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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표구사 입구에서 이효우 대표가 환하게 웃고 있다
▲ 낙원표구사 입구에서 낙원표구사 입구에서 이효우 대표가 환하게 웃고 있다
ⓒ 이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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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인사동 거리에는 두 집 건너 한 집이 표구사일 만큼, 표구사가 많았다. 그 시절, '낙원 표구사'라는 이름의 간판을 걸었다. 표구사가 하나씩 사라지고, 전통문화라는 이름으로 맛집, 찻집이 들어오고, 중국 골동품까지 전통문화인 양 인사동에 들어올 때에도 굳건히 그 자리를 지켰다.

그 사이 수십 명의 기술자들, 수 백 명의 주문자들이 낙원 표구사의 문턱을 지나갔다. 그렇게 이어온 표구 인생 55년. 인사동 표구의 산 '역사'가 된 낙원 표구사 이효우 대표를 10월 말 낙원 표구사에서 만났다. 표구 산업이 쇠퇴하는 오늘, 전통문화로서의 표구의 가치를 되찾기 위한 모색에 대해 이야기 나누어보았다.

조선 왕실에서 표구를 불렀던 이름 '장황'

전통문화로서의 표구의 가치를 되찾기 위한 모색 중 하나가 표구의 이름 되찾기이다. 일제 강점기 이전, 조선 왕실에서 표구는 '장황'이라고 불렸다. 표구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들어왔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표구사가 전국 곳곳에 개업을 하기 시작했다. 이름과 함께 일본식 기술, 일본문화도 함께 들어왔고, 조선식과 일본식의 기술과 문화가 결합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입과 손을 통해 그대로 전수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표구 용어에는 일본식 표현이 많다. 직각자는 '사시가네', 긴 자는 '조기', 작업대는 '바이다', 마름질 솔은 '나대바께'처럼.

표구의 이름 되찾기는 일제 강점기에 훼손된 문화재를 복원하고, 전통문화를 바꾸어가는 흐름과 유사한 것이리라. 이효우 대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담아 1985년에 '표구에 있어서의 용어 및 재료와 작업과정에 대한 단상'이라는 제목의 소논문을 내기도 했다.

이효우 대표는 이 논문을 통해서 '표구'의 일본식 용어를 한국어로 바꾸자는 제안을 했다.
▲ 이효우 대표가 쓴 소논문 이효우 대표는 이 논문을 통해서 '표구'의 일본식 용어를 한국어로 바꾸자는 제안을 했다.
ⓒ 이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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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본 사람들에게 표구를 배운 1세대들에게 표구를 배운 세대에게 표구를 배운 세대였어요. 그때는 도제식으로 배웠으니, 표구 용어도 다 일본식으로 썼어요. 그런데 지금은 다 한국 사람들에게 배운 사람들이잖아요. 용어를 바꿀 필요가 있죠. 1970년대부터 용어를 개선하자는 말을 했어요. 물론 바로 바꾸기 힘드니까 표구와 장황을 함께 병기해서 쓰자는 의견도 냈어요. 그때는 호응이 없었는데... 의식이 변화하고, 각성하면서 우리말로 쓰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거 같아요."

이름을 바꾸자는 것은 단순히 '이름'만을 바꾸자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 있는 더 많은 전통과 문화를 되살려내자는 뜻이다.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뀐 것은 단순히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이름이어서만은 아니었다. 일제에 충성하는 '황국신민'을 키운다는 일제 식민지의 잔재를 털어내고, 일본이 만든 군대식 교육 문화에서 탈피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당연히 표구를 '장황'으로 바꾸는 것도 그런 일이다. '장황'으로 이름을 바꾸자는 것에 표구 산업의 위기 속에서, 기본으로 되돌아가자는 자성적 목소리라고 봐야 할 것이다.

"1960~1970년대가 되면서 기술이 없이도 표구사를 열 수 있는 시대가 되었어요. 그러다가 일감이 없어지니까 기술이 발전하는 게 아니라 가격 깎는 경쟁이 되었어요. 표구가 위기를 맞은 거죠. 그러면서 오히려 표구를 단순히 병풍, 액자, 족자를 꾸미는 일을 하는 것으로 인식하지 말자, 표구의 본래적 가치를 찾자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 거 같아요. '장황'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이 더 드는 거죠."

이효우 대표는 장황사가 하는 일은 단순히 병풍, 액자, 족자만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표구에는 문화재의 복원, 보존적 측면과 장식적 측면이 있는데, 이 모두를 두고 표구를 제작하는 것, 가치를 판단하는 것, 이것이 진짜 장황사가 하던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장황'으로의 모색은 단순히 이름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표구의 제 역할을 찾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효구 대표는 표구를 '장황'으로 바꾸는 것을 찬성하면서도, 걱정이 되었는지, 강제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여러 번 강조했다.

"우선은 병용하는 단계를 거쳐야 해요. 장황이라는 이름을 자연스럽게 알게 하고, 선택적으로 사용하도록 해야 해요! 그렇게 서서히 해야 해요. 무리하지 말고."

