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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변신>이 국내 연출가에 의해 기괴한 연극으로 재탄생했다. 김현탁이 연출한 <잠자는 변신의 카프카>는 지난 7일 개막해 오는 18일까지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에서 펼쳐진다. 이번 작품은 남산예술센터와 극단 성북동비둘기가 공동 제작했다.

배우들 몸짓 하나 하나와 무대장치, 음악만으로 연극은 정말 독특하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하얀 물감과 마이클 잭슨의 'I'll be there', 현대인의 노동과 그로 인한 고독 혹은 정신분열까지. <잠자는 변신의 카프카>는 멈추지 않는 폭주 기관차처럼 배우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즉 노동한다. 마치 우리들의 노동은 쉼 없이 확장되고 계승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실제로 극에서 주인공 그레고리 잠자(Gregor Samsa)의 고달픈 노동은 동생 안나(Anna)에게 계승되고, 안나는 잠자처럼 이제 벌레로 변해갈 조짐이 보인다.

특히 극 속에선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가 잠자와 안나의 관계를 대비시킨다. 베짱이가 되고 싶은 개미(잠자)와 개미가 되기 싫은 베짱이(안나)는 결국 전도된다. 잠자는 벌레가 되고 사람들의 시선에서 사라지지만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노동은 살아(?) 남는다. 그것도 안나에게로. 개미는 베짱이가 되고 싶은 현대인의 심정을 드러낸다.

베짱이가 되고 싶은 현대인의 심정 아닌가

공연을 위해 배우들이 분주하게 연습하고 있다.
▲ <잠자는 변신의 카프카> 연습 장면 공연을 위해 배우들이 분주하게 연습하고 있다.
ⓒ 서울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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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초반에 잠자의 아버지는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야"라고 외친다. 그 후부터 주인공 잠자(신현진 분)는 마치 소설 속 주인공이 벌레로 변신하기 전에 끝없는 노동에 시달린 것처럼, 일한다(연기한다). 잠자는 뛰고, 외치고, 춤추고, 눕고, 싸우고, 성토하고, 마시고, 사라진다. 주인공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이 피로할 정도다.

마실 것 좀 달라는 잠자의 말에 뭐라도 사주고 싶은 심정이다. 그의 갈증은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현대인의 노동과 닮아 있다. 정말 신기한 건 잠자의 굴레가 그의 인생과 함께 사라졌음에도, 노동 자체는 여전히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왜냐면 가족은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보도자료에서 연극 칼럼니스트 김주연씨는 이번 작품을 "극 중 주인공인 잠자와 작가인 카프카, 그리고 연출자인 김현탁을 하나로 잇는 새로운 작품"이라고 평했다. 노동의 굴레에서 해방되고 싶었던 <변신> 속 주인공 잠자와 글만 쓰며 살고 싶었던 카프카와 연극만 하고 싶은 김현탁씨가 연결되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 지점은 노동을 하고 있는 모든 현대인에게로 확장된다. 

원작 <변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 날 흉측한 벌레가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늙은 부모와 어린 여동생을 뒷바라지하는 가장 역할을 했지만 더 이상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특히 여동생은 한동안 그런 오빠를 위해 방도 넓혀주고 음식도 취향을 고려해 가져다준다.

문제는 돈을 벌 사람이 저 지경이니 먹고 살길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은 돈을 벌기 위해 사회로 진출한다. 집에 하숙을 내기도 하고 값나가는 물건들도 팔았다. 다행히 그레고르가 벌어다 준 돈을 저축한 것이 있어 한동안은 그걸로 살아갔다.

<변신>은 1915년 발표된 작품으로 돈을 벌 때는 집안에서 칭송받던 이가 몸이 아파 생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로 변하자 가족들이 그를 어떻게 대하는지 나타낸다. 그는 철저히 소외돼 갔고 아버지가 다시 자그마한 일자리를 잡자 가족들의 주의는 아버지에게로 옮겨간다. 그레고르가 한순간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도 그간 희생한 결과가 있고 또 가족이기에 나머지 가족들은 그를 챙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를 멀리하고 무관심해진다. 결국엔 벌레 취급을 하며 역겨워한다. 실은 그가 쓸모없는 사람이 되자마자 그레고르는 스스로를 벌레라고 여기고 가족도 마찬가지로 그를 대한다. 크고 흉측하며 도움이 되지 않는 밥벌레로 말이다. 또한 쓸모없는 그를 다른 사람에게 안 보이고 싶어 한다. 그가 마른 다리와 부어오른 몸으로 죽자 어머니는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드린다.

가족들의 시선은 처음엔 쓸모없게 변신한 그에게 맞춰진다. 그리고 모든 상황을 그와 같이 처절하게만 본다. 그가 사라지자 비로소 자신들을 되돌아본다. 그들은 그렇게 나쁜 상황이 아니었다. 삶이 각박해지자 그들에게 가족에 대한 희생은 사치로 여겨졌다. 오로지 생계를 위한 일에만 초점이 맞춰질 뿐이다.

씁쓸했다. 우리 시대에도 쓸모에 따라 가족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변신은 종류에 따라 환호 받거나 처절히 소외당한다. 환경이 인간을 그렇게 만든다. 가족의 사랑도 삶을 이어주는 수단에 뒤쳐는 현실이 안타깝고 무섭다.

일할 땐 관심을, 일하지 않으면 벌레 취급

<잠자는 변신의 카프카>엔 그동안 연출가 김현탁씨가 공연해 온 작업의 장면들이 변형돼 녹아들어 있다. 그 중심엔 '몸'이 있다. 변해가고 지쳐가고 죽어가는 몸을 극 속에 배열한 것이다. 배우들, 특히 주인공의 몸은 원심분리기에서 빠져 나오듯 해체된다. 가쁜 연기를 마치고 숨을 쉴 때야 비로소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이번 연극은 카프카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도 낯설다. <변신>의 내용을 잘 알고 있는 독자들에게 연극이라는 미디어, 특히 김현탁씨의 연출은 난해하다. 왜냐하면 현실과 꿈, 배우와 역할, 공간과 배치, 장면과 대사 등이 무작위로 섞여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단, 시간의 흐름은 회상 장면을 빼곤 현재에서 미래로 일관적이다.

그렇다고 내용이 그리 어렵거나 메시지가 복잡한 것은 아니다. 연극의 묘미가 희곡과 무대 및 배우에 있다면 <잠자는 변신의 카프카>는 충분히 재미있다. 극의 구성과 장면, 배우들의 열연이 관객들을 파고들기 때문이다. <변신>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고 가면 더 좋을 연극이다.

덧붙이는 글 | 공연 후기입니다!



태그:#카프카,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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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문화, 과학 및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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