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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자 평화 일구고 멍청한 자 전쟁 부추긴다.'

이명박 정부 당시, 전쟁 위기가 고조될 때마다 청와대 게시판에 들어가 반복적으로 썼던 글의 제목이다. 지난 8월 12일 한국을 떠나 미국에 '평화어머니' 자격으로 시위를 하러 들어온 지 열흘째. 백악관 앞에서 9차 피켓시위를, 펜타곤 앞에서 4차 피켓시위를 진행했다. 페이스북에 그날그날의 스케치를 올리면서 저 구호를 다시 떠올렸다. 전쟁은 탐욕스럽고 멍청한 자들이 일으키는 것, 맞다.

2010년 반세기 넘게 살던 서울을 떠나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모시고 갑사동네에 살다가 어머니를 보내드렸다. 그 후 2012년 명상공동체를 일구기 위해 옥천군 청산면 산속에 한의원을 짓고 이사한 뒤 명상치유 한의사로 지냈다.

365일 달라지는 창밖의 모습, 365일 달라지는 새소리, 365일 달라지는 닭과 병아리 가족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 자신과 주변 존재들이 본디 하늘의 모습인 무한 자유, 무한 평화, 무한 사랑을 닮아가도록 스스로의 영성을 키울 수 있게 되기를 희망했다.

내가 사는 청산면이 이런 곳이었다니

1894년 동학혁명 기포를 결정한 곳-청산현(거포리)의 해월 사위 김연국의 집
▲ 청산 답사중 1894년 동학혁명 기포를 결정한 곳-청산현(거포리)의 해월 사위 김연국의 집
ⓒ 고은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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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내 여생을 살게 될 청산면이 1894년 동학혁명 당시 해월 최시형을 비롯한 동학의 지도부가 살면서 봉기를 선포한 역사적인 곳일 줄이야. 그곳에서 일어난 해월의 딸 최윤과 그녀가 낳은 아들 정순철을 둘러싼 사건들을 그냥 묻어버리고 지나칠 수 없었다.

내 인생에서 만나게 되는 사건과 인연들은 언제나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빈틈없이 맞물리지 않던가. 그래서 동학다큐소설을 쓰게 됐다. 그런데 소설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판이 커져 15명의 여성들과 함께 13권의 소설을 쓰게 됐다.

2014년은 꼬박 소설작업을 하며 보냈다. 이것도 하늘의 뜻이리라. 엄청난 자료와 엄청난 공부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을 다큐소설에 녹여 쓰는 일은 대단히 큰 보람을 안겨줬다. 소설 작업을 통해 깨달은 한 가지를 꼽으라면 나는 서슴없이 말할 수 있다. '무기는 인간의 탐욕을 부추기며 함께 멸망을 맞게 한다'는 것이다. 일본은 신식 무기로 조선의 동학도 수만 명을 삽시간에 죽이고 조선반도를 손아귀에 넣고는 이어서 1945년 패망까지 아시아에서 2000만 명을 살해했다.

소설을 마치면 조용히 살리라는 계획은 소설을 쓰는 동안 바뀌게 됐다. '죽기 전까지 세상의 모든 무기산업을 없애는 일에 매진하리라.' 불가능할 것 같은가? 아니다. 할 수 있다. 이미 시작했으니 절반은 한 것이나 다름없다.

무기산업을 모두 없애고 전쟁을 없애는 일은 실로 간단하다. 평화의 에너지를 키우면 된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세상의 어머니들과 어미의 마음을 공유할 수 있는 여성들이다. 세상의 어머니들을 어떻게 하면 조직할 수 있을 것인가….

평화어머니 시위의 시작

궁리하던 차에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여성들과 글로리아 스타이넘 등의 페미니스트들이 유니언 신학대학의 현경 교수와 교포 여성들과 함께 지구촌에서 가장 군사적 긴장이 집중돼 있는 DMZ를 통과, 북에서 남으로 걸어서 내려오는 행사를 벌인다는 것이었다. 

지난 5월 24일 친구들과 파주로 달려가 북에서 내려오는 그녀들을 맞으며 나는 여성이야말로 무기산업을 문 닫게 하고 세상의 전쟁을 없앨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됐다.

그들은 9.11이후 부시가 내린 테러경보 '코드 레드'에 맞서 2002년 미국의 전쟁개입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기 위해 조직된 '코드 핑크'를 비롯, 이미 전쟁에 맞서 평화를 외치는 활동을 해 온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세계 여성의 연대 가능성을 확인해줬다.

