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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가 충청도로 시집을 간 지 20년도 훨씬 넘었다. 그 오랜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어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한 적 없이 잘 살았다. 그런데 최근 다니고 있는 회사가 너무 바빠서 도통 쉬는 날이 없다고 한다. 

어머니랑 통화하다가 김장을 도와달라고 했다는데 어머니는 시집간 지 20년이 넘도록 그런 얘기 한 번 한 적 없던 딸의 말이 신경이 쓰이셨는지 나에게 시간 내서 누나네에 가자고 조르셨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어머니와 나는 11월에만 벌써 두 번째 여행을 떠나게 됐다.

원래는 다른 일정이 있어서 아쉽지만 못간다고 말씀드렸는데 계속 마음 불편해 하시는 어머니를 보고 있자니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일정 조율을 하고 어머니와 충청도 누나네로 김장 여행을 갔다. 

누나가 회사에서 퇴근하는 시간은 오후 4시. 그 시간에 맞춰 수안보에서 만나기로 했고 간단하게 먹을거리를 사서 누나네에 도착하니 5시가 채 안된 시간이었다. 거실에 짐만 던져 놓고 어머니는 바로 누나네 마당에 있는 텃밭에서 배추를 따기 시작하셨다.

어머니가 배추를 따면 나는 그 배추를 마당에 있는 수돗가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 40포기의 배추를 따서 김치를 담그자고 했는데 밭에 남은 배추가 아까운 마음에 어머니는 계속 배추를 더 따셨고 결국 60포기 가까운 배추를 땄다.

큰 고무대야에 가득 찬 배추들

누나네 마당 텃밭에서 키운 김장용 배추들
▲ 김장배추 누나네 마당 텃밭에서 키운 김장용 배추들
ⓒ 강상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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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김장을 해주러 온 김에 우리 집 김장도 함께 해서 가지고 갈 계획이었다. 누나네는 20포기만 있으면 된다고 했는데 우리집 20포기까지 합쳐서 40포기를 할 생각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작업을 서두른 이유는 해가 지기 전에 얼른 배추 다듬어서 절여놓고 자야 내일 김치를 담글 수 있기 때문이다. 따온 배추를 어머니가 다듬으면 나는 소금물에 배추를 적셔 큰 통에 넣고 소금 뿌리는 작업을 도왔다.

누나는 그동안 저녁 식사준비를 했다. 나는 30년 넘게 살면서 어머니가 담궈주는 김치만 먹고 살았지 김치 담그는 데는 관심도 없었는데 이번에 의도치 않게 김치 담그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해가 지기 전부터 깜깜할 때까지 다듬어 절인 배추는 성인이 목욕을 해도 될만큼 큰 고무대야에 가득 찼다.

매형은 직장 때문에 다른 지역에 가 계신다. 그리고 누나네 두 아들들도 학교 다니랴 공부하랴 다 다른지역에 보내 두었다. 그렇게 이 깜깜한 시골마을에서 누나 혼자 지내고 있다. 누나는 자기가 수십 년을 살아온 동네기 때문에 너무 편하다고 하는데 어머니 마음은 이런 시골에서 혼자 지내고 있는 누나가 항상 안쓰럽게만 느껴지시는 모양이다.

집에 먹을 게 없다길래 김치전이나 구워서 막걸리나 한잔 하자고 했다. 마당에서 배추를 절이고 집으로 들어갔더니 김치전과 함께 한상 가득 저녁상이 차려져 있었다. 시원한 수안보 막걸리와 함께 오랫만에 누나네에 온 기분을 만끽했다.

저녁을 다 먹고 치우기 귀찮다고 하는 누나에게 설거지는 내가 해주겠노라며 팔을 걷어붙이고 주방으로 갔다. 그 사이 어머니와 누나는 내일 김치소에 들어갈 파를 다듬었다.

설거지를 마친 나는 오늘 하루종일 밀린 업무를 보기 위해 노트북을 켰다. 어머니와 매일 저녁 함께 보는 '막장 드라마'를 보면서 오랜만에 누나와 수다도 떨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즐거운 오늘은 목요일. 직장을 다니고 있을 때는 절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상의 행복이었다.

김장 김치에는 돼지수육과 막걸리, 환상의 조합

전날 절여둔 배추를 깨끗히 씻어 양념에 잘 버무리면 올해의 김장 김치가 완성된다
▲ 김장 전날 절여둔 배추를 깨끗히 씻어 양념에 잘 버무리면 올해의 김장 김치가 완성된다
ⓒ 강상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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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날 아침. 누나는 출근하고, 어머니와 나는 계속 김장을 해야 했다. 절인 배추를 이제 깨끗하게 씻어야 한다. 어머니가 1차로 배추를 물에 헹궈서 나에게 주면 내가 2차로 배추를 헹궈 냈다. 2번 헹군 배추 물기를 빼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먼지가 잘 안 털어져서 세 번을 헹구기로 했다. 배추 헹궈서 큰 바구니에 물이 빠지도록 쌓아두는 일을 했는데 허리가 아파왔다.

낮에 어머니와 함께 배추를 씻어 물기를 빼고 김치 양념을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저녁, 누나가 퇴근해 돌아왔다. 그리고는 본격적인 김치 공장이 차려졌다. 나는 옆에서 이것저것 물건 가져다 주는 보조 역할을 하면서 낮 동안 밀린 내 업무를 처리했다.

때깔 좋은 김치. 누나네 김치통과 우리 집 김치통이 가득 차고도 남아 커다란 봉지에 김치가 담겼다. 이 녀석들은 우리 집에 놔두고 온 김치통 속으로 들어갈 녀석들이었다.

김장 김치와 돼지 수육, 그리고 막걸리. 김장하는 날 즐길수 있는 최고의 만찬이다.
▲ 환상의 궁합 김장 김치와 돼지 수육, 그리고 막걸리. 김장하는 날 즐길수 있는 최고의 만찬이다.
ⓒ 강상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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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틀간의 김장행사가 끝나고 이틀째 저녁상엔 역시나 막걸리와 김장 김치, 그리고 돼지고기 수육이 올라왔다. 김치는 역시 담근 첫날이 가장 맛있다. 그리고 다음날 숨이 죽으면 맛이 없어진다.

맛이 없어진 그 김치는 이제 잘 익힌 뒤에 먹어야 하는 거다. 입에서 살살 녹는 돼지 수육과 갓 담근 김치의 만남. 그리고 전국 막걸리 중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수안보 막걸리. 그야말로 행복한 저녁이었다.

이번 2박 3일은 어디 다른 곳 구경할 새도 없이 누나네 집에서 김치만 담그고 내려왔다. 그래도 이만큼 의미있고 알찬 여행이 또 있을까 싶었다. 가족과 함께 하는 소소한 행복. 직장을 그만두고 홀로서기를 시작한 지 9개월차인 나는, 예전엔 상상할 수도 없었던 행복을 이렇게 하나둘씩 찾아가고 있다.


태그:#김장, #수육, #가족, #김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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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콘텐츠 대표 문화기획과 콘텐츠 제작을 주로 하고 있는 롯데자이언츠의 팬이자 히어로 영화 매니아, 자유로운 여행자입니다. <언제나 너일께> <보태준거 있어?> '힙합' 싱글앨범 발매 <오늘 창업했습니다> <나는 고졸사원이다> <갑상선암 투병일기> 저서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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