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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화에서 이어집니다)

같은 하늘 아래 도쿄 중심부에 있는 지요타구 쿠단미나미의 한 아파트. 미키는 샤워한다. 머리에 라벤더 향의 샴푸가 자욱하게 거품을 일으킨다. 눈을 감고 K의 말을 되새긴다. K는 미국 영화 배우이자 감독인 우디 앨런이 '섹스는 대화보다 낫다. 대화는 섹스를 하기 위해 참아내야 하는 고통'이라고 했다며 웃었다. 이어서 베토벤은 교향곡 9번 악보에 '백 만 인이여, 서로 껴안으라.'고 적어놓은 것으로 전한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도 백 만 인과 한 몸이 되기 위해, 껴안기 위해 노력한다면서 또 웃었다.

그리고 K는 자못 심각하게 자신에게 미키와 마주한 대화는 고통이 아닌 기쁨이라며, 함께 나눈 섹스도 진지한 대화이자 가장 큰 행복이라며, 백 만 번 껴안는 사람은 늘 미키이면 좋을 것이라며, 미키를 만난 게 자기 일생의 행운이라며, 미키의 눈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말하고는 가볍지만 무겁게 약속하듯 입 맞춘다.

미키는 방송기자로서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커리어, 여성으로서 '미모'라는 권력과 탐나는 체형을 갖췄다. 하지만 남자, 남성이라는 존재에 대해 제대로 몰랐고, 연애에는 초보자나 다름없었다. 그 무엇인가가 그녀로부터 성장과정에서 사랑하는 감정을 빼앗았는지는 모른다. 집 떠난 낯선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서였을까.

하여튼 연애라는 맹랑한 감정은 어쩌면 술과 비슷하다. 처음에 술은 호기심은 느끼지만 마시기가 두렵고 몸이 거부한다. 그러나 차차 자꾸 마시게 되면 늘게 되고, 좋아하게 되고, 즐겨 찾는다. 연애도 비슷하다. 시인 보들레르가 말했듯이 '인간은 끊임없이 술과 싸우고 화해한다'는 얘기처럼 연애도 밀고 당기고, 싸우고 화해하고, 만나고 헤어지지만, 언젠가는 또 다른 연인을 만나 새롭게 사랑한다. 술이 과하면 이성을 잃듯, 사랑이 깊어지면 치정(癡情)에 이른다. 단지 술을 죽어라 마시면 숙취로 며칠을 고생하는 반면 미칠 듯이 사랑하다가 연인과 헤어지면 최소한 그 후유증이 한 달 이상 괴롭힌다는 점은 다르지만.

미키는 고등학교 때부터 미국 보스턴 근교 여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남자와는 거리가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물리적인 거리라고 하기 보다는 스스로 떨어뜨려 놓은 심리적 거리였을 것이다. 대학교 또한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의 웨슬리대학 후배인 여대 출신이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비교적 자유분방한 나라에서 공부한 것과는 관계없이 그녀는 전형적인 일본 여성이다. 여성적이고, 조용하고, 싹싹하고, 순종적이고, 교양 있고, 단아하고…. 일본은 물론 타국 남자들이 마음대로, 하지만 같은 마음으로 '그랬으면 하고 만들어 놓은 어떤 틀'에 꼭 들어맞는 일본 여자라는 것이다. 처음 카페 라이브에서 미키를 만났을 때, K 또한 미키를 그렇게 생각했다.

미키는 그 카페에 오면 습관처럼 미국 그룹 '더 마마즈 앤드 더 파파스(The Mamas & the Papas)'의 '캘리포니아 드리밍(California Dreaming)을 신청한다. 그 곡이 끝나면 이어서 역시 미국 그룹 '디 이글즈(The Eagles)'의 '호텔 캘리포니아(Hotel California)'를 적어서 주인장 강 박사에게 틀어달라고 정중히 조른다.

K도 좋아하는 노래다. 당연히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사랑이라는 것은 같은 취향이라는 이유로 조그맣게, 유치하게 시작된다. 그렇게 관심이라는 것은 수컷의 본능을 자극시키는 촉매가 되고, 그녀에 대한 접근으로 이어진다. 몇 번 그녀를 봐 온 K도 역시 꽤 정중하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하면서 캘리포니아를 좋아하느냐고, 동료 메구미와 함께 카페에 온 미키에게 묻는다.

