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손안의 작은 액정만 들여다보면 모든 세상을 음미할 수 있는 시대가 오기 이전에, 세상은 4절의 회색 갱지 안에 담겨있었다. 회색 갱지 안의 세상은 다 스며들지 않은 활자체의 검은 테두리처럼 거칠게 날뛰고 있었고, 세상은 불규칙을 용인하지 못했다.

교열과 교정의 시대가 도래했었고, 그 시대는 유난히 난폭했다. 불규칙을 줄 세우려는 강제의 시대가 지나는 데는 4절의 회색 갱지가 노란색을 띠는 종이로 변하면서 일어났다. 무겁고 위협적인 검은색 잉크가 장식하던 신문의 면들은 콩기름 잉크로 대체되며 교열과 교정 그리고 기계 냄새나는 시대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었다.

콩기름으로 만들어진 지면은 단순히 정치적 난폭함을 이야기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기계화된 사회의 톱니에 자연의 씨앗을 내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기계 냄새가 사라진 자리를 메우던 콩기름의 냄새를 사람들은 친환경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제 기계가 휩쓸고 간 모든 상처는 친환경이라는 이름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사실 세상의 이슈는 언제나 변해왔다. 성장 위주의 탐욕스러운 경제발전이 모든 것의 정답인 시대가 있었고, 웰빙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걸 건강과 연관 짓는 지극히 개인적인 붐도 있었다. 전 국가적인 사업으로의 토목도 있었고, 그것을 비판하며 작은 마을부터 발전시키려는 시도도 있었다. '유행은 시대를 화석으로부터 구원한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시대는 화석이 되지 않기 위해 수많은 유행을 견디며 발전을 거듭했다.

따지고 보면 유행의 목적은 같은데 얼굴만 바뀐 듯하다. 그 목적은 바로 인간을 위함이다. 인간을 위함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고 안전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속에는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환경 안에서'의 의미가 언제나 내재하여 있다.

이를 친환경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환경보호라고 말하기도 하며, 그린이나 블루의 색채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런 사회적 이슈는 환경파괴에 대한 우려와 함께, 1997년 채택된 '교토의정서'를 통해 알려지고 명문화되면서 시작되었다. 이제 세계의 방향은 녹색을 중심으로 한 성장을 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리싸이클이 있다.

리싸이클, 그린 디자인의 시작

리사이클(RECYCLE)은 단순한 재활용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리싸이클은 죽어가는 생명에 대한 부활을 뜻한다. 죽어가는 생명은 물질에만 한정짓는 것이 아니다. 물질을 살림으로써 인간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환경 생태계의 올바른 순환을 이야기한다. 이런 생태계의 변화는 그전의 교열과 교정의 시대가 그랬던 것처럼 권위적이지 않다. 모두의 동의를 기반으로 한 평화적인 이슈의 교체였다.

리싸이클은 그래서 모두에게 평등하고 공평하다. 자본의 홍수 속에서 소비 만을 위한 디자인이 아닌 살리기 위한 무언가를 디자인하는 점은 그동안의 기계 냄새조차 향기롭게 한다. 그래서 이슈는 자발적이다. 자발적이기에 역동적이고 젊다. 재미있는 아이디어와 참신한 생각, 그렇기에 환경개선을 통한 인류의 삶의 질 진화에 대한 가능성은 이제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리싸이클은 그린 디자인의 시작이 되었다.

최근에는 그린 디자인(GREEN DESIGN)과 공공 디자인(PUBLIC DESIGN)이 결합한 '그린 공공 디자인'이 등장했다. 과연 그린 디자인과 공공 디자인은 한 단어 안에서 공존할 수 있는가. 그린 디자인은 1992년 경제발전과 개발에 있어, 환경을 고려해야 한다는 리우선언의 이념을 중심으로 디자인계 전반에 나타났다.

