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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지난달 31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73세. <자본론>을 국내 최초로 완역한 고 김수행 교수는 대표적인 마르크스 경제학자였습니다. 고 김수행 교수의 제자인 신현호 새정치민주연합 기획재정위원회 수석전문위원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추모글을 신 위원의 허락을 받아 싣습니다. [편집자말]
운전을 하는데, 경북대 최정규 교수가 전화를 해왔다. "현호야, 선생님 돌아가셨단다." 나는 "선생님? 누구? 어떤 선생님?"이라고 물었지만, 사실 그때 그게 김수행 교수님 얘기란 건 바로 알았다. 정규와 내가 공통으로 이름없이,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누군지 아는 분은 그 양반 한 분뿐.

워낙 큰 영향을 남기신 분이라, 많은 분들의 조사가 올라온다. 나야 중간에 공부를 접었고, 선생님의 학문이나 사회활동에 대해서는 다른 많은 제자들의 정리가 있을 테니, 개인적인 기억만 몇 토막 적어 둔다.

[1988년] 서울대 노천강당에서 수백 명이 김수행 특강을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988년도인데, 당시 서울대 경제학과 대학원생들은 신규 교수 임용시 마르크스 경제학(당시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정치경제학이라는 다소 이상한 호칭으로 불렸지만) 전공 교수를 뽑아달라는 요청과 시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마르크스 경제학을 하셨던 분들 사이에는, 마르크스 경제학자 중에서 한 분을 뽑는다면 김수행 교수님이라는 컨센서스(합의)가 있었다.

나는 당시 학부 3학년으로 경제학과 학생대표여서 대학원 선배들과 이 일과 관련해서 함께 논의했다. 그러다 학부생들 차원에서는 뭔가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고민하다가 김수행 선생님을 모시고 특강을 열기로 했다. 이것을 준비하면서 처음 뵙게 되었는데, 다른 많은 분들이 추억하는 것처럼, 아무 꾸밈이 없고 직선적이신 분이셨다.

이 특강은 지금은 사라진 서울대 버들골에 있던 노천강당을 가득 메우고 진행되어서, 행사를 준비했던 나로선 안도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이야 참 이해가 안 가는 풍경일 것이다. 야외의 땡볕에서 수백 명이 경제학 강의를 들었던 것이니.

1988년, 서울대 버들골 노천강당에서 열렸던 김수행 교수 경제학 특강
 1988년, 서울대 버들골 노천강당에서 열렸던 김수행 교수 경제학 특강
ⓒ 신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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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한 사진은 그 특강의 현장이다. 강단에 서계신 분이 김수행 선생님이시고, 저 뒤편에 앉아있는 것이 나.

[1990년] "마르크스에 흥미 없으면 흥미 있는 걸로 해"

1990년에 대학원에 입학하고, 김수행 교수님 조교로 2년 내내 좁은 14동 교수 연구실에서 선생님과 같이 보냈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공황론과 관련된 짧은 에세이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지도교수는 김수행 교수님이셨다.

이 시절은 오히려 공부와 관련된 기억보다, 선생님이랑 일주일에 한 번 관악산 올랐던 기억, 산에서 내려와서 완산정에서 모주 마시던 기억 그런 것들이 더 또렷하다.

박사과정에 가서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흥미가 거의 없어져서, 고민하다가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야, 이 친구야, 뭘 고민해. 공부는 마음 가는 걸 해야 되는 거야, 나는 처자식 주렁주렁 딸려 있을 때, 한국 돌아가서 취직 잘되는 논문하고, 내가 쓰고 싶은 논문하고 고민하다가 마음 가는 것으로 마르크스 한 거야. 당신은 마르크스에 흥미 없으면, 흥미 있는 걸로 해..."

그렇게 해서 박사과정 지도교수는 다른 교수님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지도교수를 바꿔가며 논문 쓰는 와중에도, 김수행 선생님과 관악산 등산하는 것과 막걸리 마시는 것은 계속되었다. 근데 난 여전히 방황하던 시절이었던지, 대학원 자체에 대한 회의가 많아졌다. 좀 시건방진 태도로, '이런 졸렬한 논문 써서 박사되면 뭐하나'하는 생각도 들고, '교수 돼봤자, 지루한 일생'일 것 같고, 뭐 그런 것.