"네, 좋아해요. 동부는 추워요."

미키에게 어렵사리 처음 건넨 말에 대한 너무나도 간명하고 치명적인 대답이다. K는 미키의 뜻밖의 대답에 조금 당황한다. 어쩌면 순간적인 일격을 당한 느낌이다. 어떤 장황한 설명이나 해설이 필요 없다. '춥다'는 것에 담겨진 뜻은 포괄적이고 망라적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정적인 의미를 전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호기심 많은 K에게 미키는 카페를 찾는 그 많은 여자들 중 하나에서 유일한 관심의 인물이 된다. 신기하고, 새롭고, 이상한 것에 대해 매력을 느끼는 어린애나 다름없는 마음에서다.

캘리포니아를 꿈꾼다는 것, 자신이 한때 생각했던 것과 흡사하다. 일탈과 반항에 대한 열망이다. 꽉 짜여져 숨쉬기조차 힘든 미국 동부의 엄숙주의나 형식주의, 돈만 좇는 월스트리트를 떠나 자유와 관용, 그리고 무위와 방종에 이르기까지 캘리포니아가 상징하는 의미는 지금도 그렇지만 60년대나 70년대 젊은이들이 꿈꿀 수밖에 없는 대상이었다.

K의 부모나 삼촌, 형의 세대, 그리고 K의 세대에서 미키의 세대까지 함께 나눌 수 있는, 시쳇말로 '힐링'을 위한 모르핀이 '캘리포니아'라는 것이다. K는 감춰진, 아니면 미키 자신도 모르는 미키의 마음을 읽어내고, 기꺼이 미키의 해방과 파격에 동감하고 동참하기로 제 맘대로 결심한다.

K는 사람과 사람, 특히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는 그 어떤 섣부른 지식이나 따분한 숫자보다 그 장소와 그 순간, 휩싸이는 격정과 눈부신 섬광처럼 뜨겁고 빛나는 감정과 직관이야말로 그들의 행동과 미래를 결정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때로는 무모한 것이 자연스럽다. 연애가 시작되려면 적어도 연애의 참여자 둘 중의 하나, 특히 남자는 무모해야 한다. 그냥 동물적이어야 한다. 수컷, 암컷을 찾듯 그렇게 말이다. 거기엔 이유가 없다. K가 미키에게 접근한 것은 그저 수 만 년 동안 진화해온 유전자의 명령에 따라 발현된 본능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뜨거운 내심과는 달리 첫 만남은 최소한 외형상으로 밋밋했다. 영화나 연애소설에서 나오듯 터질 듯한 가슴으로 첫눈에 서로에게 미친 듯이 빠져드는 그런 만남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나이 듦에 따라 조금은 영악해진 절제의 미덕 탓이다.

술 한 잔 하고 얘기만 나눴을 뿐이다. 음악과 영화, 소설과 미술 등을 매개삼아 좋아하는 것들을 소재로 서로에 대해 알아갔다. 그렇다고 잔꾀를 내려 애쓰는 탐색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냥 순수한 마음에 관심의 대상인, 모르는 사람에 대해 궁금해 하면서 이해해 가는 그런 과정이었다. 그 과정은 K를 편하게 했다. 우선 전직 기자와 현직 기자 사이에 서로 묻는 것과 듣는 것에 너그러웠다. 특히 문학이나 예술에 있어서 시대나 장르에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보면 재미있는 영화, 들으면 좋은 음악을 사랑하는 미키가 '타인의 취향'이 아닌 자신의 성향과 흡사해서 좋았다.

사람들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음식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의 브리야 사바랭이라는 옛 사람이 말한 것처럼 '당신이 먹는  음식을 말해준다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는 얘기가 딱 맞는다. K는 음식과 관련, 박애주의자다. K는 거의 대부분의 음식을 맛있게 먹을 줄 안다. 선호의 정도는 있다 해도 그 음식이 갖는 고유한 맛과 그 가치를 인정한다는 게 K의 굳은 믿음이다.

