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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지난 4월, 700만 자영업자 대열에 합류한 초보 국수장사입니다. 새로운 길에서 새로운 세상을 봅니다. 몰랐던 부분을 새롭게 알게 되며, 깊숙히 숨어 있던 실체를 만나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이곳 '국수로 만나는 세상'에 풀어 놓겠습니다. - 기자 말

"형, 일어날 시간이야."

동거인의 한마디가 나를 깨운다. 한참 전부터 오줌보가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며 뒤척이던 참이었다. 새벽녘 탱탱해진 오줌보를 안고 이불 속에서 뭉그적거리는 달콤함. 이 맛을 아는 사람은 안다.

'참! 오늘 시장 가는 날이지.'

과감하게 그 달콤함을 걷어 내고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났다. 고양이 세수로 출근 준비를 대신하고 동거인을 따라 나선다. 차를 타자마자 창문을 내리고 잠이 덜 깬 강아지마냥 콧구멍을 벌름거린다.

'아 좋다. 아침냄새.'

초보 국수장사의 아침

이렇게 시장 가는 아침 길은 참 좋다. 콧구멍을 간질이는 상쾌한 공기의 촉감도 좋고, 그 공기 속에 묻어 있는 아침 냄새도 참 좋다. 한 가지 어려운 점이 있다면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힘들다는 것.

부스스한 몰골로 무뚝뚝하게 운전하는 동거인과 싱거운 말로 입을 푼다. 그 사이 차는 벌써 남부시장 입구에 도착했다.

전주 남부시장 촌스럽지만 전주 사람들에게 아직도 사랑 받는 재래시장이다
▲ 전주 남부시장 촌스럽지만 전주 사람들에게 아직도 사랑 받는 재래시장이다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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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대파 좋아요?"
"네 좋지요. 근데 가격은 좀 올랐어요."
"잘 해주세요. 대파  한 단하고 육수용 무하고 브로콜리도 좀 주세요."

능숙한 솜씨로 흥정을 하는 동거인의 모습이 멋지다. 사업 시작하기 전까지는 그저 후배로만 생각해 이것저것 걱정이 많았는데, 지금은 이렇게 믿음직한 동업자가 됐다. 대견하다. 이리저리 시장을 휘저으며 다니는 폼이 제법 노련하다. 음식사업가의 풍모가 엿보인다. 임무를 마치고 다음 식재료를 사러 가는 중에 방금 전 채소집의 내력을 들었다.

"저 가게는 사장님하고 아들 삼형제가 같이 일하는데 아들들이 참 성실하고 친절해요."
"벌써 선수가 다 되었네. 단골집 내력까지 파악하고."

우리는 각자 맡은 역할이 다르다. 그동안 시장보기는 후배의 몫이었다. 나는 그걸 핑계 삼아 새벽마다 오줌보가 탱탱해 지는 걸 즐겼다. 그 사이 후배는 시장을 다니면서 저만큼 어엿한 사업가로 성장했다.

"이렇게 좋은 시장보기를 그동안 혼자만 즐겼단 말이야?"

나의 실없는 농에도 후배는 응수도 없이 그저 제 갈길을 걸어 간다.

동네 사람들의 '속살'을 보려면 시장에 가라

할머니의 홍시 달콤한 말로 흥정을 걸었던 할머니의 홍시
▲ 할머니의 홍시 달콤한 말로 흥정을 걸었던 할머니의 홍시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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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이거 그냥 드릴게 가져가~."

바쁘게 걷는데 내 얇은 귀를 자극하는 호객용 멘트가 들려왔다. 뻔한 호객 행위인지 알지만, 자석에 이끌리듯 발걸음은 벌써 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감 한 무더기를 쌓아 놓고 장사하는 할머니는 실없는 말로 흥정을 걸어왔다.

'내가 조금 어리숙해 보이긴 하나 보다. 저런 멘트로 날 꼬시다니... 헌데 그 꼬임에 이렇게 관심을 보이는 난 또 뭐지?'

할머니의 입담에 맞장구를 쳐가면서 잠시 '사람 사는 흉내'를 내본다. 어찌 보면 이렇게 과장되고 넉살 좋은 흥정이 시장 보기의 진짜 매력이긴 하다.

남부시장의 가을 그곳은 이미 풍성한 가을이 익었다.
▲ 남부시장의 가을 그곳은 이미 풍성한 가을이 익었다.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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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시장을 돌다 보면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어 참 좋다. 이런 이유로 많은 여행자들이 세계 어디를 가든 그곳 사는 사람들의 속살을 보려면 재래시장에 가라고 한 것 같다.

