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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도> 에서 영조로 분한 송강호
▲ 사도 영화 <사도> 에서 영조로 분한 송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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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2년 5월 역사가 연출한 막장드라마에서 영조는 악역을 연기한 배우다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난 영조는 출생 신분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거기에다 경종 독살에 노론당에 코가 꿰여 연산이나 광해처럼 축출 위협과 암살 악몽에 시달렸다.

노이로제 상태에 빠져 있던 영조가 51세 연하 15살 신부를 맞아들여 젊은 몸을 통하여 회춘과 환생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했지만 결국 아들을 죽이고 말았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권력에 희생된 사도세자는 나쁜 사람으로 기록된 역사적 사료가 많지만 며느리 혜경궁 홍씨보다 10살이나 어린 여자를 왕비로 맞아들여 위계질서를 깨트리고 엽기적인 방법으로 아들을 죽인 영조는 제왕은 무치(無恥)라지만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는지 모른다.

영화 <사도>에서 정조로 분한 소지섭
▲ 사도 영화 <사도>에서 정조로 분한 소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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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2년 5월 역사가 연출한 막장드라마에서 사도세자를 죽인 사람은 정조다

경종 독살에 깊숙이 개입한 영조는 자신의 핏줄이 자기의 대를 이어 등극하지 못하면 자신은 노론당으로부터 '왕위가 탐이 나 형을 죽인 대역죄인'으로 팽(烹) 당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버지 숙종시대, 붕당정치의 폐해를 잘 알고 있던 영조는 탕평책을 썼다.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서는 올바른 정책이었다. 허나, 기득권을 쥐고 있던 노론당은 빼앗기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세자 시강원 시절. 소론계열 스승들로부터 진보적인 공부를 한 사도세자가 등극하면 노론은 몰락한다고 생각한 집권여당은 영조에게 세자를 내치라고 줄기차게 요구했다.

노론당으로부터 아들을 죽이라는 압박을 받고 있던 영조는 노론의 요구를 거절하면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절박한 위기에 처해있던 영조에게 세손 정조가 없었으면 하나밖에 없는 아들 사도세자를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정조는 평생 아버지에 대한 업(業)을 지고 살았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태어난 집복헌 근처에 영춘헌이라는 공간을 만들어 놓고 평생을 맴돌다 그곳에서 죽었다. 명분은 독서이지만 아버지에 대한 업을 닦으며 살았다. 정조는 조선역사 중, 몇 안 되는 성군이지만 무서운 사람이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곳이다
▲ 문정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곳이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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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자신의 첫 여자 정성왕후를 끔찍이 사랑했다. 그가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인 문정전이 그 당시에는 정성왕후의 혼전 휘령전이었다. 그가 죽자 손수 명당을 찾아 장사지내고 바로 옆자리에 자신의 사후지지를 만들어 놓고 자신이 죽으면 그곳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서오릉에 있는 홍릉(弘陵)이다.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서오릉 권역에 잇다
▲ 홍릉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서오릉 권역에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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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가 죽자 상주가 된 정조는 할아버지의 유언을 무시하고 동구능에 장사지냈다. 원릉이다. 헌데 그 자리는 물이 나는 나쁜 자리라고 효종을 여주로 이장한 파묘자리다. 결국 할아버지를 물구덩이에 묻은 것이다.

그렇다고 독단적으로 강행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불효손이 된다. 새 시대를 맞아 정조의 눈도장을 받으려는 김양택, 정존겸, 민진원, 유동형 등의 천거를 받는 형식을 취해 할아버지의 유지를 뭉개버린 것이다. 아버지를 죽인 할아버지보다도 아버지를 죽인 아들을 만들어버린 할아버지가 미웠던 것이다. 그래서 그럴까? 영조 이후의 왕들은 모두 사도세자의 후손들이다.

