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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굴이 요리 하니까 달걀말이도 하트. 남편과 제굴이가 차린 밥상.
 제굴이 요리 하니까 달걀말이도 하트. 남편과 제굴이가 차린 밥상.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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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굴을 낳은 지 16년 1개월 20일, 나는 아직 '강제굴 천재설'에 미련이 있다. 때때로 휘말린다. 이번 여름방학에도 그랬다. 제굴은 하루 13시간씩 잤다. 밥하고 먹고 치우는 데 5시간, 열 살 차이 나는 동생 꽃차남이랑 기본 1시간씩은 싸웠다. 매사에 유유자적한 성품인데 시간을 쪼개서 게임 <하스스톤>을 했다. 25등급에서 시작했는데 10등급이 됐단다.

"엄마! 나 <하스스톤> 상위 9%예요. 단시간에 이렇게 하는 거는 진짜 대단한 거예요."
"역시, 나는 천재를 낳은 거였어. 이거 축하할 일 맞지?"
"대충은요. 1등급까지 하고 나면 그 위가 '전설'이에요. 그거 되면, 나 밥 안 해요. 근데 '전설'까지는 절대로 못 가요. 그 말은 즉, 나는 요리를 계속해야 해요."

게임 속 '전설'되면 요리 안 하겠다는 아들

제굴이는 육식인. 고기로 음식할 때 냄새까지 좋단다. 나는 그렇지 않다….^^;;
 제굴이는 육식인. 고기로 음식할 때 냄새까지 좋단다. 나는 그렇지 않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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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굴은 기름을 안 쓰고 오븐에 오징어 튀김을 했다. 맘에 안 드는지 "역시, 튀김은 펄펄 끓는 기름에 넣고 튀기는 게 진리야"라고 했다. 비 오는 토요일 오후, 우리 집 위층에 사는 시후(꽃차남 친구) 엄마가 가져온 해물파전을 보고는 모양도 예쁘고, 맛도 좋다며 감탄했다. 다음 날부터 며칠 간격으로 해물파전을 만들었다. 생각보다 잘되지 않는다고 침울해졌다.

냉장고를 뒤져보던 제굴은 냉동실에 쟁여놓은 블루베리를 보고 환호했다. "엄마가 직접 이렇게 많이 사놨어요?"하며 나를 치켜세워줬다. 제굴은 고등학교 입학 전에 1주일간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테이블 닦고, 바닥 쓸고, 야외 테라스 정리하는 게 주 업무였지만 주방도 들어갔다. 음료 만들 때 요구르트 파우더 쓰는 것을 눈여겨본 모양이었다.

"집에 블루베리가 있으니까 자연드림(생협) 가서 요구르트 파우더를 샀어요. 사 먹는 것보다 훨씬 맛있잖아요. 그때 생각났어요. 내가 초등학교 때 요리책을 자주 읽었잖아요. 아이스크림도 만들어보고 싶었고요. 이번에 보니까 요구르트 파우더 1컵, 우유 4컵 해서 냉동실에 두고 30분에 한 번씩 저어주면 아이스크림이 된대요. 저는 블루베리로 만들려고 했죠."

우리 식구들은 끝내 블루베리 아이스크림을 먹지 못했다. 제굴이 만든 건 아주 차가운 셔벗 단계에서 멈춰 있었다. 남편은 그것도 좋다고 몹시 맛있게 먹었다. 제굴은 블루베리랑 요구르트 파우더가 섞이지 않고 따로 논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였을까. 아르바이트 했던 카페에서도 요구르트 음료를 만들 때는 생과일을 쓰지 않고, 과일 가루를 썼단다.

제굴은 육식인. 고기 음식을 할 때 나는 냄새도 좋아한다. 저녁밥상에 제육볶음, 돈가스, 치킨가스가 자주 올랐다. 나는 밥벌이 끝나면 처지는 편. 신선한 걸 먹고 싶다. 고기가 종류별로 있는 밥상을 보면 "아휴~" 한숨이 나오려고 한다. 혼신의 연기력으로 겨우 참아낸다. 그래서 제굴이랑 같이 음식 프로그램을 보다가 샐러드 종류가 나오면 세뇌 작업을 했다.

"제굴아, 저거야. 엄마 어릴 때 소 풀 뜯기러(먹이러) 다닌 거 알지? 그래서 소를 좋아해요. 소하고 거의 같은 수준으로 풀을 먹을 수가 있다니까!"