이 새로운 디자인 사조는 친환경 생태에 대한 이슈를 디자인에 접목하며, 기존과 다른 디자인 패러다임을 창출했다. 이후 그린 디자인은 친환경, 생태 등의 결과물 중심의 디자인 영역에서 재활용, 제품의 생산과 유통, 폐기로 이어지는 관리 영역까지도 범위를 확장했다. 현재는 모든 디자인 공모나 사업영역에 친환경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면서 그린 디자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그 개념은 꾸준히 디자인계 전반에 활용되고 있다. 또한 그린 디자인은 디자인의 영역을 넘어 그린 이코노미라는 경제적 패러다임으로도 발전하였다.

공공 디자인은 2002년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디자인이 있는 거리전'을 시작으로 최근의 공공 디자인 엑스포까지 다양한 공공시설 디자인을 중심으로 범위를 확장해왔다. 공공 디자인은 사적 디자인과 공적 디자인의 중간 영역으로 다양한 대중이 사용하는 디자인 영역을 통칭한다. 다양한 대중이 사용하다 보니, 보편성·편의성·소수자를 위한 배려 등이 타  디자인 영역보다 강조된다.

이에 대한 적정한 대응을 위해 서울시에서는 '서울시 공공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도시개발 계획에 적용했고, 현재도 심의를 통한 디자인 심사를 진행 중이다. 이후 각 지자체에서도 가이드라인을 자체 제작·시행 중에 있다. 공공 디자인의 범위는 대중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모든 디자인 영역으로, 도시계획부터 홍보물까지 그 영역과 범위가 폭넓다. 그러나 정부 중심의 공공 디자인 육성은 공공 디자인을 시설물 디자인과 공간 디자인 위주의 하드웨어적 디자인으로 국한시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린 디자인과 공공 디자인은 그 사조와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린이라는 친환경성이 공공성과 융합하게 될 경우, 이를 그린 공공 디자인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에도 이와 같은 그린 공공 디자인사업은 많이 시행되고 있다. 공공 디자인 사업이 시작되면서부터 공공성에는 친환경이라는 개념이 필수요소였기 때문에 공공 디자인에서의 친환경성은 언제나 적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에 대한 예로 서울시는 공공 시설물 제안공모 시, 공공시설물에 녹화와 식재를 적용할 경우, 심의 통과 확률과 사업시행확률이 타 디자인보다 높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재활용소재 등 소재의 변화도 그린 공공 디자인에서의 중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개발된 현수막을 재활용한 에코백의 경우 공공 디자인과 그린 디자인의 중간에 있는 '그린 공공 디자인'의 예라 할 수 있겠다.

위의 내용을 종합해볼 때, 그린 공공 디자인은 '친환경 요소를 적용한 공공성이 있는 디자인'으로 정의할 수 있으며, 그 범위는 공공을 위해 제작된 결과물에 대한 제조 유통과정에서부터 공공시설물에 친환경 요소 적용(컬러계획, 소재선택, 식재결합)까지로 볼 수 있다. 조금 더 넓게 범위를 확장한다면, 친환경을 위한 사회적 캠페인과 같은 정책영역도 포함할 수 있다.

그린 공공 디자인 분야는 기존의 사적 디자인이 가지고 있던, 더 나은 환경에 대한 개인적 욕구와 사회 안전망 확충이라는 공공시책이, 친환경에 대한 이슈와 결합한 훌륭한 분야로, 현재보다 더욱 성장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린 공공 디자인의 현실과 한계

그렇다면 그린 공공 디자인에 대한 우리의 현실과 한계는 무엇일까? 세계 각국에서 시행하는 유명 디자인 어워드들은 친환경적인 디자인과 공공성을 가진 디자인을 심사의 중요한 부분으로 선정하고 심사시 할당된 점수를 부여한다. 이와 같은 디자인 트렌드에 발맞추어, 현재 국내의 각 지자체에서 발행한 공공 디자인 가이드라인에도 두 분야를 주요 핵심과제로 삼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인해 공공 디자인 사업에 친환경이 결합되는 부분이 많은데, 최근에는 건축영역까지도 그 범위가 확장되어, 옥상 녹화 등의 그린 공공 디자인 영역이 법적으로 규제화되는 상황으로 발전하고 있는 중이다.