사도세자는 3일 만에 장사 지냈다

임금이나 왕비가 승하하면 6개월 국상을 치렀다. 세자는 3개월이 통례다. 이것이 조선의 국법이다. 헌데,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은 지 3일 만에 궁녀나 궁노비가 죽으면 나가는 창경궁의 사잇문 선인문을 나와 노제도 없이 동대문 밖 배봉산에 묻혔다. 사가에서도 사대부집에서는 7일장이었는데 쓰레기 버리듯 내다 버린 것이다. 또한 세자가 묻힌 곳을 원(園)이라 칭해야 옳지만 영조는 수은묘라 부르라고 명했다. 그래놓구선 생각할 사(思) 슬퍼할 도(悼)라는 시호를 내린 영조를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옳을까?

등극한 정조는 그 묘를 영우원으로 추숭하고 화성으로 이장하면서 현륭원으로 불렀다. 그 현륭원을 사도세자의 후손인 고종이 사도를 장조로 추숭하며 융릉이라 칭했다.

영화 사도에서 아버지와 충돌하는 세자
▲ 사도 영화 사도에서 아버지와 충돌하는 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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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경멸한 정조, 고문?

정조는 현 서울대학병원 자리에 아버지를 추모하는 사당 경모궁을 만들어 놓고 아버지가 태어난 집복헌 뒷동산에 자경전을 만들어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셨다. 안방 문을 열면 경모당이 보여 괴로웠다고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 기록하고 있다. 고문이 따로 없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60주년 생신을 맞아 궁내에서 회갑잔치를 치러도 아무런 하지가 없는데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는 화성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가 봉수당에서 회갑잔치를 치르면서 어머니 옆자리에 아버지가 계셨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라는 말을 세 번이나 했다. 그 말을 들은 혜경궁 홍씨는 괴로웠다고 <한중록>에서 술회하고 있다.

세자와 혜경궁 홍씨
▲ 사도 세자와 혜경궁 홍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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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궁 홍씨와 사도세자의 결혼은 정략결혼이다

노론당의 지지를 필요로 했던 영조는 노론의 중심세력 홍씨 집안에 아들을 줄 수밖에 없었고, 과거에 낙방하고 음보로 말단 관직에 있었던 홍봉한은 왕실과 혼인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혼인 결과 영조는 집권 여당 노론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고 홍봉한은 승승장구 영의정 지위에 올랐다.

허나, 애정 없는 부부관계는 금슬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또한, 세자는 공식적으로 후궁을 들일 권한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에 대한 강박관념에 시달리던 세자는 세자빈 이외의 여자를 불러들여 남다른 섹스에 심취해 있을 수 있다. 실례로 세자는 안암골 여승 가선을 불러들여 난삽한 행동을 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남자들이란 스트레스가 쌓이면 난폭한 섹스로 풀려는 경향이 있다. 파트너가 아니면 더더욱 광포해진다. 남성호르몬의 공격성이다. 거기엔 엽기성과 폭력성이 가미됐을 것이다. 세자 사후, 세자 방을 치울 때 유희기구가 나왔다는 기록이 그것을 증명한다.

사대부가에서 요조숙녀로 자란 혜경궁 홍씨에게 특이한 체위를 요구하거나 변태적인 방법을 요구하면 기겁했을 것이다. 혜경궁 홍씨는 남편을 멀리했고 그럴수록 세자는 다른 여자를 불러들여 엽기적이고 폭력적인 섹스를 펼쳤을 것이다. 그것을 목격한 혜경궁 홍씨는 남편을 짐승 취급했고 세자는 분노했다.

천박하다고 생각하는 궁녀를 불러들이는 사도를 혜경궁 홍씨는 경멸했다. 세자는 아버지에게 미움 받고 부인에게 버림받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럴수록 궁녀나 궁 밖 여자를 불러들여 과격한 섹스를 펼쳤을 것이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현대의학에서는 성중독증이라 부른다. 이러한 단어가 없던 그 시절에는 사도를 정신병자라 불렀다.


태그:#사도세자, #정조, #혜경궁홍씨, #영조, #성트러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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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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