리액션 '오버'하게 만드는 제굴이의 솜씨

꺄아! 카프레제 샐러드. 혼자 다 먹었다.
 꺄아! 카프레제 샐러드. 혼자 다 먹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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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냉장고에는 (시)아버지가 직접 농사지은 토마토가 넉넉하게 있다. 제굴은 생협에 가서 생 모차렐라 치즈를 사서는 카프레제 샐러드를 만들었다. 꽃차남은 먹을 게 없다고 할 게 뻔해서 쇠고기 등심을 구웠다. 끓는 물에 레몬즙을 뿌려서 새우를 탱글탱글하게 익혔다. 등심 위에 반투명 색깔이 된 새우를 올리고, 직접 만든 잣 소스를 뿌렸다. 나는 '오버'했다.

"꺅! 완전 맛있어. (하지도 않을 거면서) 이거 어떻게 한 거야?"
"옛날부터 내가 디자인 한 음식이 몇 개 있어요. (웃음) 근데 안 알려줘 줄 거예요. 엄마가 산업 스파이일 수도 있으니까. 내 기밀을 훔쳐서 몰래 도망갈 수 있잖아요. <스펀지밥>에 나오는 플랑크톤도 그랬어요."

8월 17일, 개학! 좋은 시절은 끝났다. 제굴은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 일찍 일어나서 혼자 밥을 차려 먹었다. 오전 7시 27분에 카풀 버스를 탔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 책을 읽으면 눈이 나빠지니까 스마트폰으로 만화 영화 <심슨>을 봤다.^^ 친구들은 방학 때도 학교에 나와 보충수업을 했다. 혼자만 집에서 보낸 제굴, 교실에 들어가면서 잠깐 머쓱했다.

학교는 공부만 하는 곳이 아니다. 교과서 공부에 흥미를 못 느끼는 제굴은 금방 잔재미를 찾았다. 휴대전화도 없이 고등학생이 된 제굴은 이제 스마트폰이 있다. 아침 조회 시간 직전과 쉬는 시간 틈틈이 '하스스톤' 게임을 했다. 점심시간에는 넉넉잡아서 20분 정도 게임을 할 수 있다. 오, 예! 집에서 내려받아 간 웹툰까지 볼 수 있다.

"둘째 날도 혼자 일어나서 밥 차려 먹었어요. 엄마한테 아침에 푹 자라고 말까지 했는데. 그러면 뭐해요? 작심삼일. 사흘째 되니까 엄마가 깨워도 못 일어났잖아요. 카풀 버스도 놓쳐서 아빠가 태워다 주고요."
"작심삼일도 좋은 거야. 또 결심하면 되잖아. 근데 제굴아, 음식 하는 건 왜 작심삼일이 아니야? 다른 것 해도 돼. 힘들잖아."
"다른 거 뭐요? 공부는 아니야. 재미없어요. 내가 잘하는 건 요리밖에 없어요. 지금은요."

남편이 차린 밥상. 육식과 채식의 조화.^^
 남편이 차린 밥상. 육식과 채식의 조화.^^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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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0일 목요일, 남편이 일찍 퇴근했다. 제굴과 꽃차남이 환호했다. 나는 아이들한테 짜증을 좀 낸다. 남편은 안 그런다. 나는 아이들에게 텔레비전도 인터넷도 제한한다. 심심한 두 아들은 많이 싸운다. 남편은 게임도 하라고 하고, 만화도 보여준다. 항상 음식까지 만든다. 그러니 <마법천자문>을 보는 꽃차남은 나한테 "엄할 엄! 마귀 마! 엄마"라고 한다.

그날은 내가 영어 학원에 가는 날. 아빠가 있으니까, 꽃차남은 내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지 않았다. 나는 기분 좋게 공부하고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남편은 나를 보자마자 하소연을 했다. 고운 표현을 하자면 그렇다. 나한테 꼬치꼬치 제굴의 태도를 일러바쳤다. 그걸 본 제굴은 "아빠하고는 말이 안 통한다고요!"하고는 제 방으로 갔다. 문을 닫았다. 쾅!

선생님의 제안, 그리고 쓰게 된 비밀 '노트'

담임 윤용호 선생님의 제안으로 쓰게 된 레시피 노트. 시간을 쏟은 만큼 소중해진다.
 담임 윤용호 선생님의 제안으로 쓰게 된 레시피 노트. 시간을 쏟은 만큼 소중해진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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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기 때, 제굴의 담임 윤용호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영어로 글을 쓰라고 했다. 일일이 잘못 쓴 부분을 고쳐주었다(교과목 영어 아님). 제굴은 요리 레시피를 일주일에 두세 편쯤 썼다. 방학 때는 요리법 열한 편을 썼다. 남편은 살짝 감격해서 "우리 아들 잘하네"라고 했다. 제굴과 토론 끝에 일주일에 다섯 편의 조리법을 쓰고, 책 한 권을 읽자고 정했다.

