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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비시 중공업과 소송을 벌이고 있는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9~11일 자신들이 강제징용에 시달렸던 일본 나고야를 찾아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다. <오마이뉴스>가 한국 언론 중 유일하게 할머니들의 일본 일정을 동행취재했다. [편집자말]
미쓰비시 중공업과 소송을 벌이고 있는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10일 오전 자신들이 강제징용에 시달렸던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 터 인근의 '도난카이 지진 피해자 추도 기념비'를 찾았다. 양금덕 할머니가 추도비 앞에 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추도비 앞 눈물 미쓰비시 중공업과 소송을 벌이고 있는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10일 오전 자신들이 강제징용에 시달렸던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 터 인근의 '도난카이 지진 피해자 추도 기념비'를 찾았다. 양금덕 할머니가 추도비 앞에 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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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야의 눈물-상]에서 이어집니다(바로가기).

최근 MBC <무한도전>에 일본의 하시마섬이 소개된 바 있다. 지난 7월 '메이지(明治) 시대 산업시설물'이란 이유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하시마섬은 그 미명과는 반대로 악질적인 조선인 강제징용 시설이었다. 특히 하시마섬과 함께 소개된 '다카시마섬 조선인 강제징용 공양비'는 처참한 보존 상태 때문에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지난 10일 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인 양금덕(86)·이동연(85)·김성주(85) 할머니와 김중곤(91, 피해자 오빠·남편) 할아버지가 찾은 '도난카이 지진 피해자 추도 기념비'는 다카시마섬 공양비에 비하면 나름 잘 보존돼 있었다. 하지만 이 비석에도 가슴 아픈 사연과 이를 지키는 과정의 풍파가 고스라니 담겨 있다.

할머니들이 강제 노역에 시달리던 1944년 12월 7일 발생한 도난카이 지진(東南海地震)은 리히터 규모 8.0의 대지진으로, 이 때문에 1000명 이상의 사람이 죽거나 실종됐다.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도 이 지진을 비켜갈 수 없었는데, 전남에서 끌려 간 근로정신대 소녀 6명(이정숙, 김향남, 김순례, 서복영, 최정례, 오길예)이 이 지진으로 목숨을 잃었다. 10일 추모비를 찾은 김중곤 할아버지의 동생 고 김순례(1930년생)도 15세의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다. 양금덕, 김성주, 이동연 할머니는 겨우 목숨을 구했다.

김성주, 양금덕, 이동연 할머니(왼쪽부터)가 추도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 눈물이 나네 김성주, 양금덕, 이동연 할머니(왼쪽부터)가 추도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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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먹고 막 일을 시작한디, 흔들흔들 하더라고. 일본 사람들이 '어디로 들어가라' 했는디, 한국 사람들이 지진이 뭔지 알간? 그래서 '적기가 공습을 시작했는갑다' 생각했제. 그 순간 건물이 무너져 내리더라고. 어디로 내빼지도 못하고, 기둥하나 못 잡은 채 그대로 깔려브렀어. 다행히 나는 뭔 다이(받침·선반 등의 일본어) 밑에 들어가 즉사는 안 했어. 정신을 차려본께 뭔 째깐한 구녕으로 빛이 들어오드라고? 열손가락 다 피가 나도록 파고 나와 세 시간 만에 살아나왔어. 갈비뼈랑 다 부러져브렀제." - 양금덕 할머니

"하이고, 지진 난리통에 넘어졌는디 누가 귀를 밟아브렀어. 그때부터 여태까지 귀가 잘 안 들려. 한국이고, 일본이고 고마운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고맙다는 전화 한 통화를 못하니..." - 김성주 할머니

70년 만에 만난 친구 이름... "옴메, 눈물이"

도난카이 지진으로 숨진 고 김순례의 오빠 김중곤 할아버지가 추도비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기도하고 있다.
▲ 추도비 앞 무릎꿇고 기도 도난카이 지진으로 숨진 고 김순례의 오빠 김중곤 할아버지가 추도비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기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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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70년 전 강제징용에 시달렸던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 터. 지금은 다른 건물과 골프연습장, 공사 현장 등으로 채워져 있다.
▲ 세월이 흘러... 공사 중인 강제징용 현장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70년 전 강제징용에 시달렸던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 터. 지금은 다른 건물과 골프연습장, 공사 현장 등으로 채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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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1985년, 당시 고등학교 세계사 교사이던 다카하시 마코토(高橋信, 현 나고야 미츠비시·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지원회 공동대표)씨는 미쓰비시중공업이 연합군에 의한 일본인 희생자 순직비를 건립하면서, 조선인 근로정신대 지진 희생자를 외면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카하시씨를 비롯한 교사들과 시민들은 이때 '도난카이 지진 구 미쓰비시 도토구공장 희생자 조사 추도 실행위원회'를 만들어 1988년 지진 발생 날짜에 맞춰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 터(1988년 당시 니시보노세키(日淸紡績, 방적회사) 부지)에 추도비를 세웠다.

