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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으라."

어릴 때 할머니를 따라갔던 도시에 있는 친척 집이 생각납니다. 친척 아주머니께서 해 주셨던 계란말이도 신기했고, 지금은 오디오라 불리는 전축도 신기했습니다. 제일 신기했던 것은 수세식 화장실이었습니다. 좌변기가 아닌 그냥 일반적인 동양식 수세식 변기였는데 물이 고여 있는 하얀 변기가 어쩌면 그리 신기하던지요. 어린 마음에 그 수세식 변기 물을 내리고 또 내리고… 친척집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물건을 만져보고 하는데 할머니가 나지막이 말씀하셨습니다.

"호야! 가만히 있어라."

여느 아이들처럼 장난스럽지 않고 점잖은 아이로 인정받던 저에게도 할머니는 가만히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렇듯 어른들은 항상 아이들에게 가만히 있기를 강요했습니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가만히 있기를 바랐고, 혼자 방에 있을 때도 가만히 놀기를 바랐습니다. 밥 먹으라고 하면 밥을 먹기를 바랐고, 공부하라고 하면 공부를 하기를 바랐습니다. 20살 언저리 나이까지 아이들은 항상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29일 오후 서울역광장에서 '세월호참사 500일 추모 국민대회'가 유가족과 시민 수천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참가자들은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미수습자 9명을 가족품으로" "세월호특조위 탄압중단" 등의 구호를 외치며 광화문광장까지 거리행진을 벌였다.
▲ 세월호참사 500일 추모국민대회 29일 오후 서울역광장에서 '세월호참사 500일 추모 국민대회'가 유가족과 시민 수천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참가자들은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미수습자 9명을 가족품으로" "세월호특조위 탄압중단" 등의 구호를 외치며 광화문광장까지 거리행진을 벌였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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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하니 제자리에 가만히 있으십시오."

이미 선장과 승무원들이 도망간 침몰하는 세월호 안에서 지옥의 소리처럼 방송되던 "가만히 있으라"는 어른의 목소리에 그 착한 아이들은 그렇게 말을 듣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이 시키고 그 말을 듣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래야 착한 아이라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던 단원고 학생들은 그렇게 가만히 차오르는 물처럼 죽음의 경계선을 가만히 맞이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짧은 역사를 보면 민주화의 선봉에는 항상 아이들과 20대 대학생들이 있었습니다. 4.19의 도화선이 된 마산의 김주열 열사는 18살의 고등학생이었고, 1980년대 후반 민주화운동의 상징 박종철, 이한열 열사는 20대 초반의 대학생들이었습니다.

그 선배들이 어릴 때 대한민국 성장기의 어른들은 먹고살기 바빠서 지금의 어른들처럼 아이들에게 지나친 간섭과 가만히 있음의 강요를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끼리 뛰어놀고, 아이들끼리 공부하고, 커서 대학생이 되면 스스로 책을 읽고 세상을 판단하고 가치관을 확립했습니다. 부조리한 세상에 저항하고 스스로 목소리를 내면서 거리로 뛰쳐나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싸웠습니다.

정의로운 전체의 사회보다 개인의 이익이 점점 중요시되고 IMF 사태라는 초유의 경제위기를 경험한 어른세대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가만히 있으라"의 가치를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공부해라, 떠들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 몸에 해로우니 먹지 마라, 나쁜 친구는 사귀지 마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할 시기에 스스로 판단할 힘을 빼앗아간 어른들은 그것이 아이들이 잘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른들의 "가만히 있으라"는 부질없는 외침에 조용히 세월호 선실 안에서 죽음을 맞이한 그 아이들은 어쩌면 미친 세상과 그 세상 안의 어른들이 만든 슬픈 피조물일지 모릅니다.

후진국 대한민국을 정의로운 대한민국으로 만드는 길

지난 29일 오후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참사 500일 추모합창문화제'가 유가족과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 세월호참사 500일 추모합창문화제 지난 29일 오후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참사 500일 추모합창문화제'가 유가족과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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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문호 푸시킨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노여워하지 마라"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들으니 세상과 그에 따른 내 삶이 나를 속여도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자는 의미보다는 언젠가 좋은 세상이 올 것이니 어른들의 말에 그냥 따르고 가만히 있으라는 메시지로 들려 화가 납니다. 어느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의 제목은 어차피 청춘들은 힘든 시기니까 그냥 참고 가만히 견디라는 소리로 들려 화가 납니다.

세상이 속여도 참고 어른들이 가만히 있으라고 하니 가만히 있은 결과가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어른들이 강요한 "가만히 있으라"의 가치는 피워보지도 못한 청춘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후진국형 재난사고, 후진국형 위기관리 시스템…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후진국형"이 아니라 그냥 "후진국"입니다. 이런 대한민국이 정의롭지 못해 정의롭지 못하다고 외치면 종북이니 빨갱이라고 손가락질 당하고, 안녕한 대한민국에 살고 싶다고 외치면 어린놈이 뭘 아냐고 무시당하는 세상이 300여명을 죽인 것입니다.

지난 8월 28일은 세월호 참사 500일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얼마 전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단체의 500일 행사가 끝나자 정부당국은 유가족에게 보상금을 받아가라는 문자를 보냈다고 합니다. 참사의 진실을 조사해서 책임자를 처벌하고 재발을 막자는 유가족과 시민들의 이런 상식적인 요구는 철저히 무시되고 정부는 돈으로만 사태를 해결하려 하고 이제는 언론조차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세상입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움직여야 정의로운 세상, 아니 최소한 억울한 죽음이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주권자인 국민이 그 주권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인 선거가 다가옵니다. 또 다시 정치권은 자기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선거법 개정에 사활을 걸고 선거에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역량을 집중할 것입니다.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정부나 정치권은 우리를 쳐다보지 않습니다. 세상의 변화는 내가 움직이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후진국 대한민국을 선진국 대한민국이 아니라 정의로운 대한민국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태그:#세월호, #가만히 있으라, #50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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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에 행복과 미소가 담긴 글을 쓰고 싶습니다. 대구에 사는 시민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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