추석 때 만난 조카 말이,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전주여행이 '핫 아이템'이라고 한다. 나는 아직 전주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은 외지인이지만, 사실 전주에는 한옥마을과 비빔밥만 있는 게 아니다. 전주를 제대로 보려면 이곳 사람들이 살아가는 진짜 모습이 녹아있는 재래시장 한 곳쯤은 보고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주에는 재래시장이 다섯 곳 있다. 남부시장, 중앙시장, 동부시장, 서부시장, 모래내시장이다. 전주에 내려와 여러 곳을 돌아다녔지만, 내 마음을 끈 곳은 이미 관광지가 돼버린 유명 장소보다 바로 이 재래시장이었다. 특히 남부시장은 규모도 크지만 왠지 모를 매력으로 나를 끌었다.

남부시장은 잘 정비된 도로 위쪽 상가들과 도로 아래 하천변에 펼쳐진 난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하천변 난장은 아마도 번듯한 상가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둘 좌판을 펼치면서 생겨난 듯하다. 잘 정비된 점포들도 하나하나 매력적이지만, 나는 이곳이 마음에 든다. 어릴적 어머니를 따라 다녔던 시골장에 대한 향수 때문인지 훨씬 정이 간다.

전주 남부시장 천변 난장 천변을 따라 길가에 들어선 난장
▲ 전주 남부시장 천변 난장 천변을 따라 길가에 들어선 난장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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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시장 상가 반듯하게 정비된 남부시장 상가의 점포들
▲ 남부시장 상가 반듯하게 정비된 남부시장 상가의 점포들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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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엔 깎은 밤톨같이 되바라진 도시 장사꾼들에게선 찾아 볼 수 없는 생기가 있다.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모습도 좋다. 다들 고만고만 벌어서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 같지만, 도시 사람들처럼 무언가에 쫓기는 모습이 없어 좋다. 오고 가는 흥정 속에서 들을 수 있는 전주 사람들의 여유 있는 농담도 나는 참 좋다.

장기 불황으로 아마도 상인들의 마음 속은 숱처럼 까맣게 탔을 것이다. 하지만 겉모습은 모두 살아서 펄펄 뛰는 생선 같다. 이 생동감의 원천은 꼭 장사가 잘 돼서 나오는 게 아닐 터다. 장사가 잘 되든 안 되든 하루하루 주어진 삶을 대하는 그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더욱 끌린다.

재래시장이 가져다 준 변화들

국수장사를 시작하고 깨닫게 된 것 중에 하나는 그동안 내가 세상을 편협하게 봤다는 점이다. 특히 재래시장을 바라보는 시각이 편협했다는 걸 피부로 느낀다. 도시인에게 시장보기란 그저 귀찮은 일 중 한 가지다.

먹고 살기 위한 물품을 대형마트에서 실어와야 하는 일이다. 카트에 필요한 물건을 실으면 그만이고, 찾는 상품이 없다면 숙달된 직원의 안내를 받으면 된다. 하지만 이곳에서 국수장사를 시작한 뒤에는 그렇게 무미건조하게 시장을 보는 일이 없어졌다.

시장보기는 세상보기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사람 냄새 풀풀 풍기며 살아가는 모습 속에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보인다. 꾸미지 않은 날 것 그대로 사는 시장 사람들의 모습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내 진짜 삶이 보인다.

또 한 가지 바뀐 점이 있다. 전에는 시장 사람들을 그저 나와 다른 방법으로 돈을 버는 장사꾼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은 모두 동반자라고 생각한다. 업종은 다르지만 같은 길을 가는 '동지'라고 할까?

국수장사를 하기 전에는 절대 몰랐다. 안부를 묻고, 흥정을 하고, 장사 잘 하라며 서로 격려도 해주는 사업의 동반자이자 인생의 동반자들이 이렇게 많다는 걸. 내가 일반적인 직장인이었다면 이들 모두를 경쟁자로만 봤을 거다.

마지막으로 필요한 식재료를 사기 위해 남부시장 안으로 들어 갔다. 그곳에 눈에 익은 간판이 들어왔다.

'남부시장 2층 레알 뉴-타운 청년몰.'

'이곳이 그 유명한 남부시장 청년몰이었군.' 이리저리 시장 간판을 구경하면서 간판 옆 문구에 눈이 갔다. 그 글이 국수장사를 하겠다고 결심했던 나의 첫 마음을 일깨워 줬다.

'적당히 벌고 아주 잘 살자.'

멋진 말이다. 초보 국수장사는 오늘도 이렇게 선배들의 공짜 가르침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장도 보고 뽕도 딴다. 횡재다. 그래. 나도 적당히 벌고, 아주 잘 살자!

청년몰 간판 적당히 벌고 아주 잘살자. 문구가 인상적이다.
▲ 청년몰 간판 적당히 벌고 아주 잘살자. 문구가 인상적이다.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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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손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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