그리고는 음식을 먹는 습관이나 방식, 그러니까 음식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나 자세가 인간에게도 거의 유사하게 적용된다는 것이 K의 주장이다. 특정 음식 혹은 특정 음식군을 매우 싫어하거나 하찮게, 값싸게 보는 사람은, 특정인 혹은 특정 인종에 대해 특히 혐오하거나 가볍게, 가치 없게 볼 가능성이 꽤나 높을 것이라며, 거기에 대한 계량적-실질적 근거가 딱히 하나도 없어도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일반화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럼에도, 뜻밖에 그의 견해에 대해 미키가 고개를 끄덕이고, 상당히 맞는 말 같다며 맞장구쳐준다. 그래서 K는 미키에게 더욱 큰 호감과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다음에는 밥 먹자며 처음으로 카페 라이브를 벗어난 시간과 장소에서 약속을 정한다.

그러나 밥 먹는 게 쉽지 않다. 긴급한 상황이라며 다음에 시간을 내겠다는 문자 메시지다. K는 한정식 집 예약을 취소한다. K 역시 기자 생활을 할 때 이렇게 약속을 깨거나 상황이 매우 나빴을 경우 연락도 못하고 상대방을 바람맞히기 일쑤였다. 예상치 못한 돌발변수, 대부분 좋은 일이 아니라 나쁜 일, 그것도 중대한 일이 발생할 경우 기자라는 직업은 더럽다. 그것을 지켜보고 펜을 굴려 기사를 작성하거나 카메라를 들이대 '그림'과 '소리'를 따와야만 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깨끗이 면도도 하고, 말끔히 차려 입은 옷차림이 머쓱하다. 실망감과 궁금증을 안고 옷을 갈아입는다. 아직 마감하지 못한 글을 끄적이기 위해 데스크 탑을 켠다. 인터넷에서 뉴스가 빗발친다. 보통명사가 된 지 오래된 '수요집회', 정식 명칭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현장에서 사달이 났다. 일본 사회단체 인사들과 학자, 종교인들이 일본의 과거 위안부 강제 동원에 대해 참회하고 사죄하는 행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였다. 일단의 일본 극우 인물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폭언은 물론 폭행까지 일삼아 여러 사람들이 다쳤다는 소식이다.

경찰은 현장에서 5명의 일본인을 붙잡아 조사를 벌였는데 이들을 모두 강제 추방하기로 결정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그러자 국내 사회단체들은 물론 정치권까지 벌떼 같이 일어났다. 한국에서 범죄를 저지른 극우 일본인들을 처벌하지 않고 그냥 돌려보내는 행태는 주권을 포기한 처사라며 맹공을 퍼부었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자리 잡은 한랭전선이 수년째인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나마 양국 간 화해를 도모해 보려는 일본 양심세력들의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참담한 사건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K는 그제서야 미키가 처했던 피치 못한 정황을 유추해 본다. 극히 개인적인 만남이 사회적인 사건에 의해 어긋난 상황이다. 사소한 일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동서고금 역사상 이와 같은 일은 끊임없이 반복돼 왔고, 앞으로도 인류가 소멸될 때까지 벌어질 일이니까 말이다.

개인이 모여서 지역과 사회, 그리고 국가를 이루고 산다. 사람 사는 곳에서 개인의 다툼이 일어나고, 커지면 떼로 몰려 지역간-계층간 갈등이, 그리고 국가간 혹은 국가들의 연합이나 동맹간 전쟁이 발생한다. 개인간 싸움에서는 물론 그 싸움의 원인이 경제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이념적-종교적인 것이든 그것의 폐해는 결국 온통 개인에게 돌아간다.

마침내 이처럼 일개 개인의 소박한 약속이나 감정, 혹은 이념, 심지어 가정을 깨뜨리는 것부터 '모든 개인의 생명을 포함한 모든 것'을 부숴 버리고야 마는 부족간-국가간 전쟁 혹은 세계대전을 우리는 숱하게 겪어오지 않았는가. 하지만 또 어쩌겠는가. 자신의 생명, 가족 지키자고, 혹은 남을 발아래 두려는 탐욕스러운 힘 키우자고 개인이 만들어낸 그들의 굴레가 아닌가.

