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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봉섭 테마개발과장이 양기대 시장과 광명동굴을 둘러보면서 개발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랜턴을 들고 있는 사람이 최봉섭 과장
 최봉섭 테마개발과장이 양기대 시장과 광명동굴을 둘러보면서 개발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랜턴을 들고 있는 사람이 최봉섭 과장
ⓒ 윤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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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해 공원녹지과장이 폐광 개발의 기초를 닦았다면 최봉섭 테마개발과장은 폐광 개발을 본격적으로 추진해 광명동굴이 수도권 최고의 동굴테마파크로 성장하게 한 주역이다.

그가 테마개발과장으로 발령이 난 것은 2012년 9월 21일. 2011년 8월 22일, 폐광을 '가학광산 동굴'이라는 이름을 붙여 일반에 공개하기 시작한 지 1년 남짓이 지났을 때였다.

양기대 광명시장의 목표는 분명했다. 폐광을 대한민국 최고의 동굴테마파크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는 폐광 개발이 성공한다면 일자리 창출, 지역경제 활성화 등은 덤으로 따라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려면 폐광 개발을 전담하는 부서가 필요했다. 양 시장은 조직개편을 통해 폐광 개발을 전담하는 테마개발과를 신설하고, 최봉섭을 부서장으로 발탁했다. 양 시장은 폐광 개발을 믿고 맡길 사람이 필요했고, 최 과장은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적임자였다. 양 시장은 지금도 그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 과장은 어땠을까? 그는 테마개발과장 발령을 '숙명'이라고 여겼다. 광명동굴 개발이 성공하면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을까? 그건 아니다.

최 과장과 페광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이었다. 그는 광명시청에서 최초로 폐광 탐험에 나선 공무원으로, 시흥광산으로 불리던 폐광의 이름을 가학광산으로 바꾼 장본인이기도 하다. 또한 폐광 개발 계획을 가장 먼저 입안하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테마개발과장으로 발탁되었으니, 그와 폐광은 보통 인연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와 폐광의 인연은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정책개발과 직무대리였던 최 과장은 백재현 시장에게 폐광 시흥광산의 개발 가능성을 확인하고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그 때까지만 해도 폐광은 '미지의 세계'였다. 개발 가능성이 있다는 소문은 무성했으나, 정작 내부가 어떤 모습인지 아는 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최봉섭 과장
 최봉섭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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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과장은 팀원들과 밧줄과 장갑, 플래시 등을 준비해 폐광이 있는 가학산으로 갔다. 그가 가장 먼저 폐광 진입을 시도한 곳은 지금의 '동굴 전망대'였다. 지금은 당시의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그때만 해도 그곳은 수풀이 우거져 있었다. 그곳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그곳을 통해 폐광 안으로 들어갈 작정이었다.

그는 엄청나게 큰 구멍 안을 들여다보았다. 구멍 안은 어둠에 잠겨 도무지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가 가장 먼저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나섰다. 직원들이 있었지만, 명색이 팀장이 아닌가. 무섭기는 그나 직원이나 마찬가지였으나, 그렇다고 직원을 들여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최 과장은 밧줄을 나무에 묶고 다른 한끝을 허리에 묶었다. 장갑을 끼고 플래시를 들었다. 심호흡을 했다. 무서웠다. 하지만 설마, 죽기야 하려고. 그런 심정이었다.

밧줄을 잡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더니 내부가 좁아졌다. 높이가 1미터 남짓한 공간이 이어졌다. 설 수 없어 엎드려 기었다. 어느 정도 들어갔을까? 허리를 펼 수 있을 정도로 공간이 넓어졌다.

폐광 안은 플래시 불빛이 퍼지지 못할 정도로 어둠이 깊었다. 사나운 짐승이나 뱀 등이 있을 것 같아 조심했지만 생명체의 존재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제야 그는 안도했다. 동굴 안에 위험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팀원들을 동굴 안으로 불러들였다.

