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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학 박사 서민 교수를 처음 본 건 4년 전쯤이었다. 당시 한국에는 강연 열풍이 불고 있었고, 나는 CBS의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이라는 강연 프로그램을 즐겨 봤다. 어느 날은 시간이 남아돌아 그간의 강연들을 하나씩 정복해 나갔다.

그러다 서민 교수를 처음 봤다. 특히 그의 눈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강연에서 그는 본인 눈에 기생충을 넣어 키우려다가, 눈이 너무 작아 실패한 경험을 털어놓았다. 어설픈 말솜씨로 자학적 유머를 구사하는 그의 이야기가 너무 웃겨 물인지, 커피인지, 침인지를 내뿜었던 기억이다.

강렬한 첫인상 이후에도, 그의 얼굴과 글을 간혹 접할 수 있었다. 주로 칼럼을 통해서였고, 때로는 텔레비전 아침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윤창중 사건'도 서민이 논평하면 재밌다

도대체 아침 프로그램에는 왜 나오는 걸까 싶었지만, 그의 글은 좋았다. 신문칼럼을 읽으며 웃어본 적이 있던가. 헛웃음 외에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서민 교수의 칼럼은 독자를 웃게 한다. 분명 짜증나는 사건을 논평하고 있는데도 그게 그렇게 우스울 수 없다. 가끔은 '너무 웃기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웃기니 웃을 수밖에 없다.

특히 이 칼럼, '윤창중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경향신문>)는 많은 사람의 호응을 얻었고, 호응을 얻은 이유는 물론 웃겨서였다. 이 칼럼 덕에 서민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꽤 글을 잘 쓰는 사람 중 한 명으로 이름이 나게 되었다고 (서민 교수는 말)한다.

'윤창중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를 보면 그는 우리나라에서는 흔치 않은 글쓰기 전략인 반어법을 구사한다. 어떤 뛰어난 통찰력이나 범접할 수 없는 지식, 논리적 구조 등이 이 글엔 없다. 우리가 몰랐던 사실, 또는 날카로운 미래 예측 같은 것도 없다. 그냥 반어법이 있을 뿐이고, 그로 인해 우린 웃을 뿐이다. 인간으로서,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도덕성도 갖추지 못한 한 사람을 향해 우린 분노하는 대신 웃는다. 그리고 그를 그 자리에 앉힌 또 다른 사람을 향해 우린 분노하는 대신 웃는다. 그의 반어법은 아주 잠시일지라도 우리를 짜증과 분노의 감정에서 건져내 웃게 해주므로 그 자체로 빛이 난다.

칼럼만 접하다 그의 서평집 <집 나간 책>을 읽게 된 건 오로지 어느 블로거의 서평 때문이었다. 블로거는 이 책의 장점을 '딱' 하나 들었는데, 그건 바로 '술술 읽힌다'는 거였다. 술술 읽히니 '단숨에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자연스레 따라오는 책이라고도 했다.

감당이 안 되는 어려운 책 몇 권을 읽느라 끙끙대던 요즘, 술술 읽히는 책을 읽고 싶던 차였다. 블로거를 믿어보기로 했다. 책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다. 아, 텅 빈 8차선 도로를 달리는 기분이 이럴까. 이 책은 정말 기분 좋게 술술 읽혔다. 단숨은 아니더라도, 꽤 짧은 시간에 책을 다 읽었다.

블로거는 이 책의 장점은 '딱' 하나라고 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야박한 평이다. 내겐 장점이 몇 개 더 보였다. 물론, 내가 찾은 장점은 모든 독자에게 다 적용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한번 말해본다면.

이런 웃기는 서평집이 또 있을까

<집 나간 책> 표지
 <집 나간 책> 표지
ⓒ 인물과 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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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장점은 하나, 연필이 필요 없다. 나는 책을 읽을 땐 연필을 손에 든다. 인상 깊은 문장이나 내용에 줄을 그으며 표시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 역시 연필을 쥐고 읽기 시작했다. 5분의 1쯤 읽은 순간부터는 연필을 내려놨다. 이 책은 밑줄을 치거나 체크를 해야 할 책이 아니었던 것이다.

꼭 기억해야 할 문장이나 내용이 없다는 사실, 이 사실이 이렇게 기쁜 줄 몰랐다. 기쁨에 가득 찬 나는 연필을 내려놓고 바로 침대에 누웠다. 긴장감 없이 책을 쭉 읽어나갔다. 그래서 추천한다. 이 책을 읽을 땐 편히 누우시라. 누워 있으면 어느 재미있게 생긴 아저씨가 그렇게나 재미없는 책 이야기를 신기할 만큼 재미있게 들려줄 것이다.

