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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골짜기'로 불리는 도시, 발파라이소는 그 이름부터 매력적이다. 이름만큼이나 도시도 매력적이어서 칠레를 여행한 대부분의 여행자에게 묻는다면 어김없이 추천 여행지로 꼽히는 곳이다.

개인적으로는 10년 전 칠레에 왔을 때 발파라이소를 가기로 한 날 몸이 안 좋아 결국 가기를 포기했다. 당시 호스텔에서 쉬었던 것이 내내 아쉬움으로 남은 곳이기도 하다. 산티아고에서 2시간 남짓 걸리는 가까운 거리여서 보통 많은 사람이 당일 여행을 다녀오는 곳이다. 10년 전 아쉬움을 달랠 겸, 2박 3일로 좀 여유 있게 일정을 잡아 다녀왔다.

버스터미널에서 숙소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사람들이 가득 차서 버스 맨 뒤로 밀려났다. 하차할 곳을 버스기사에게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앞자리로 옮겨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옆자리에 앉아있는 청년에게 물었더니 굳이 흔들리며 구불구불 올라가는 버스 안에서 노트 한 장을 찢어 자세한 설명과 함께 약도를 그려준다. 서너 번 샤프심을 부러트려 가며 그려준 어설픈 지도가 발파라이소에서 얻은 첫 지도가 되었다. 청년은 마지막까지 "잘 찾아 가라"며 당부하고, 좋은 여행 하라고 인사했다. 버스에서 내리는 청년에게 말했다.

"분명 좋은 시간이 될 거야. 너처럼 좋은 사람을 만나면서 (여행을) 시작하니까."

여행은 이렇게 항상 어떤 첫 만남과 첫 인상으로 시작된다.

다양한 색을 가진 도시의 역사

발파라이소 청년이 그려준 발파라이소 지도.
 발파라이소 청년이 그려준 발파라이소 지도.
ⓒ 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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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파라이소' 하면 무엇보다 벽화로 유명하다. 버스터미널에서 숙소가 있는 곳까지 버스를 타고 언덕을 올라가는 길. 길마다 넘치는 벽화뿐 아니라 건물들이 알록달록 색칠되어 있어 그야말로 사진 촬영을 위한 명소로 보였다.

이곳의 벽화는 1970년 '열린 하늘 박물관'으로 알려진 칠레의 유명한 벽화가와 발파라이소 가톨릭 대학 미술학과 학생들의 프로젝트가 큰 기점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당시 벽화들은 많이 사라지고, 지금의 벽화는 주로 90년대 이후 새로이 그려진 것이며 지금도 그려지고 있다.

발파라이소는 어느 거리를 걷든 벽화가 넘친다.
 발파라이소는 어느 거리를 걷든 벽화가 넘친다.
ⓒ 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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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는 역사적으로 볼 때 여러 이야기가 담겨 있다. 빌라파이소는 명실공히 최고의 무역항이었고, 무역으로 쌓은 부는 칠레 현대화의 선구자라는 타이틀을 부여했다. 칠레의 첫 소방서, 수도시설, 은행, 텔레비전 채널 등 많은 것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이다. 사회운동의 중심이었고 1825년에는 칠레의 첫 총파업이 있기도 했다. 남미 첫 노동조합본부의 기점이기도 했으니 이곳이 어떤 무게의 도시였을지는 상상이 될 터이다.

물론 슬픈 역사도 있다. 18세기 역사적으로 흑인 노예시장이 가장 흥행했던 곳이었던 탓에 이곳에서 매년 4800여 명이 넘는 흑인 노예가 거래되었다. 그때 많은 노예가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고 한다. 이 도시의 다양한 얼굴은 건물의 색깔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발파라이소', 어디에서 온 이름인가?

벽화 뿐 아니라 건물도 다양한 색을 입고 있다.
 벽화 뿐 아니라 건물도 다양한 색을 입고 있다.
ⓒ 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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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파라이소(천국의 골짜기)'라는 이름을 들으면 지역의 아름다운 지형을 예찬하며 붙인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지명의 역사를 보면 해석은 조금 달라진다.