다른 나라 '사대'해서는 전통문화 가꿀 수 없어

족자 나무는 그대로 사용할 경우 휘어질 수 있어서 이음새를 만들어서 여러개의 나무를 이어 사용한다.
▲ 족자 나무의 이음새 족자 나무는 그대로 사용할 경우 휘어질 수 있어서 이음새를 만들어서 여러개의 나무를 이어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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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우 대표는 '장황'이라는 이름을 찾는 과정은 우리 전통문화를 되찾는 과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전통문화를 대하는 사람의 인식과 태도일 것이다. 그는 본인이 겪었던 체험담을 이야기하면서, 전통문화를 대하는 잘못된 인식을 지적했다.

"족자를 만들다보면, 족자에 쓰는 나무가 조금만 휘게 되면 족자도 휘게 되어요. 오그라드는 현상이 생겨요.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나무를 이어서 사용했어요. 그런데 미국사람이 이걸 봤는데, 이해가 안 되었던 거 같아요. 그렇지 않겠어요? 기계로 나무를 쭉 빼면 되는데 여러 나무를 이었으니까요. 아무런 설명이 안 되니까 동양의 음양오행 사상에 따라 그렇게 만들었다고 이야기했어요. 나무에 암수가 있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이렇게 말도 안되는 말을 호암 미술관에서는 그걸 그대로 인용했어요. 우스운 일이죠."

그는 왜 미국사람의 이야기만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이는지 모르겠다고 한탄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남들이 우리 문화를 잘못 이야기할 때, 정확하게 제기하기는커녕, 오히려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한 하소연이었다. '장황'은 문화재를 대하는 올바른 태도를 배우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재 관리, 돈으로 따지는 기준의 변화 필요해

이효우 대표는 문화재 관리를 돈의 가치로 따지는 것에 대해서도 일침을 놓았다. 단가를 낮추려다보면 당연히 재료 가격을 낮추게 된다는 것이다. 한지를 발라야 하는데 양지를 바르고, 알카리성 종이를 써야하는데 산성 종이를 쓰게 되는 일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당연히 문화재의 수명은 줄어들게 될 것이다. 당장에 눈에 띄지는 않지만 말이다.

"문화재를 관리하는 사람들 대다수는 돈으로 관리비를 책정해요. 최고의 재료, 최고의 종이, 최고의 풀을 썼느냐를 봐아야 하는데 말이죠."

문화재 복원과 보존 사업은 장식적인 측면이 아니라 보존적인 측면에서 더욱 접근해야 한다. 그는 '어디 표구사가 더 저렴한가?'가 아니라 '어떤 상태로 복원, 보존되어야 할 것인가?'로 문화재를 다루는 기준을 바꾼다면, 더욱 질높은 문화재 보존과 복원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와 함께 '지금의 눈'으로 문화재 보존, 복원을 봐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이효우 대표는 1970년대부터 낙원표구사라는 이름으로 표구를 하고 있다.
▲ 환하게 웃고 있는 이효우 대표 이효우 대표는 1970년대부터 낙원표구사라는 이름으로 표구를 하고 있다.
ⓒ 이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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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국립박물관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복원하고 전시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함께 다른 국보법 책을 전시했었어요. 그 책을 보니 전시한다고 배접을 해서 깨끗하게 만들었더라고요. 하지만 신라시대, 고려시대에 찍은 목판본 책들이 헤어졌다고 해서, 너덜너덜한 것을 다 잘라버리고 새로 배접하는 것이 복원일까요? 하지만 그러면 당시의 배접 방식이 사라지고, 당연히 원형이 훼손되게 돼요. 지금처럼 하는 게 능사가 아니에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것이냐고 반문했을 때, 이효우 대표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훼손된 부분만 복원하는 것이라고 했다. 오래되어서 들쑥날쑥하다면 그 부분만 보강해서 보존해야 한다. 원형의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에 힘을 기울이면서, 문화재 보존, 복원을 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대표는 당연히 '어떻게 원형을 보존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효우 대표와의 만남은 전통문화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는 표구 작업이 없을 때에는 능화판 공책을 만든다. 다양한 문양을 조각한 목판으로 책의 표지를 장식하는 것을 능화판이라고 하는데, 화려하고 은은한 느낌을 그대로 담아 현대인들의 공책을 만들어서 인사동 거리에 온 사람들에게 우리 전통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그는 문화재를 전통문화 그대로 복원하는 방법을 찾아 공부하면서도, 전통과 현대의 모색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런 게 전통문화에 대한 참사랑이 아닐까.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장인'의 모습을 엿본 시간이었다.

덧붙이는 글 | (재)종로문화재단과 함께 무지개다리지원사업 문화지구사랑방 문.지방.의 일환으로 기획한 "장황의 기록, 손의 기억” 展을 준비하면서 취재한 인터뷰입니다. 행사 도록에 중복게재 됩니다.



태그:#장황, #표구, #낙원표구사, #이효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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