규제도 한국보다 훨씬 엄격하다. 여기에 실직해도 정부가 생계를 보장하기 때문에, 아무 일자리나 구하는 게 아니라 본인이 잘하고 좋아하는 업무를 찾게 된다.

이와 달리, 한국은 최저생계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자아실현'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 닥치는 대로 일자리를 찾게 된다. 이런 나라에서 노동의욕이 바닥인 게 이상한가? 한국의 순위가 바닥인 이유는, 유럽복지국가들이 선두인 이유와 정확히 반대다. 복지가 바닥이고, 임금이 바닥이며, 고용안정성이 바닥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 노동자들은 세계 최장 노동에 지쳐 있다. 한국은 지난해 노동시간으로 세계 1위를 기록했다. 지난 몇 년간 멕시코에 1위 자리를 내주었다가 되찾은 기록이니, 박근혜 정부의 '치적'이라 할 만하다. 여기에, <연합뉴스>가 분석한 <2015 세계인재보고서> 원문을 찾아보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연합뉴스>가 재계나 정부가 싫어할 보고서 내용을 누락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한국은 교육 공공투자에서 앞의 유럽국가는 말할 것도 없고, 말레이시아(18위), 라트비아(20위), 몽골리아(29위)보다 한참 떨어지는 33위를 기록했다. 투자개발에서도 대만(18위)이나 태국(19위)에 한참 처지는 32위였다.

"최악의 분야는 '생계비용 지수'로, 무려 56위였다."
 "최악의 분야는 '생계비용 지수'로, 무려 56위였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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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순위가 더 떨어지는 요인으로는 '삶의 질'로 40위였고, 더 끔찍한 것은 '유능한 고위 경영진' 순위로 44위였다. 하지만 최악의 분야는 '생계비용 지수'로, 무려 56위였다. 이를 종합해보면 한국은 임금은 낮은 반면, 생계비는 턱없이 높은 살기 어려운 나라인 셈이다. 여기에 무능한 경영진들이 터무니없는 요구(예컨대 '헝그리 정신 좀 발휘해 봐' 따위)도 견뎌내야 하니 오죽하겠는가.

결국 한국인의 노동의욕이 낮은 까닭은 '헝그리 정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헝그리'하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왜곡된 뉴스를 세금·수신료·광고비를 내며 봐야 하나

<연합뉴스>는 '공적 기능 순 비용 보전'이라는 명목으로 정부로부터 매년 300억 원이 넘는 돈을 지원받고 있다. 아마 '정부 돈을 받기 때문에 정부 편을 들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가 돈을 찍어서 주는 게 아니라, 국민의 세금을 걷어서 준다는 점에서 <연합뉴스>의 왜곡보도는 분명히 '주인 엿먹이는' 행위임이 틀림없다.

<연합뉴스>가 정부로부터 돈을 받아가는 이유가 '공적 기능 순 비용'이라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공영방송이야 국민에게 직접 돈을 징수하니 말할 필요도 없다. 상업 지상파 방송과 종편은 광고를 시청자에게 보여주고, 광고주들로부터 돈을 받는 방식으로 이윤을 추구한다. 그렇다면 광고주는 그 돈을 어떻게 마련할까?

바로 물건이나 서비스를 가격에 포함해 소비자에게 전가하는 식이다. 결국 공영매체든 상업 매체든 돈은 모두 시민들이 부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론사에 제대로 된 정보를 요구할 자격이 있고, 또 그래야 마땅하다. 비록 한국 언론과 지도자는 수준이 같다 하더라도, 우리 국민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헝그리 정신이 필요하다'는 배부른 매체에는 '헝그리'가 무엇인지 일깨울 필요가 있다. 지금부터라도 구독하는 신문을 바꾸고, 텔레비전을 끄고, 한심한 보도에 항의하도록 하자. 후원은 가치 있는 언론에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 편집ㅣ김준수 기자



태그:#연합뉴스, #박근혜, #독과점, #종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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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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