둘, '사이다'를 마시는 기분이 든다. 속이 뻥 뚫리는 부분이 많았다. 서민 교수는 책의 서문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다. "읽다가 '이 자식 좌파잖아!'라며 부르르 떨지 않도록 미리 조심하시길." 이 책엔 '윤창중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류의 글이 꽤 있는데, 어떨 때는 책 이야기를 하다가 일부러 삼천포로 빠져 정치 이야기로 끝을 맺기도 했다. '아니, 뭐 이런 삼천포 같은 글이 다 있나!' 싶다가도 속이 뻥 뚫리니 '뭐, 괜찮군' 싶었다.

셋, 서평을 쓰는 데 자신감을 (아주 잠깐) 준다. 서민 교수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평집을 내는 분들은 대개 리뷰를 아주 잘 쓰지만, 나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닌 탓에 글들이 무지하게 쉽다. 독자로 하여금 서평을 쓰고픈 욕구를 느끼게 하는 것이야말로 내 서평집의 가장 큰 순기능이리라." - <집 나간 책> 중에서

글이 "무지하게 쉽"다 보니, '이 정도는 나도 쓸 수 있겠는걸'하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 서평을 쓸 때마다 한숨에, 한숨에, 한숨이 나오곤 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읽기 쉬운 글을 쓰는 거야말로 어려운 일임을 글을 쓰는 사람들은 다 안다.

실제로 서민 교수는 서른 살 이후로 하루에 두 편씩 글을 꾸준히 연마했다고 하지 않나. 고로 이 책은 "독자로 하여금 서평을 쓰고픈 욕구를 느끼게" 해주는 것은 맞지만, 독자는 곧 현실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 정도 글을 쓰려면 얼마나 긴 연마 기간이 필요한지 글 몇 편 써보면 알게 될 테니까.

마지막은 인상에 남을 만한 문장을 건지지는 못했지만, 읽고 싶어 몸이 근질거려지는 책을 여러 권 건졌다. 조금 너무하다 싶게 서민 교수는 많은 작가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 마음이 책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덕분에 인터넷 서점의 장바구니가 무거워졌다. 역시 독자를 끌어들이는 가장 강력한 서평은 '나는 이 작가가 너무 좋아요' '나는 이 책이 너무 좋아요'이다.

이런저런 장점이 풍부한 책이었지만, 그렇다고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술술 읽힌다'는 건 어찌 보면 이 책의 단점이다. 

이 책이 술술 읽히는 이유는 저자가 모든 글에 '동일한 긴장감'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책에 따라 때로는 깊게, 때로는 내밀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때로는 가볍게 쓰는 게 보통의 서평이다. 하지만 이 책에 소개된 서로 다른 54권의 책은 모두 같은 분위기로, 같은 가벼움으로, 같은 긴장감으로 쓰였다. 서민이라는 작가의 글쓰기 스타일 때문이다.

가령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박민규, 예담)편이 그렇다. 비애감 가득한 이 책은 <집 나간 책>에서 유머와 가벼움을 안아야 했다. 때문에 책의 분위기가 온전히 다뤄지지 않았다. 서평가의 역할이란, 통역사와 같은 게 아닐까. 자신의 모습은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면서 책과 독자가 오롯이 마주보도록 도와주는 사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통역사의 개성이 너무 도드라진 책이었다.

사실 이 책을 집어 들며 나는 전문 서평가의 서평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재미있는 글을 읽고 싶었고, '술술' 읽고 싶었고, 덤으로 책 소개까지 받는다면 좋으리라 생각했다. 이 책은 딱 그만큼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었다.

그러니 이 책은 서평가의 서평을 읽는다는 생각 보다는 고급 독자의 독서 에세이를 읽는다고 생각하면 좋을 듯하다. 독서 에세이로서, 이 책은 꽤 좋다. 이런 웃기는 독서 에세이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덧붙이는 글 | <집 나간 책> (서민/인물과 사상사/2015년 04월 27일/1만4천원). 개인 블로그에 중복 게재합니다



집 나간 책 - 오염된 세상에 맞서는 독서 생존기

서민 지음, 인물과사상사(2015)


태그:#서민, #집 나간 책,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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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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