그렇다고 해도 K에게 이번 일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한참 잘못된 일이다. 몇몇 사람들이 법적-윤리적으로 허락된 행동으로 자신들의 양심을 표현한 데 대해 집단적으로 위력을 행사해 막으려한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만행,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것도 자신들의 나라가 아닌 이웃 나라 수도 한복판까지 와서 물의를 빚었다는 것은 민망할 지경이다.

하지만 전대미문이나 미증유의 일은 아니다. 별반 새롭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교민사회에서도 이념적 편차에 따라 친정부-반정부 시위대의 조우가 간혹 있다. 의사 표현의 자유를 현실에서 내보이기 위해서 맞닥뜨린 경우다. 그래도 아직까지 그들의 대놓고 하는 폭력적 충돌은 본 적이 없다. 최소한 자신의 자유를 위해 상대의 자유를 폭력으로 부정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K가 지금까지 만나본 일본인들은 대체로, 아니 거의 모두 예의바르고, 합리적이며 온순한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일본인들의 '혼네'와 '다테마에'로 솔직하게 자신들의 감정과 의향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도 그렇다. 최소한 인간으로서 인간에 대해 느끼는 호불호 감정까지는 모두 감출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일본인들을 만나는 것에 대해 불쾌나 비호감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미키를 만난 다음부터 K는 일본인, 일본에 대해 더 알아간다는 의미는 물론 더 큰 애정을 갖게 됐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날 늦은 저녁 K는 미키를 만난다. 둘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카페 라이브에서 가까운 와인바 '신 포도'를 택했다. K에게 미키가 '신 포도'가 아니기를 바라면서였다. 아직 식사를 하지 않은 미키를 위해 피자를 주문하면서, 어떤 피자를 좋아하는지 묻는다.

"포테이토 피자로 주세요. 포테이토 피자야 말로 레드 와인이나 화이트 와인은 물론 조금 독한 셰리 와인과도 잘 어울리죠. 저녁 식사대용으로도 일품이고요."

미키는 평소와 달리 조금 들떠 있다. 그것도 무엇인가 좋은 일이 있는 것처럼 재잘거린다. 먼저 약속을 미룬 데 대해 짧게 설명했다. K가 예상했던 대로 일본인 폭력 사태 취재 때문이었다. 문제가 된 사람들은 일본에서 몸에 화려한 문신을 새기고 다니는 야쿠자 조직원들이란다. 전 세계 어느 곳에서나 어두운 곳에는 폭력조직이 있지만 야쿠자는 그 역사가 조금 독특하다. 일본 제국주의가 꽃피어나기 전인 19세기 말부터 정치권과 결탁한 '기업형 폭력조직'으로 다른 나라, 특히 한국이나 중국을 밑바닥부터 침탈하는 첨병 노릇을 곧잘 해 왔고, 오늘날까지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

"일본 방송에서는 유일하게 현장을 취재해 전 일본에 저의 리포트가 방송됐어요. 본사에서 칭찬도 받았고요."

미키가 그 사태에 즉각 대응해서 특종 취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주한 대사관의 법무서기관인 오하라가 귀띔을 해줬기 때문이다. 오하라는 검사로서 한국에 파견돼 있고, 검찰 공식라인이 아닌 내부 지인으로부터 일단의 야쿠자가 입국했으니 주시해 보는 게 어떻겠냐는 연락을 받았다. 혹시 문제가 될 경우 이에 대해 설명을 해줄 '채널'이 필요했고, 지인이 언급했던 미키를 섭외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야쿠자들은 각본에 맞춰서 연기를 하는 것처럼 사건을 의도적으로 일으켰다. 그리고 그 과정이나 내용이 어떻든 미키는 통신이나 신문, 그리고 방송 등 미디어를 통틀어 '유일-최초'라는 특종을 잡았다. 방송기자로서 뛸 듯이 기뻐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이상했던 점은 폭력 현장에서는 물론 나중에 연행됐다가 풀려날 때도 그들이 마치 연예인처럼 행동했다는 점이에요. 보통 범죄를 저지르면 얼굴을 가리든지 아니면 카메라를 피하는데 오히려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였어요."