개발 전의 광명동굴.
 개발 전의 광명동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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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도착한 곳이 바로 현재의 '동굴 예술의 전당' 자리였다. 폐광에서 가장 넓은 동공이 그곳이었다. 지하로 통하는 바닥은 물에 잠겨 있었다. 폐광 내부를 찬찬히 둘러본 그는 폐광이 개발 가치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사히 동굴을 빠져나온 최 과장은 가장 먼저 '갱내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동굴 내부를 자세히 알아야 개발 계획을 세울 수 있을 테니까.

당시 시흥광산은 남은 자료가 거의 없었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부터 1945년까지 자료는 광산을 운영했던 일본인들이 가져갔다. 1955년부터 1972년까지 폐광될 때까지 자료는 1972년, 대홍수가 나면서 쓸려갔다. 그나마 남아 있던 자료는 광산사무소와 창고 건물 등에 화재가 나면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폐광 실소유자인 김기원씨 역시 광산 자료를 갖고 있지 않았다.

최 과장은 수소문을 한 끝에 광업진흥공사에 갱내도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렇게 해서 갱내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광명동굴 안에 근대역사관이 있잖아요. 거기에 0레벨부터 지하 7레벨까지 그려진 갱내도 모형이 있어요. 광산 역사를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놓은 거거든요. 그게 그려진 갱내도를 우리가 어렵게 입수한 거예요. 갱내도를 보고 광산은 레벨로 표시한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30미터를 내려가면 1레벨이 되고 또 30미터를 내려가면 2레벨이 된다는 것도 알았죠."

그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갱내도를 통해 폐광이 갱도가 7.8km, 깊이가 275m이며 전부 8개의 수평갱과 2개의 사갱으로 이뤄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최 과장은 갱내도를 토대로 시흥광산 개발계획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최 과장은 그때까지 시흥광산으로 불리던 폐광 이름을 가학광산으로 바꿨다.

시흥광산을 개발한다면 광명시를 상징하는 이름이어야하는데 시흥광산이라는 이름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폐광 개발계획이 담긴 정책보고서를 작성할 때 시흥광산 대신 가학광산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가학산에 있는 폐광이라는 의미였다. 그때부터 폐광은 가학광산이 되었다. 그런 그에게서 광명시청 공무원의 자존심을 엿볼 수 있다.

최 과장은 가학광산 개발 계획이 담긴 정책보고서를 작성했다. 그것을 바탕으로 가학산 개발계획이 세워졌다. 가학산 일대를 대규모 테마파크로 개발해 워터파크, 실내스키장, 동굴보트 운행 등을 조성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실행 가능성이 낮았다. 예산이 530억 원 이상이 드는 대규모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다. 결국 가학광산 개발은 흐지부지 될 수밖에 없었다.

최봉섭 과장과 양기대 시장
 최봉섭 과장과 양기대 시장
ⓒ 윤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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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광 개발에 다시 불을 지핀 사람이 양기대 시장이다. 그가 폐광 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청사진만 요란한 대규모 개발계획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 시장은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는 개발은 첫 삽을 뜨기 전에 무산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예산 확보가 쉽지 않을 뿐더러 성공 가능성 역시 담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생각한 것이 서두르지 않고 계단을 밟아 올라가듯 하나씩 개발을 한다는 것이었다. 양 시장의 계획은 적중했고 폐광 개발은 기적을 만들어내면서 성공했다.

2011년 1월 26일, 가학광산 매매계약이 체결되면서 폐광 소유권이 광명시로 넘어올 때만 해도 최 과장은 폐광 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담당 부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최 과장은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와 폐광의 인연을 생각하면 당연했다. 양 시장은 이런 최 과장을 주목하고 있었다. 폐광 개발을 전담하는 부서를 신설한다면 부서장은 '당연히 최봉섭이어야 한다'는 것이 양 시장의 생각이었다.

"발령을 받고나서 광명동굴이 나의 숙명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1999년에 처음 동굴에 들어갔고, 정책보고서를 작성했던 인연이 테마개발과장 발령으로 이어졌으니까요. 발령을 받고 내가 진짜 노가다판으로 가는구나, 하면서 마음을 다졌죠. 지금까지 기획만 했지 현장근무는 해본 적이 없거든요."

최봉섭 테마개발과장 ②로 이어집니다.


태그:#광명동굴, #최봉섭, #양기대, #폐광, #가학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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