이들은 추도비 제막식 때 근로정신대 피해자와 유가족들을 참석시키려고 연고도 없는 한국을 수차례 찾아 수소문 끝에 몇몇 피해자와 유가족들을 만났다. 제막식 참석을 위한 피해자·유가족의 항공료와 체재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에선 근로정신대를 위안부로 오해해 "몸 팔고 온 여자"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많았던 터라, 피해자와 유가족 입장에선 이 일본인들이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이후 20년 넘게 한 자리를 지켜온 추도비에 위기가 찾아왔다. 2012년 니시보노세키 부지가 제 3자에게 팔리면서 비석을 철거해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다카하시씨가 만들어 지금껏 공동대표로 있는 '나고야 미쓰비시·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지원회'는 급히 추도비 이전 계획을 세웠다. 일단 니시보노세키에 "이전 계획이 마무리될 때까지 추도비 보전을 요청"했고, 이를 니시보노세키가 받아들였다. 소송지원회의 뜻에 공감한 니시보노세키 측은 이후 이전 부지의 조성비를 기탁하기도 했다.

이전 부지는 제작소 터 바로 옆의 메이난후레아이(名南ふれあい) 병원으로 정해졌다. 1959년 50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태풍 '베라' 당시, 빈곤층·노인·공장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해 만들어진 이 병원은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의 사정을 듣고 주차장 한 켠을 이전 부지로 내놨다. 덕분에 2012년 11월 3일 양금덕 할머니와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아래 시민모임)', 나고야 시민 등 1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추도비 이전 제막식이 열릴 수 있었다.

다카하시 마코토 '나고야 미츠비시·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지원회' 공동대표가 미쓰비시중공업이 만든 순직비 앞에서 명부를 든 채 설명하고 있다. 다카하시 대표는 1985년 미쓰비시중공업이 연합군에 의한 일본인 희생자 순직비를 건립하면서, 조선인 근로정신대 지진 희생자를 외면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돼 도난카이 지진 피해자 추도비를 만들게 됐다.
▲ 이런 일본인도... 다카하시 마코토 '나고야 미츠비시·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지원회' 공동대표가 미쓰비시중공업이 만든 순직비 앞에서 명부를 든 채 설명하고 있다. 다카하시 대표는 1985년 미쓰비시중공업이 연합군에 의한 일본인 희생자 순직비를 건립하면서, 조선인 근로정신대 지진 희생자를 외면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돼 도난카이 지진 피해자 추도비를 만들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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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막식 당시 시민모임은 "회한과 격분의 현장에서 오늘 우리가 가야할 길을 다시 묻는다"라고 적은 조그마한 비석을 추도비 옆에 나란히 세웠다. 메이난후레아이 병원 관계자는 "일본 초중고등학교에선 한반도 식민지와 관련된 역사를 잘 가르치지 않는다"며 "젊은 예비 간호사들이 이 병원에 와 연수를 받는데 이 추도비는 슬픈 역사를 배우고 다신 전쟁을 일으켜선 안 된다는 교훈을 가르치는 좋은 교육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10일 할머니들과 나란히 서 추도비를 바라봤다. 문득 '만약 일본의 양심적 시민들과 한국의 시민모임이 없었다면 이 추도비는 다카시마섬 공양탑처럼 처참한 모습을 하고 있거나,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추도비 앞에 선 이동연 할머니는 추도비에 새겨진 "동네 친구" 고 최정례(도난카이 지진 당시 사망)의 이름을 어루만지며 "아이고, 내 친구 최정례 이름이 여기있네. 둘이 와갖고 너만 죽어브렀냐"라며 눈물을 훔쳤다.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 할머니는 "내가 웬만하면 안 운디, 친구보고 온께, 옴메, 눈물이 다 나네"라며 멋쩍게 웃었다.

2012년 추도비가 메이난후레아이병원으로 옮겨질 당시, 추도비 옆에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 세운 작은 비석.
▲ 회한과 격분의 현장, 우리가 가야할 길 묻는다 2012년 추도비가 메이난후레아이병원으로 옮겨질 당시, 추도비 옆에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 세운 작은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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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주, 이동연, 양금덕 할머니가 추도비에 적힌 도난카이 지진 조선인 피해자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다.
▲ 한 마음으로 가리키는 추도비 김성주, 이동연, 양금덕 할머니가 추도비에 적힌 도난카이 지진 조선인 피해자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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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 중에 사망... 피해자의 응어리진 삶

추도비 앞에 선 이국언 시민모임 대표는 "당시 가난하고 힘이 없어 나고야에 끌려왔다가 외롭게 죽은 조상들의 영혼을 광복 70년이 지나도록 이역만리에 모신다는 게 참 안타깝다"라며 "이 분들의 한을 풀기에는 남은 과제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이 대표의 말처럼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을 비롯해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놓인 상황은 좋지 않다.

