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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 대안탑 위에서 바라본 서안 시내 모습
 서안 대안탑 위에서 바라본 서안 시내 모습
ⓒ 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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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왕궁은 어땠을까. 그동안 경주를 찾는 사람들은 불국사·석굴암 등 신라의 유적들만 열심히 찾아다녔다. 신라의 왕궁에 대한 생각 없이 오랜 세월을 살아온 셈이다. 올해 경주시 인왕동 소재 신라 궁성지인 월성(月城) 지구에 있는 신라의 왕궁터 발굴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한다.

늘 중국 서안(西安)에 가보고 싶었다. 신라와 연합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 그들의 찬란한 문화유적이 있을 것 같은 기대, 당나라 사람들의 삶, 그래서 당나라의 수도 장안인 서안이 궁금했다. 몇 번의 기회를 노리다 드디어 당나라 수도 서안을 찾았다.

그런데 서안에서 찾을 수 있는 당나라의 흔적은 삼장법사가 공부한 대안탑과 부처님 사리가 모셔진 소안탑, 현재 발굴 중인 당나라 황궁 대명궁터, 섬서성 박물관에 남아 있는 유물 그리고 여러 왕조들의 무덤 74기였다. 당나라에 대한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서안은 많은 왕조의 수도였음에도 유적지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 이유는 13개의 왕조가 바뀌면서 계속 침략을 받아 수도 함락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인해 많은 유적들이 파괴됐으며 약 600년 전에는 진도 8.5의 지진이 발생해 남아있던 유적마저 다 무너졌다고 한다. 현지 가이드 오광현씨는 당나라 유적이 대부분 파괴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가장 크고 안전한 도시'라는 뜻의 장안(長安)은 당나라 수도였는데, 당나라뿐만 아니라 13개 왕조가 수도로 삼았던 도시예요. 3100년 전에 도시가 이미 형성됐고, 1100년간 중국의 수도였지요. 장안은 자금성의 네 배나 넓은 대명궁이라는 당나라 궁궐을 가진, 화려하고 웅장한 중국의 중심이었습니다. 하지만 당나라의 멸망과 함께 황궁과 유적들이 모두 파괴됐어요."

중국의 4대 불가마, 서안

유적을 찾아 섬서성 박물관을 찾는 중국 사람들
 유적을 찾아 섬서성 박물관을 찾는 중국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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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서성 박물관 해설사에게 설명을 듣는 중국 사람들
 섬서성 박물관 해설사에게 설명을 듣는 중국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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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학적으로 중국의 가장 중심에 위치한다고 하는 서안은 진령산맥 서북쪽에 위치한 해발높이 600m 정도의 분지다. 여름의 최고 기온은 38~40℃ 정도고, 일교차는 10℃ 이상 난다. 인구는 약 850만으로 중국에서 열네 번째로 큰 도시다. 중국에서는 남경, 중경, 황주, 서안을 4대 불가마라고 부른다. 그만큼 덥다는 이야기다. 이곳의 가장 유명한 요리는 만두요리라고 한다.

현대의 서안은 역대 왕조들의 찬란한 유적을 지닌 문화유적으로 도시라기보다는 현대화된 문화 도시이자 중공업 도시다. 850만 명이 사는 도시답게 높이 솟은 아파트숲이 도시를 점령한 가운데, 각종 빌딩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거리는 현대화된 도시로 번뜩이는 각종 간판들이며 진열된 상품들, 바쁘게 달리는 자동차들이 즐비하다.

서안에 40여 개의 대학교가 있고, 각종 중공업이 발달돼 있다. 전기차 생산 공장이 가장 유명하고, 비행기 부품을 만드는 공장도 있다. 얼마 전에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이 들어서기도 했다.