또한 시설물의 소재에 있어서도 과거에는 철물위주의 시설물이 위주였다면 현재는 목재를 적용한 시설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담쟁이나 새덤식재, 잔디등을 이용하여 친환경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한다. 이처럼 친환경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많은 공공영역에 적용되는 그린 공공 디자인은 국가 차원의 지원을 바탕으로 많은 사업이 시행되었고, 앞으로의 수요는 더욱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그와 같은 수요예상에 비해, 디자인 프로세스와 제작환경은 더 전문적이지 못하다는 단점이있다. 현재는 그린 디자인에 대한 전문가 그룹과 공공 디자인에 대한 전문가 그룹이 존재하는 데 이들은 각자의 분야에서는 충분한 노하우와 지적재산을 가지고 있지만, 두 그룹이 접해있는 그린 공공 디자인에서는 서로가 비전문가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새덤식재가 적용된 파고라를 제작 시, 공공 디자인 전문가는 파고라 디자인, 제작 시공에 대한 프로세스를 진행하지만, 식재에 관한 상식이 부족해 식재를 적용할 수 없는 형태를 디자인하기도 하고, 식재 전문가는 공공시설 형태를 예측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도한다. 이는 협회나 학회차원에서의 지속적인 정보교류와 전문가들의 네트워크 및 상호협업등을 통해 풀어나갈 수 있다. 하지만 전문성을 가진 교육을 통해, 전문가를 양성하는 것이 원론적인 해결방안이라 할 수있다. 

그린 공공 디자인의 정책적 한계점도 존재한다. 그것은 공공 디자인이 가진 한계점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국내의 공공 디자인은 국가 정책을 중심으로 시행되어왔다. 이것은 디자인 분야의 빠른 정착과 홍보, 추진력있는 사업 진행에는 도움을 주었으나 결국에는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 꼴이 되어버렸다. 국가에서 시행하는 공공 디자인 사업은 정권의 영향을 받으며, 하드웨어 중심의 전시행정식 사업으로 변모해갔다. 이것은 정부로부터의 하향식디자인 사업의 폐해였다.

공공 디자인은 하향식이 아닌 공공성의 바탕으로 필요한 것을 시민들과 전문가가 제안하고 정부가 해결하는 상향식 사업이어야 한다. 하지만 정부 위주의 사업은 그 방향이 바르지 못했다. 하향식 디자인 사업은 결국 공공 시설물 디자인이 공공 디자인의 전부인 듯 인식시키는 큰 역할을 했고, 경기 침체와 정권교체 시에 발생하는 위험 부담을 공공 디자인이 끌어 안게 했다. 이는 그린 공공 디자인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데, 현재 인식되어있는 공공 디자인 영역에 친환경만 덧붙인 모습으로 변모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하드웨어를 만들고 과시하기 좋아하는 정치적 소모품이 될 가능성도 있다. 이것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그린 공공 디자인의 범위를 명확히하고, 디자인프로세스를 견고히 해야한다. 특히 공공성에 대한 진정성 있는 결과물을 위해 디자이너와 정책자 모두 노력해야한다. 이것을 체계화하고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린 공공 디자인의 가이드라인과 사례집 등의 학술적 체계정립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인류의 안전을 위한 디자인의 힘

전자에서 이야기했듯이 세상의 이슈는 언제나 변해왔다. 이런 거대한 흐름 속에서 개인의 삶의 질은 무시되곤 했다. 이제 교열과 교정의 기계 냄새 가득한 통제의 시대는 가고, 상생 속에서 자유를 이야기하는 변역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인류의 행복은 결국 안전한 삶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 안전은 살고 사랑하고 쉬기 쾌적한 환경에서 시작한다. 제도의 문제이건, 사회의 문제이건, 인류 스스로의 인식의 문제이건, 환경에 대한 관심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친환경이라는 이슈가 언제 다시 지나간 유행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소중함은 더욱 의미있게 다가올 것이다. 이제 인류의 안전을 위한 디자인의 힘. 안전한 삶을 위한 환경에 대한 적극적인 의식과 행동의 변화, 그 변화의 중심에서 가치가 재정립된 공공성. 이들의 시대가 도래했다.


태그:#안전디자인, #그린디자인, #공공디자인, #친환경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