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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겹게 만든 빵을 전할 곳을 찾기도 쉽지가 않다. 우리네 상식과 네팔사람들에 상식은 너무나 다르다. 그것을 사람들은 문화적 차이라 한다. 내가 하는 일은 그런 문화적 차이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면 단 하루도 제대로 할 수 없다. 도움을 주고자 발버둥 치는 느낌에 답답해지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총파업에 화상까지... 그래도 출발했다

다친 팔은 고통이 매우 심한 화상이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지, 거리는 총파업으로 텅비었고 상가도 대부분 문을 닫았다. 그중에 한국으로 시집간 누이를 생각하며 우리 가게를 찾은 네팔인 오빠도 맞아야 했다.
▲ 다친 팔로도 멈출 수 없는 일 다친 팔은 고통이 매우 심한 화상이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지, 거리는 총파업으로 텅비었고 상가도 대부분 문을 닫았다. 그중에 한국으로 시집간 누이를 생각하며 우리 가게를 찾은 네팔인 오빠도 맞아야 했다.
ⓒ 김형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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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15일)에 우리 부부는 다딩(Dhading)이라는 곳을 방문할 계획이었다. 출발 이틀 전부터 500여 봉지의 빵을 생산해서 전날 밤까지 포장을 모두 마쳤다. 그러나 늦은 밤 비보가 들려왔다. 또다시 악명 높은 네팔 번다(네팔 총파업)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연이어 이틀간 계획되어 월요일(16일)까지 이어진다.

사실 지난주 팔에 심한 화상을 입은 탓에 활발하게 빵을 전달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주말은 벼르고 별러서 준비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틀이나 연이어 네팔 번다(네팔 총파업)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답답한 김에 쉬어간다고, 미리 알았으니 이번에는 쉬면 된다. 참으로 오랜만에 휴식이 될 듯하다.

항상 같은 마음을 지키려고 하지만 부상으로 내가 불성실한 것처럼 느꼈다. 그런 생각에 스스로 그것을 만회하려고 했다. 그래서 정말 어려운 지역을 특별히 선정해서 택시를 전세하여 간 후 산악 지역을 걸어서 가야 하는 난코스를 선택했다.

그런데 허사가 되고 말았다. 그보다 안타까운 것은 만든 빵이 상할까 걱정이다. 그래서 고심 끝에 여전히 어려운 처지에 텐트촌 생활을 하는 랑탕 지역 피해주민을 찾기로 했다. 처음 빵 배달을 시작한 곳이다.

아내와 함께 의견을 나눈 후 황금 사원에 가자고 했다. 그리고 곧 네팔 한국문화센터 부대표 모한까르기(Mo Heon)씨와 네팔 화가 람바하두르 타다(Ram Bahadur)씨에게 급하게 전화를 연결했다. 만나서 주말에 전하지 못한 빵을 전하러 가기로 했다.

열악해진 텐트촌 상황, 빵과 옷을 전달했다

랑탕히말라야 사람들이 머무는 텐트촌을 다시 찾았다. 정확히 한 달 하고 하루되는 날이다. 동네 한바퀴를 돈 느낌이다. 그들은 더 열악한 느낌을 준다. 안타깝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빵 하나 전하는 일이다.
▲ 다시 찾은 황금사원 랑탕히말라야 사람들이 머무는 텐트촌을 다시 찾았다. 정확히 한 달 하고 하루되는 날이다. 동네 한바퀴를 돈 느낌이다. 그들은 더 열악한 느낌을 준다. 안타깝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빵 하나 전하는 일이다.
ⓒ 김형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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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사원에서 다시 만난 랑탕히말라야 사람들 그들은 더욱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국제사회와 네팔 정부의 관심이 사라져가는 현실 속에서 텐트촌에 재정도 고갈 상태로 접어든 느낌이었다.
▲ 황금사원에서 다시 만난 랑탕히말라야 사람들 황금사원에서 다시 만난 랑탕히말라야 사람들 그들은 더욱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국제사회와 네팔 정부의 관심이 사라져가는 현실 속에서 텐트촌에 재정도 고갈 상태로 접어든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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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후 3시 30분 출발해서 3시 50분경 황금 사원 텐트촌에 도착했다. 300여 봉지의 빵을 전달했다. 마침 총파업으로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아 즐겁게 받아주었다. 그들이 할 일 없이 텐트촌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졌다. 그래서 더욱 열악한 상황이 느껴졌다. 사람들의 관심은 줄고 지원은 빈약해졌다. 식사 외에 간식이 더 간절해진 듯했다.