서역기행 중 느꼈던 점은 문화 유적지를 찾는 중국인들이 매우 많다는 것이다. 문화유산 방문객을 보면 외국인보다 중국인들이 더 많았다. 섬서성 역사박물관에도 중국인들의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개인적으로 줄을 서 있는 사람도 있고, 여행사 깃발 뒤에 모여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박물관 해설사들의 설명을 경청하는 그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삼장법사의 대안탑이 무너지지 않은 이유

 당나라 유적, 64m 높이의 7층 탑인 대안탑과 자은사
 당나라 유적, 64m 높이의 7층 탑인 대안탑과 자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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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기>로 유명한 삼장법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자은사 대안탑. 그의 본명은 '진위', 법명은 '현장'이다. '삼장'이란 말은 불교의 경전인 '경장, 율장, 논장'을 다 외운 현장법사를 사람들이 존경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서역기행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요괴 등 각종 기이한 이야기들이 <서유기>라는 소설로 탄생했다고 한다.

현장법사는 어렸을 때에 가족이 변고를 당해 절에 맡겨졌으며, 나이가 차면 절에서 나와야 했다. 그런데 불경에 대한 관심이 많아 다른 절로 가서 승려가 됐다고 전해진다. 삼장법사가 '왕장'에게 진리를 얻는 방법을 물었으나 답을 얻지 못하고, 불교의 발상지 인도에 가서 그 답을 얻기 위해 장안에 와서 임금에게 허가를 받고자 했단다. 당시 외국으로 나가려면 임금의 허가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임금은 처음엔 거절했으나 3개월 뒤 허가해줘 현장법사는 인도로 출발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세 명의 승려가 길을 나섰으나 가는 길이 너무 험해 두 명은 포기하고 현장 혼자 인도로 갔다고 한다. 가는 길 8년, 돌아오는 길 6년이 걸렸단다.

불경을 연구하고 돌아온 삼장법사는 임금을 만났고, 임금이 준 돈으로 나무 탑을 쌓았는데 그것이 대안탑이 시초였다고 알려졌다. '큰 기러기 탑'이란 대안탑(大雁塔)은 삼장법사가 인도로 가는 도중 사막을 건너다가 사막에 쓰러졌는데 큰 기러기가 나타나 오아시스로 인도해줘서 살아났다고 한다. 그래서 그 기러기를 기리기 위해 탑을 세우고 대안탑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대안탑이 중국에서 가장 높은 거대 벽돌탑(64m, 7층 규모)이 된 것은 측천무후가 다시 지어줬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여성이 황제가 되는 것에 부담을 느꼈던 측천무후는 당시 많은 사람들의 신임을 받은 삼장법사에게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이라고 말해주길 부탁했다고 한다.

그래서 삼장법사가 측천무후를 '하늘에서 내려온 미륵불'이라고 말하자 백성들이 측천무후를 황제 자리에 앉으라고 축원했다. 측천무후는 황제로 등극하고, '낙양'을 신선이 머무는 도시라는 '신도'라고 칭했으며, 삼장법사가 머무는 나무로 된 탑을 벽돌로 다시 쌓아줬다고 한다.

견고한 벽돌로 만들어져 대안탑은 전란으로도 무너지지 않았나 보다. 안에 들어가니 각 층의 높이가 높아 오르는 길이 매우 가파르다. 각 층에는 네 곳으로 난 창문이 있어서 명대고성과 서안 시내를 바라볼 수 있다. 명대고성 안의 전통가옥과 멀리 우뚝우뚝 솟아 있는 아파트·빌딩 숲들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어떤 층에는 명대의 불상이 모셔져 있었다.

