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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린 지난 14일 오후 서울 종로1가 종로구청입구 사거리에 설치된 경찰 차벽앞에서 69세 농민 백남기씨가 강한 수압으로 발사한 경찰 물대포를 맞은 뒤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시민들이 구조하려하자 경찰은 부상자와 구조하는 시민들을 향해서도 한동안 물대포를 조준발사했다.
▲ 직분사 물대포 맞은 농민, 생명 위독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린 지난 14일 오후 서울 종로1가 종로구청입구 사거리에 설치된 경찰 차벽앞에서 69세 농민 백남기씨가 강한 수압으로 발사한 경찰 물대포를 맞은 뒤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시민들이 구조하려하자 경찰은 부상자와 구조하는 시민들을 향해서도 한동안 물대포를 조준발사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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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에는 현 대통령 아버지(박정희 전 대통령)한테 옥고와 고문을 당하고, 노년엔 그 딸의 정권 아래서 폭력을 당했으니…. 가족들이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최강은(53)씨가 16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관련 기사 : 백남기씨 가족 "책임질 사람 나와 사과해야"). 최씨는 지난 14일, 민중총궐기 날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혼수 상태로 누워 있는 농민 백남기(69)씨의 27년 지기이자 후배이다. 백씨의 '한참 후배'라고 본인을 소개한 최씨는, 1988년부터 '우리밀 살리기' 등 농촌운동을 하며 백씨와 27년간 형제처럼 지내온 사이다. 그는 인터뷰 중간 박정희, 전두환 독재 정권 당시 백씨가 겪었던 '엄혹한' 젊은 시절을 전했다. 

그는 "1973년에는 유신 철폐 운동하다 수배돼 무기정학 처분 받았고, 1980년 5월 17일 5.18 계엄포고령 선포 전에 학교 기숙사에 있다가 연행됐다"면서 "1981년 3월 가석방으로 풀려난 뒤, 고향으로 내려와 30년 넘게 농촌·농민운동에 전념한 사람"이라고 백씨를 소개했다.

젊은 날 '유신 잔당 장례식' 치르기도

지난 2004년 6월 17일 자 <뉴스메이커> 578호 '긴조 9호세대 비화' 기사는 백씨를 '1970년대 중앙대 학생운동의 왕고참' 중 한 명으로 꼽았다. 법학과 68학번이었던 백씨는 '71동지회'의 일원이기도 하다. 1971년 10월, 서울 전역에 위수령이 발동되고 휴교령이 내려진 대학교 캠퍼스에 탱크를 앞세운 군인들이 진입했다. 당시 대학으로부터 제명 조치된 학생운동 핵심 인물 200여 명을 '71동지'라고 일컫는다.

이 기사에 따르면 백씨는 가칭 전국대학생연맹(전대련) 멤버로 활동했으나, 1975년 6월 전대련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사건으로 두 번째로 제적됐다. 백씨는 사건 종료 뒤 검거돼 투옥은 면했으나 수녀원·수도원과 인천 포도밭에서 노동하며 지내다가 1980년 복교 통지를 받았다.

복학한 백씨는 송기원·이석표·김기선·백상태·안정배·김영철·경영준·손원대 등의 복학생과 몇 차례 회합하며 학생운동 전략을 수립했다. 이른바 9인 위원회다. 이들은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학생회를 구성하는 데에도 나섰다. 백씨는 그해 중앙대 총학생회 부회장을 맡았다.

1980년 5월 14일 서울 지역 대학생들의 서울역 진출 당시 중앙대생들은 '유신 잔당 장례식'을 벌였다. '유신 잔당 장례'를 치르고 상여를 메고 행진하는 시위였다. 이때 상여 제작을 백씨가 맡았다. 그해 5월 17일 군부의 계엄 확대 조치 때, 흑석동 기숙사에 있던 백씨는 탱크를 앞세우고 교정에 들이닥친 군에 체포됐다. 이어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됐다. 그렇게 세 번째로 제적된 백씨는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고향인 전남 보성으로 내려가 농업에 전념했다.

"농촌 문제 하소연하러 왔다가 국가 폭력에 당해"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린 지난 14일 오후 서울 종로1가 종로구청입구 사거리에서 시위를 벌이던 69세 농민 백남기씨가 경찰이 쏜 강력한 수압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졌다. 경찰은 쓰러진 농민에게 한동안 계속 물대포를 쐈다. 입에서 피를 흘리는 이 농민은 시민들의 도움으로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 살인적인 물대포 맞은 농민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린 지난 14일 오후 서울 종로1가 종로구청입구 사거리에서 시위를 벌이던 69세 농민 백남기씨가 경찰이 쏜 강력한 수압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졌다. 경찰은 쓰러진 농민에게 한동안 계속 물대포를 쐈다. 입에서 피를 흘리는 이 농민은 시민들의 도움으로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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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씨는 농사를 짓는 한편 가톨릭농민회 전국 부회장, 우리밀살리기 전국회장, 보성군 농민회 감사 등을 지내며 농촌운동에 열을 올렸다. 그는 현재 광주대교구 가톨릭농민회 회원으로 쌀, 밀, 콩 농사를 짓고 있다. 후배 최강은씨는 "(최근까지도) 20년 전부터 솔선수범해 온 우리밀살리기 운동을 계속 이어오고 있었다"고 전했다. 최씨는 평소 백남기씨가 자주했다는 말도 함께 전했다.  

"'농민이 편하게 농사지으면서 살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고 계속 말씀했다."

종일 백씨의 가족과 함께 중환자실 가족 대기실에서 환자의 상태 변화를 지켜보고 있는 최씨는 현 상황을 "청천벽력 같은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목소리를 높이며 "'농촌이 어렵다, 농산물 제값 좀 받게 해달라'고 하소연하러 온 건데 갑자기 국가 폭력에 당했다"고 한탄했다.

현재 백씨는 15일 오전 4시께 수술을 마쳤지만, 뇌출혈과 뇌부종이 심해 지금까지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 편집ㅣ곽우신 기자



태그:#백남기, #경찰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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