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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에 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수원의 문화유적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중에서도 수원화성을 집중적으로 답사를 하면서 수원화성을 깊이 있게 알 수 있었다. 또한 수원화성을 축성하던 시기의 역사적 배경을 알면 알수록 더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문화유적이란 답사를 통해 알아가든 책을 통해 알아가든 언제나 가슴 설레이고 즐거움에 기대가 된다. 깊어가는 가을 날 정조대왕의 능행차 길에 있던 만안교(萬安橋)를 찾아가 봤다.

정조대왕은 1789년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楊洲)에서 화산(華山)으로 이장한 후, 매년 능을 참배하며 부친의 원혼을 위로하였다 한다. 당초의 참배행렬은 궁궐을 떠나 노량진, 과천, 수원을 경유하게 되어 있었으나, 그 노변에 사도세자의 처벌에 적극 참여한 김상로의 형(兄) 약로(若魯)의 묘가 있으므로 불길하다하여 시흥 쪽으로 행로를 바꾸면서 안양천을 경유하게 되었다. 정조가 만안교를 지난 것은 7번째 능행부터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8호 만안교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8호 만안교
ⓒ 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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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리는 처음에는 나무로 다리를 놓아 왕의 행렬이 지날 수 있도록 하였으나 1795년(정조 19)에 당시 경기관찰사 서유방이 왕명을 받들어 음력 7월에 건설을 시작해 3개월의 공사 끝에 7개의 수문을 설치하고 그 위에 화강암 판석과 장대석(長臺石)을 깔아 축조하였다. 축조양식이 정교하여 조선후기 대표적인 홍예석교로 평가받고 있다.

만안교를 처음 본 순간, 다리 위에 누각이 없을 뿐 수원화성의 화홍문과 너무도 똑같아 깜짝 놀랐다. 7간 수문 홍예가 똑같은 구조와 형태로 되어있고, 홍예 아래쪽에 밖으로 뾰족하게 튀어나온 물가름 돌도 똑같다. 물가름 돌이란 선단석의 일종으로 물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고, 물과 다리의 마찰을 최소화 해 홍수 때 다리가 받는 물의 압력을 줄이기 위한 시설로, 화홍문과 남수문 홍예에도 설치된 것이다.

홍예석교 아래 물가름 돌이 설치되었다
 홍예석교 아래 물가름 돌이 설치되었다
ⓒ 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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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홍문과 만안교가 쌍둥이처럼 닮은 것은, 수원화성 화홍문이 1794년 2월 28일에 터를 닦기 시작해 1795년 1월 13일에 완공했고, 만안교가 1795년 7월에 시작해 3개월 만에 완공한 것으로부터 유추할 수 있다. 기록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먼저 건설한 화홍문의 설계도와 다듬어진 석재를 가지고 만안교를 건설했다고 볼 수 있다.

정조19년(1795) 을묘 10월 4일 기록을 보면, '석교의 홍예수문(虹霓水門)은 5칸으로, 길이가 100자이고 너비가 22자이고 높이가 15자이며, 좌우 선창(船艙)의 석축(石築)은 총 160자이다.'

만안교 앞에 있는 만안교비에는 '교량은 길이 15장(丈, 1장은 10자)에 폭은 4장이며, 높이는 3장이고 수문(비문에는 5개이나 실제로는 7개)은 5개이다.'

문화재청 기록에는, '다리의 규모는 원래 길이 15장(약 30m), 폭 4장(약 8m), 높이 3장(약 6m)이고 홍예수문(虹霓水門)이 5개라 하였는데, 현재는 홍예가 7개인 것으로 보아 시공 당시에 변경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안양시청 홈페이지 안양4경 삼막천 만안교에는, '길이 31.2m, 너비 8m에 7개의 갑문을 설치하고 그 위에 화강암 판석과 장대석(長臺石)을 깔아 축조하였다.'

만안교 홍예석교 위
 만안교 홍예석교 위
ⓒ 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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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기록마다 조금씩 다른데 길이의 단위인 자, 장을 미터로 환산하면서 오류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이는 수원화성의 길이와 각 건축물의 제원에서도 명백히 드러나는 오류이므로 일관된 기준이 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만안교 답사 때 다리의 폭을 실측해 봤는데 정확히 782cm 였다. 만안교는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옮겨서 복원한 것인데 그래서 오차가 생긴 것일까?

안양시 기록에는, 원래 위치는 남쪽 200m 지점의 안양천에 있었으나 국도확장사업으로 1980년 8월에 이곳 만안구 석수2동의 삼막천으로 이전하였다고 되어있는데, 만안교에 있는 안내간판에는 '원래는 남쪽으로 약 460m 떨어진 석수로의 교차지점에 있었는데, 1980년 국도 확장 때 이곳으로 옮겨 복원하였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지? 안양시청 문화관광과 담당자에게 문의하니 직선거리로 보면 200m, 실제 거리로 보면 460m가 맞다고 한다.

만안교비, 만안교 글씨는 수원화성 화홍문을 쓴 유한지 글씨
 만안교비, 만안교 글씨는 수원화성 화홍문을 쓴 유한지 글씨
ⓒ 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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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안교 다리 앞에는 만안교비가 있다. 앞면의 만안교 글씨는 수원화성의 화홍문 편액을 쓴 유한지가 멋스러운 예서체로 썼고, 비석 뒷면은 서유방이 글을 짓고 조윤형이 쓴 만안교비에 다리의 연혁이 자세히 나와있다.

'남충현(과천현) 관아 남쪽 20리에 안양천이 있는데 바로 화성으로 가는 행차길이다. 우리 성상(정조대왕)께서 해마다 원침(사도세자가 묻힌 융릉)을 성묘 할 때면 이 하천을 건너게 된다. 올 봄에도 어머니를 모시고 이 내를 건넘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대체로 행차 길에는 하천과 다리가 있기 마련인데, 이들 다리는 나무로 놓였다가 왕의 행차 후 바로 철거 하였다. 따라서 얼음이 풀릴 때와 장마기 질 때에 물을 건너는 사람들이 고생을 하였다... 이에 돌다리로 준공하였다.'

만안교(萬安橋)의 만안이란 만민의 평안을 기원한다는 뜻이며, 정조대왕의 애민정신이 깃든 유적으로 소중하게 보호해야 한다. 지지대고개에서 융건릉까지 정조대왕 행차로에 제대로 된 유적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만안교는 더욱 각별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e수원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만안교, #만안교비, #홍예석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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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을 가슴에 안고 살면서 고전과 서예에 취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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