1536년 스페인 정복자 디에고 데 알마그로가 페루로부터 칠레 원정대로 내려오는 길. 오랜 여정에 많은 원정대원이 지쳐있을 때, 산티아고에 다다르기 전 휴식처와 식량을 제공받은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이에 디에고는 휴식을 취하며 그의 고향인 스페인 카스티야 라만차 지역의 '발파라이소 아리바'의 이름을 따서 이 지역을 '발파라이소'라 불렀다고 한다.

어쩌면 그에게 천국의 의미는 이 도시의 아름다운 지형보다 고향과 같은 휴식을 준 곳이라는 뜻에 더 가깝지 않았을까 싶다. 침략자의 고향 이름을 얻은 발파라이소. 조금은 아이러니한 역사다.

40개가 넘는 언덕 위의 삶

서울에서 난곡동 산동네에 살았던 나는 발파라이소의 언덕들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신림동 산동네의 기억이 많이 떠올랐다. 한 언덕 위에서 보면 다른 언덕이 끝없이 보이는데 이렇게 이 도시에는 40개가 넘는 언덕들이 존재한다.

그중 여행자가 많이 찾는 네다섯 개의 언덕 외에도 30여 개가 넘는 곳이 있다. 이곳 산동네의 삶은 아마 많은 여행자가 사진으로 담아내는 알록달록 아름다운 언덕 도시의 이미지는 아닐 것이다. 1년 전에 큰 화재로 아예 언덕 하나가 다 불타버리는 일이 있었는데 아직도 이들의 이주 문제나 보상 문제가 처리되지 않는 상태라고 한다.

산동네의 삶이 그러하듯 주민들은 가난에 쫓기는 것처럼 자꾸만 위로 올라간다. 또한 어떤 대책도 없이 어설프게 지어가는 집의 구조 때문에 그들은 재난으로부터 안전할 수 없다.

이 언덕을 오르는 고단함을 조금 덜어주는 것이 발파라이소의 명물 엘리베이터이다. 언덕을 오르는 다양한 수단으로 작은 미니버스부터 택시가 있다. 물론 걸어 오를 수도 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오래된 야외 엘리베이터(아센소르)이다.

1883년 첫 엘리베이터가 가동됐다. 당시의 콘셉시온 엘리베이터는 130년이 넘은 지금도 운행 중이다. 당시 운행 중이던 30여 개 중에 현재 9개 정도의 엘리베이터가 여전히 운행 중이라고 한다. 5명만 타도 꽉 차는 작은 상자가 지상과 언덕을 오르락거리며 산 위와 아래의 삶을 연결해 주고 있다.

발파라이소의 언덕, 언덕을 오르는 오래된 엘리베이터.
 발파라이소의 언덕, 언덕을 오르는 오래된 엘리베이터.
ⓒ 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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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우리가 사랑하는 발파라이소

발파라이소의 마지막 날 호스텔 사람들과 마을 전통 바에서 쿠에카(칠레의 전통 음악과 댄스) 파티가 있다고 하여 느지막이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언덕 위의 고요함과 달리 언덕 아래의 거리는 오후 11시가 훨씬 넘은 시간인데도 사람들로 넘쳤다.

바 안은 쿠에카 음악이 흘러나오고 사람들이 그에 맞춰 춤을 춘다. 칠레의 전통 음료인 치차(와인음료)를 마시는 한바탕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모두가 따라 부르는 한 노래가 흘러나온다. "너는 다양한 색을 가진 무지개"라는 말로 시작하는 '내 사랑 발파라이소'라는 노래다.

"내 온 마음을 바쳐, 너를 바라보네.
내 온 마음을 바쳐, 너는 유일해
내 온 마음을 바쳐, 내 사랑 발파라이소."

후렴부의 발파라이소 예찬을 합창하는 사람들 사이에 여행자들은 이방인으로 서 있다. 많은 여행자가 발파라이소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아마 그 사랑은 이 곳에 살아온 이들의 사랑과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것은 나만의 느낌이었을까.

발파라이소의 밤. 언덕 위와 아래의 다른 시간이 흐른다.
 발파라이소의 밤. 언덕 위와 아래의 다른 시간이 흐른다.
ⓒ 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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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김준수 기자



태그:#칠레, #발파라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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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예술치료, 스페인 문화&언어, 글쓰기로 삶의 형태를 만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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