1000년만에 모습 드러낸 항아리 속 보물

당나라 황실 유물 항아리에서 나왔다는  보물 '적금 주룡'
 당나라 황실 유물 항아리에서 나왔다는 보물 '적금 주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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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멸망시 황실의 어떤 사람이 당나라 황실 유물들을 넣어 땅에 묻었다는 다섯 개의 항아리
 당나라 멸망시 황실의 어떤 사람이 당나라 황실 유물들을 넣어 땅에 묻었다는 다섯 개의 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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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에는 당나라 유적이 그리 많지 않지만, 섬서성 역사박물관에는 당나라 황궁 유물들이 특별전시돼 있었다. 당나라가 멸망하던 때 황궁의 한 사람이 중요 유물을 항아리 다섯 개에 넣어 도망가려고 했는데 너무 무거워 땅에 파묻고 떠났다. 전쟁이 끝나면 돌아와 다시 파려고 했단다.

이 항아리들은 1000년이 지난 1970년에 발견됐다. 옥대, 옥그릇, 유리그릇, 만옥컵, 금잔, 금그릇, 금주전자, 금으로 만든 용 등 금·은으로 가공된 유물들 열다섯 점이 국보로 지정됐고, 섬서성 박물관에 당나라 황실 유물 특별전에 전시돼 있다.

서안 명대고성의 모습
 서안 명대고성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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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의 가장 중심지라는 종루의 야경과 시민들
 서안의 가장 중심지라는 종루의 야경과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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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시 중심가에 비교적 완전한 모습의 고성이 눈에 들어온다. 600여 년 전 명나라 초기에 건설된 성벽으로 20만 명의 인력이 8년 동안 쌓았다고 하는 명대고성이다. 규모는 동서로 2.6km, 남북으로 4.2km 정도의 사각형. 이 성의 둘레는 13.6km나 된다고 한다.

이 성을 완성한 뒤 지명을 장안(長安)에서 '서쪽의 가장 안전한 곳'이란 뜻의 '서안'으로 바꿨다고 한다. 현대 도시 서안의 중심가가 된 이곳에 종루와 고루가 있다. 명나라 때 아침에 종을 쳐 통행을 개시했고, 밤에는 북을 쳐 통행을 제한했다고 한다.

이 고성은 현재 서안의 중심지다. 종루와 고루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간다. 특히 밤에는 종루와 고루 사이에 야시장이 형성돼 많은 사람들이 붐빈다. 가게마다 손님을 끌기 위한 노력들이 돋보였다. 특히 엿을 길게 늘이는 장면을 보려고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었다.

서안의 가장 중심이 되는 종루는 아름답게 조명을 해놔서 멀리서 봐도 눈이 부셨다. 종루 옆에는 움푹 파인 계단이 있었는데, 그곳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중국 특유의 불꽃이 피어오르기도 하고, 글라이더 모양의 비행기를 날리는 사람도 있었다. 몇 명이 모여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고, 아이들과 열심히 놀아주는 부모도 보였다.

덧붙이는 글 | 7. 29(수)부터 8.6(목)까지 9일 동안 풀꽃산악회 회원 20명은 혜초여행사의 기획으로 신서역길의 중국 지역을 다녀왔습니다. 신서역기행은 서안에서 천수까지 320km를 버스로 약 5시간, 천수에서 난주까지 330km를 버스로 약 5시간, 난주에서 가욕관까지 740km를 기차로 약 8시간, 가욕관에서 돈황까지 400km를 버스로 약 5시간, 돈황에서 유원가지 120km를 버스로 2시간, 유원에서 선선까지 620km를 기차로 약 9시간, 선선에서 투루판까지 약 150km를 버스로 약 3시간, 투루판에서 우루무치까지 190km를 버스로 약 3시간이 걸리는 총 2800km의 대장정입니다.

‘버스와 기차로 간 서역기행’은 총 10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1) 사막을 가로지르는 신서역기행, (2) 서안(西安), 당나라의 흔적, (3) 진시황과 병마용, (4) 화청지 양귀비에 대한 기억, (5) 천수 맥적굴, (6) 난주 유가협댐과 황하, (7) 만리장성의 시작 가욕관, (8) 돈황 석굴 막고굴, (9) 사라진 왕국 고창고성과 교하고성, (10) 투루판 사막에 사는 사람들.



태그:#서안, #서역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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