미국에서 탄저균을 들여와 한국민도 모르게 실험을 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 직후 나는 뜻을 가진 주변의 어머니들을 모아 6월 25일부터 광화문 미 대사관 앞에서 평화어머니 피켓 시위를 시작했다. 남북 화목하게 살기 위한 적극적 노력을 하게 될 평화어머니의 시위 날은 매주 화·목요일로 정했다.

양쪽 군사 모두 어머니 자식
우방인줄 알았더니 무기 장사꾼
무기 없는 세상 어머니 손으로
탄저균 가지고 미군은 떠나라!
비싼 전쟁 말고 싼 평화를!
중단하라 전쟁과 무기생산!
평화협정 지금 하라!

우리는 대사관보다 이야기를 더욱 확실하게 전달할 수 있는 곳으로 백악관과 펜타곤을 선택했다. 록히드 마틴과 보잉사와 같은 무기제조회사에도 우리의 뜻을 전해야 하리라. 그래서 돈도 없는 평화어머니 둘은(가서 죽어도 좋다며 내게 매달린 권은숙은 여성동학다큐소설의 작가이자 총무다, 오랫동안 장애우인권운동을 했다)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텐트 치고 밥해 먹으며 최소한의 돈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얻어야 한다. 간장, 고추장, 된장, 고춧가루, 액젓, 소금 그리고 마른 반찬들을 준비했다. 워싱턴 근교의 캠핑 가능한 공원 안에 텐트를 치고 도시락을 싸가지고 매일 하루도 쉬지 않고 백악관에 피켓시위를 나간 지 9일째. 며칠 전부터는 오후 퇴근시간에 맞춰 펜타곤에도 진출했다.

'왜 미국이 통일 걸림돌인가' 묻는 미국인

미 백악관 앞에서 피켓시위를 하는 모습.
 미 백악관 앞에서 피켓시위를 하는 모습.
ⓒ 고은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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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 앞은 전 세계에서 관광을 오는 사람들로 늘 북적인다. 경찰이 가끔 집적거리기는 하지만 보도 아래 차도에서 하는 시위는 25인 이하일 경우 사전 신고 없이 얼마든지 자유롭게 할 수 있다. 피켓시위 9일째 우리는 백악관 정면 차도를 차지했다.

처음에는 부동자세로 피켓을 들었지만 차츰 익숙해지면서 피켓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들은 '어디에서 왔는가?'라고 물었고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눴다. 한국에 아직도 미군이 남아있느냐고 묻는 독일인을 만났다. '왜 미국이 통일에 걸림돌이 되고 있느냐'고 묻는 미국인 교사에게 우리는 이렇게 답했다.

"한국은 아직 휴전 상태이고, 종전을 위한 평화협정에 한국은 당사자가 못되고 북한과 미국이 해야 하는데 미국이 계속 평화협정을 거부하고 있다. 미국은 최근 매년 800억 원의 무기를 한국에 팔고 있으며 한국은 매년 2000억 원을 미국에 무기관련 비용으로 지불하고 있다. 한국에는 우익사고만 허용되며 좌파적 사고는 범죄행위로 간주된다. 북한에 대한 호의적 발언은 종북으로 간주돼 쉽게 이적행위로 매도되니 사상의 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분단이 극복돼야 할 이유는 수없이 많다."

우리 맞은편에는 34년 넘게 비닐로 천막을 치고 반전반핵 운동을 하는 할머니가 있다. 스페인 출신이고 이름이 콘셉시온 피시오토(72)라는 건 인터넷에서 알게 된 사실. 본인은 국적은 지구촌이며 나이는 세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미 자아는 사라지고 오로지 지구의 평화만 염원하는 성녀다. 가끔 시비를 거는 작자들이 있는데 힘들게 자리에서 일어나 악착같이 큰소리로 대꾸한다. 그러나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의자에 앉아 잠을 잔다는 조그만 체구의 그녀는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인이다. 17년째 백악관 앞에서 금요일 점심 때마다 시위를 한다는 '가톨릭 워커, 앤서'(Catholic Worker, Answer)와 같은 미국의 평화운동 단체들을 알게 됐다.

펜타곤에서의 피켓시위

펜타곤은 군사시설이라 백악관보다 시위할 수 있는 조건이 훨씬 까다롭다. 사전 허락 없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곳은 펜타곤 길 건너 굴다리 아래뿐이란다. 굴다리 아래는 차량과 소수의 사람들이 다닐 뿐이지만 관광객이 대부분인 백악관과 달리 근무자들이 대부분이므로 대단히 집중도가 높다.