사실 당연한 일이다. 일본 야쿠자 조직원들이 한국에 와서 같은 일본인들을 돈이나 이권 문제가 아닌 일로 폭행한다는 것은 폭력조직의 현업과는 무관하다. 이같은 조직의 국제적 움직임은 '오야붕'의 명령 아니면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자신들의 '활약'을 극대화시켜 TV 화면에 많이, 그리고 크게 잡히면 잡힐수록 조직에서 입지가 커지는 만큼 뉴스라는 합법적인 '홍보 수단'을 최대한 활용한 것이다. 결국 어쩌면 미키는 이들에게 이용당한 셈이 된다. K는 미키에게 이번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폭력은 무슨 이유에서도 용납될 수 없어요. 무조건 가해자들이 잘못한 것이죠. 그런데 역사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잘 모르겠어요. 어떤 게 옳은 것인지, 어떤 게 잘못된 것인지."

일본의 엘리트층에 속하면서 한국에 와서 방송기자 생활을 하는 미키가 이 정도다. 어쩌면 미키의 상황이 대다수 일본인들의 역사 인식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제대로 가르쳐 준 적이 없고, 따라서 제대로 배울 수도 없는 환경에서 역사를 제대로 바라보거나 알기는 힘든 일이다.

어릴 적 아이들은 부모와 자신이 속해 있는 세상이 모두인 것으로 안다. 그러다가 차츰 커 가면서 부모가 얼마나 작고 자신의 세계가 얼마나 좁은 것인지 알게 된다.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다양한 정보를 얻고,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창문 밖 세상을 쳐다볼 수 있다면 말이다. 그렇다고 부모에 대한 애정이나 자신감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부모를 통해 배우고, 학교와 사회를 거치면서 모르던 것도 알아가고, 그래서 성인이 된다. 부모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그 잘못을 자신이 저지르지 않겠다고 다짐하면 된다.

미키에게 역사문제, 특히 일본의 한국 침략이라는 현대사 문제는 관심 밖일 수도 있다는 것이 K 생각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갖춰야 할 도덕적-윤리적 덕목도 아니다. 다만 자기가 좋아하는 이가 알아줬으면 하는 혼자만의 바람일 뿐이다. 모르는 이에 대한 연민은 있어도 그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강요한다는 것 자체도 일종의 폭력이다. 적어도 현재 K에게는 연애는 연애, 그 자체로서 빛나는, 인간에게 신이 내려준 축복이다.

포테이토 피자가 나왔다. 피자 도우가 적당히 구워진, 향긋한 모짜렐라 치즈 냄새에 잘 익은 감자의 향내가 군침을 돌게 한다. K가 잘라 권하자마자 시장했던 미키는 피자 한 조각을 들고 맛있게 베어 문다. 그러나 맛 볼 틈도 없이 미키는 귀여운 얼굴을 찌푸린다. 너무 뜨거워서다. 순간적으로 K는 물을 권한다. 얼마나 뜨거웠는지 눈물 한 방울 쏙 빼는 미키의 모습이 너무 예쁘다.

냅킨으로 눈물을 닦아주며 K는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춘다. 그녀에게서 도우 냄새, 치즈향, 구운 감자 내음이 동시에 피어오른다. 첫 키스라면 첫 키스다. 향기로운 현기증이 난다. 그 현기증은 어느새 달콤한 건포도 맛에, 약간의 체리향도 풍기는, 그리고 아득히 쓴 맛도 깔려 있는 '깔리나 까베르네 소비뇽'으로 이어진다. '안데스 산맥의 아침 이슬'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 칠레산 와인은 촉촉이 그들의 밤을 적시면서 새 날을 재촉한다.

(*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태그:#DONKEY9, #야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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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Bella Vita! 인생은 아름답다며, 글쓰기로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여러분의 이웃입니다. 세계일보, 머니투데이, 한경비즈니스, 이코노미조선 등에서 기자로 일했습니다. 2019년 '아산문학' 공모전에서 '그는 제바닷타였을까'라는 단편소설로 대상을 받고, 전업작가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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