양금덕 할머니를 비롯한 근로정신대 피해자·유가족 8명은 1999년 일본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나고야 지방재판소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10여 년 법정다툼 끝에 2008년 도쿄 최고재판소(한국으로 치면 대법원)에서 최종 기각돼 패소했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때 모든 배상이 끝났다"는 이유에서다. 이 소송이 끝난 뒤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원고 중 한 명인 김혜옥 할머니가 사망했다(2009년 7월).

같은 해 12월엔 일본 정부가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에게 후생연금 탈퇴 수당으로 99엔(약 1000원)을 지급해 파문을 일으켰다. 덩달아 2015년에는 199엔을 지급하다고 밝혀 할머니들의 분노를 샀다.

이동연 할머니가 추도비에 적힌 친구 고 최정례의 이름을 매만지고 있다. 영정 사진은 2009년 사망한 고 김혜옥 할머니.
▲ 친구야, 나 왔다 이동연 할머니가 추도비에 적힌 친구 고 최정례의 이름을 매만지고 있다. 영정 사진은 2009년 사망한 고 김혜옥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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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번에 나고야를 찾은 양금덕, 이동연, 김성주 할머니와 김중곤 할아버지 그리고 광주에 있는 다른 근로정신대 피해자 박해옥(85) 할머니는 2012년 광주지방법원에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2013년 1심에서 승소한 할머니들은 올해 6월 2심에서도 승소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또다른 피해자들도 잇따라 소송장을 냈다(2014년 2월 양영수·김재림·심선애·오철석, 2015년 5월 이경자·김영옥).

하지만 미쓰비시중공업은 연일 시간끌기 작전을 펴고 있다. 2심에서 패소한 미쓰비시중공업은 대법원에 상고했고, 다른 재판의 경우 소장의 사소한 오류를 문제 삼아 소장을 연달아 반려했다. 원고 4명(양영수·김재림·심선애·오철석)이 2014년 2월 제기한 소송은 아직 공판 한 번 열지 못한 채 멈춰 있다.

한국 정부의 소극적, 아니 피해자들의 기대를 져버리는 대처도 할머니들의 속을 들끓게 만들었다. 특히 올해 199엔 지급 사건과 미국·중국 피해자에게만 사과하는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의 태도를 두고 한국 정부는 이해할 수 없는 태도를 보였다. "정부가 당사자가 아닌 개인과 기업의 소송이다", "소송이 진행 중인 사안과 관련해서 정부 입장을 표명하는 것을 자제하겠다"라고 발표한 정부는 "일본 정부와 기업을 대변하는 한국 정부"라는 조롱을 사기도 했다.

정영대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운영위원이 추도비에 헌화한 뒤, 절을 올리고 있다.
▲ 추도비 앞에 엎드려 절 정영대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운영위원이 추도비에 헌화한 뒤, 절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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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강제징용 현장 인근에서 미쓰비시중공업 공장은 잘 돌아가고 있다.
▲ 전범기업은 건재하고... 여전히 강제징용 현장 인근에서 미쓰비시중공업 공장은 잘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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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비단 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들만 겪고 있는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 대부분이 겪고 있는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들은 점점 세상을 떠나고 있다. 강제징용 피해자 고 여운택씨는 생전인 2005년 일본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 1·2심 모두 승소했으나 대법원 판결을 보지 못한 채 2013년 12월 숨진 바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강제징용 등 국외로 동원된 피해자는 약 103만명으로 추정된다. 이 중 현재 살아 있는 약 2만5000명 뿐이다. 



"근로정신대 할머니 생존 동안 기록 남겨야"
이번 할머니들의 나고야 일정(9~11일)에 동행한 우승희 전라남도의원(새정치민주연합·영암1)은 14일 제299회 임시회 1차 본회의 5분 발언에서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생존해 계실 때 생생한 목소리를 기억하고 역사에 남기는 기록사업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 의원은 "광주·전남지역의 일제 강제동원 현장은 광주 화정동 일제 지하동굴, 해남 옥매광산, 화순 탄광, 목포 유달산 방공호, 고하도 동굴, 여수 해군수상비행장, 마래터널 등 300곳이 넘는다"라며 "실태조사를 통해 세심한 생활지원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 근로정신대 실태조사 및 기록사업 ▲ 국내 강제동원 현장답사 프로그램 ▲ 청소년·역사교사 대상 일본 강제동원 현장 방문 ▲ 근로정신대 등 역사 교육을 위한 부교재 제작과 활용사업 등을 전라남도와 전라남도교육청에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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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에만 사과, 한국은 아베와 한편?
일본 국회의원도 고개 숙였는데...

○ 편집ㅣ최은경 기자



태그:#근로정신대, #일본, #나고야, #강제징용, #미쓰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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