반응은 상당히 다양하다. 코웃음을 치며 시가를 물고 지나가는 이도 있지만, 군복을 입고도 엄지를 치켜세우고 경적을 울리고 가거나, 엄지를 치켜세웠다가 박수를 치다가 그것도 성에 안 차는지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는 버스운전자도 있다.

'전쟁은 마약과 같아서 끊임없는 소비를 요구하며 지구생명을 망친다'(Weapons are like drugs, Consumption never ends, Destroying earth's life)라는 피켓구호를 읽으며 "Absolutely right!(완전 동감!)"이라며 엄지를 치켜세우고 가는 행인도 만났다.

경찰은 펜타곤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 위쪽의 시위 지역은 사전 허락을 받아야 하는 곳이라며 우리를 밖으로 밀어냈지만 가톨릭 워커 단체는 28년 동안 그곳에서 매주 월요일 허락 없이 피켓시위를 하고 있다며 우리에게 합류하자고 했다.

아이고 이게 무슨 횡재람. 당연히 이번 월요일(24일)에는 오전 7시부터 그들과 함께 펜타곤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게 됐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펜타곤으로 출근하는 그들 하나 하나의 심장에 우리 평화어머니들의 뜻을 각인시켜 줄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펜타곤 바로 앞에 위치한 보잉사 앞에 가서도 시위할 예정이다. 로비하기 좋으라고 펜타곤 코앞에 자리를 잡은 걸까? 전쟁 만드는 것도 그만! 무기 생산도 그만!

우리는 무기를 많이 만들어내고 한국에도 제일 많이 무기를 파는 록히드 마틴사(메릴랜드 소재)에도 갈 예정이다. 평화로운 세상에서 지구를 망치지 말고 서로 사랑하며 살자는데 방해할 자 누구인가?

분단 마피아 그리고 평화 어머니

혹시 우리를 '종북'으로 몰아붙이는 세력이 있을지 모르겠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긴 있다. 지난 5월 24일 여성평화걷기(Woman Cross DMZ) 행사 때에도 '종북 여성들이 참여하니 한국정부는 그녀들의 입국을 불허하라'는 주장을 한 이가 있었다. 대표적인 '분단 마피아' 이동복이 바로 그다.

그는 1973년부터 1978년까지 중앙정보부에서 근무했고, 1979년 박정희 사후에 삼성에서 7년을 근무했다. 노태우 정부 시절(1988~1993), 그는 다시 안기부(중앙정보부)장 특보로 일했는데 1992년 9월 북에서 열린 8차 남북 고위급회담 당시 남쪽 대표단 대변인으로 참가했다. 그때 그는 '대통령 훈령 조작사건'의 중심인물로 거론됐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임기 말이었는데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단 사업의 정례화 등 대단히 적극적인 남북소통정책을 추진했다. 그런데 대표단의 대변인인 이동복은 원본을 파기하고 서류를 조작했다. 목표는 남북관계 냉각이었다.

감사원은 그의 조작사실을 입증했고 1993년 11월 그는 해임됐다. 김영삼 정부에서 통일부장관을 지냈던 한완상은 강경수구 세력이 자기 목적을 위해 얼마나 대담하게 불법과 편법을 자유로이 활용하는지 놀랐다고 술회했다.

이동복의 대통령 훈령조작사건은 남북긴장관계 조성을 통해 다음 대선에 보수정권을 탄생시키려는 의도로 벌어진 일이었다는 세간의 평이 있다. 운 좋게 감옥행을 피한 그는 그 후에도 6.15 공동선언문 폐기를 주장하고 남북관계를 악화시키는 일에 힘을 썼다.

나는 이런 자들을 '분단 마피아'라고 부른다. 그 외에도 분단으로 재미를 보는 무기장사꾼, 분단을 구실로 수시로 국민을 공포로 몰아넣으며 정권을 유지하려는 정치가들 역시 분단 마피아다. 나는 이들이 어둡고 습한 곳에 피는 곰팡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그런 곰팡이는 평화를 사랑하는 이들의 밝고 따뜻한 노력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평화 어머니의 활동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평화를 사랑하는 어머니들, 그 마음을 공유하는 여성 모두의 건투를 빈다.


태그:#평화어머니, #미국원정기, #고은광순, #권은숙, #백악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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