그들은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비스킷을 좀 가져다줄 수 없느냐", "다음날은 초콜릿" 등으로 아우성을 쳤다. 짧은 말이었지만 각인된 아픔이 느껴졌다. 하지만 확답을 못 하고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발길을 돌려야 했다.

연이은 총파업이 이어진 다음 날이다. 네팔 번다로 모든 대중교통수단은 멈추었다. 빵을 만드는 장소는 정전으로 일을 멈추었다. 그 틈에 우리 부부는 며칠 전 방문했던 사쿠에 옷을 전하러 가기 위해 준비했다. 신두팔촉(Sindupalchok) 지역 지진피해자들이 머물고 있는데, 텐트촌에서 만난 임산부와 아가들을 위한 것이다.

사실 나로서는 유일한 휴식의 기회였다. 하지만 아내가 지난번 빵 배달할 때 한 약속이라면 거리가 한산할 때 다녀오자고 한다. 거리가 멀어서 다음에 가는 것보다 효과적이라, 지친 몸인데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부부는 텅 빈 도로를 드라이브 하듯이 스쿠터를 타고 갔다.

사쿠에 신두팔촉 지진피해자 텐트촌을 찾아서 새 생명을 낳은 임산부에게 여성용품을 아이들에게는 옷을 전했다. 빵을 전하지 못하는 날을 이용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 사쿠에 신두팔촉 지진피해자 텐트촌을 찾아서 사쿠에 신두팔촉 지진피해자 텐트촌을 찾아서 새 생명을 낳은 임산부에게 여성용품을 아이들에게는 옷을 전했다. 빵을 전하지 못하는 날을 이용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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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위 왼쪽 들판에 보이는 텐트촌, 그곳에 아이들이 해맑게 웃고 있다. 친구와 놀던 아이가 나마스떼라고 손을 모은다. 부끄럽다. 사진 오른쪽에 아이들은 텐트촌에서 공부에 열중이다.
▲ 텐트촌에 아이들 사진 위 왼쪽 들판에 보이는 텐트촌, 그곳에 아이들이 해맑게 웃고 있다. 친구와 놀던 아이가 나마스떼라고 손을 모은다. 부끄럽다. 사진 오른쪽에 아이들은 텐트촌에서 공부에 열중이다.
ⓒ 김형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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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에 빗방울이 떨어지고 다시 돌아오는 길에는 맑아졌다. 길은 좋지 않았지만, 작은 도움이라도 전하기 위해 찾아간 우리 부부의 발걸음은 상쾌했다. 막 아이를 출산한 임산부와 텐트촌에서 태어난 생명을 도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돕는 즐거움을 느낀 하루였다. 훌륭하게 자란 아이들이 훗날 세상에 빛이 되는 사람이 되어주기를 기원해본다.


태그:#네팔번다, 네팔총파업, #신두팔촉 지진피해자, #랑탕지역 지진피해자, #텐트촌을 찾아서, #김형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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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사람의 사막에서" 이후 세권의 시집, 2007년<히말라야,안나푸르나를 걷다>, 네팔어린이동화<무나마단의 하늘>, <길 위의 순례자>출간, 전도서출판 문화발전소대표, 격월간시와혁명발행인, 대자보편집위원 현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홈페이지sisarang.com, nekonews.com운영자, 전우크라이나 예빠토리야한글학교교사, 현재 네팔한국문화센타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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