"개학하니까 당연히 담임선생님 일이 많지. 영어 노트도 검사 못하시고요. 노트가 선생님께 있으니까 레시피를 못 쓰는 거예요. 아빠는 다른 데다 써서 레시피 노트에 붙이래요. 그러기 싫어. 내가 최초로 노트에 뭘 적는 거예요. 중학교 내내 앞에 몇 장 쓰고, 그거 찢어내고 그랬어요. 요리 레시피 노트는 내 분신이야. 선생님이 노트 주면 다 쓸 거라고요."

경축! 내 마음속에서는 축포가 터졌다. <어린 왕자>에서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네 장미를 소중하게 만든 것은 네가 장미에게 쓴 시간 때문이란다"라고 말한다. 자기만의 노트를 소중하게 여기게 된 제굴은 그 뜻을 알게 된 셈. 하루에도 몇 번씩 제굴과 싸우는 나는 제굴 편을 들었다. 남편을 설득했다. 남편은 "알았어"라고 말했다.

나는 제굴 침대로 갔다. "엄마는 네 편이야"라면서 점수부터 땄다. 제굴은 영어로 레시피를 쓰는 게 어렵다고 했다. 표현하고 싶은 걸 다 담지 못하겠다고. 나는 "레시피 노트가 진짜 네 분신이 되게 하려면, 한 면에는 한글로 자세히 써. 선생님께 보여주는 영어는 그대로 쓰고"라고 의견을 냈다. 제굴은 "그래염"이라고 대답했다.

화가 누그러진 제굴은 거실로 나왔다. 아빠한테 치킨 먹고 싶다고 했다. 남편은 "그럼 시켜야지"라고 했다. 나는 우리 집안의 불화 덩어리. 대화합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육감적인' 몸매를 가진 남편과 아들에게 현실을 일깨워줬다.

"살쪄!"

일요일 아침, 제굴이가 게임 <하스스톤>을 포기하고 차린 밥상. 많이 고맙다.
 일요일 아침, 제굴이가 게임 <하스스톤>을 포기하고 차린 밥상. 많이 고맙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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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굴이가 만든 닭 가슴살 튀김.
 제굴이가 만든 닭 가슴살 튀김.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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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1일 금요일, 제굴은 학교 끝나고 오면서 닭 가슴살(제굴은 퍽퍽한 맛을 좋아함)을 샀다. 소금, 후추, 바질을 뿌려 밑간을 했다. 냉장고에 좀 놔뒀다가 튀김옷을 입혀서 튀겼다. 넉넉하게 해서는 시후 네 집에도 보냈다. 놀러 와 있던, 젊고 예쁜 시후 엄마 친구들도 먹었다. 그녀들은 "부드럽고 맛있어요, 요리사 가능성이 커요"라고 말했다.

8월 22일 토요일, 제굴은 아침 일찍 일어났다. 밥도 안 먹고 나갔다. <무한도전> 하기 직전에야 들어왔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쏘다니는지, 다 알고 싶지 않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 피(시)방일 것 같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제굴은 스마트폰으로 자신의 <하스스톤> 계급을 보여주었다. 그게 뭐라고, 으쓱하는 게 귀엽긴 했다.

일요일, 우리 집은 아점을 먹는다. 아이들은 일어나자마자 하고 싶은 걸 한다. 제굴은 <하스스톤>. 꽃차남은 텔레비전 만화. 우리 부부는 성당에 간다. 남편은 돌아오자마자 밥을 한다. 8월 23일은 달랐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맛있는 냄새가 났다. 제굴이가 밥상을 차려놓았다. 주메뉴는 닭 가슴살 튀김. 고맙고 감격스러웠다. 맛있게 먹었다. 제굴은 말했다.

"일요일 아침에 게임을 포기하는 건 엄청나게 큰일이에요. 근데 아빠가 밥하는 거 덜어주고도 싶고. 나도 치킨 먹고도 싶고. 그래서 밥 차린 거예요."

○ 편집ㅣ곽우신 기자



태그:#야자 대신 저녁밥 하는 고딩 아들, #하스스톤, #일요일 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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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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