당시 지도교수님은 "논문 다 써놓고, 이게 뭐하는 거냐, 무조건 심사 받아, 그리고 고민은 나중에 하고" 펄펄 뛰셨다. 반면에 김수행 교수님은 상대적으로 쿨하게 받아주셨다.

"어쩌겠냐, 공부하기 싫어서 그런 걸. 직장 다녀 봐. 그리고 그게 아니고 다시 논문 써야 되겠다면 그때 돌아와서 학위 받고."

[2006년] 교수님의 주례사

결혼식 주례를 봐주셨던 김수행 교수님
 결혼식 주례를 봐주셨던 김수행 교수님
ⓒ 신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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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하기로 결정을 했는데, 사소하지만 약간은 미묘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장모님은 교회에서 목사님의 주례로 딸의 결혼식을 치르고 싶어 하셨다. 그런데, 내 부모님은 교회를 다니시던 분들이 아니어서, 그런 형식을 탐탁치 않게 여기실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아내와 같이 고민하다 해법을 찾은 것이, 김수행 교수님이었다. 내 부모님이야 대학 은사님이 주례를 선다니, 자연스럽게 생각하실 것이고, 장모님께서는 교회의 어른이신 장로님께서 주례를 서신다고 좋아하셨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선생님, 사모님을 찾아뵙고, 사정을 말씀드리고 장모님을 위해서 주례사에 크리스천 모티브를 넣어달라고 특별 주문을 부탁드렸다. 그랬더니 선생님께서

"야, 이 친구야. 나 장로 아니야. 집사야. 교회에서 장로하라고 하는데, 담배를 끊을 수가 없어서, 장로 못한다고 했어."

어이쿠 했지만, 뭐 그렇다고 장모님께 '저 장로님은 아니시고, 집사님' 이렇게 말씀드리기도 뭐해서 그냥 패스.

선생님은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는 양가 부모님께 효도하고, 사회에서 얻은 것이 많으니, 사회에 보답하고..." 이런 말씀을 쭉 하시다가, 갑자기, 예수님의 사랑과 신랑신부의 나아갈 길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해주셨다.

내 결혼식장을 가득 채웠던, 386들은 '오잉, 김수행 교수님한테 저런 면도 있었나?'라고 생각했겠지만, 장모님과 교회 친구분들 사이에서는 두고두고, '참으로 은총 가득한 주례사'였다고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김수행 교수님 사모님 말씀이 맞았어

선생님만큼이나 사모님께도 큰 신세를 졌다. 대학원 시절 술집에서 파하고는 낙성대에 있는 교수 아파트의 선생님 댁으로 몰려가서 수시로 2차 하고, 술 너무 많이 마신 날은 선생님 댁에서 잠까지 자고 그랬다. 그 때 그 인간들 다 받아주시고, 아침 해장국까지 끓여주시던 사모님. 정말 요리를 잘하셨다.

부잣집 따님이셨던 사모님께서, '이렇게 가난한 집인지 모르고 속아서 결혼했다'고 말씀하셨지만 정말 지극정성 선생님을 위해 주셨다. 런던에서 '마르크스 경제학 해서는 한국 가서 교수도 못하고 실업자 될지도 몰라'라고 고민하셨을 때,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격려해 주시고, 그 기간 내내 남편과 아이들의 생계를 책임지셨던 것도 사모님이셨다.

내 결혼을 앞두고, 내 처에게도 축하와 함께,

"유리씨도, 각오하고 살아야 돼. 이 사람들 세상일 다 아는 것처럼 똑똑해 보여도, 다 허당이야. 말하자면 세상에 알아야 할 1에서 5까지는 모르고 6에서 10까지만 아는 사람들이야. 속 터질 일 많을 거야."

요즘 내 처는, 남편이 답답한 소리할 때마다, "그래, 김수행 교수님 사모님 말씀이 맞았어... 어쩌겠어, 내가 참고 살아야지"하면서 체념인지, 이해인지 그러고 산다.

선생님, 뭐 대단한 일 한다고, 세배 드리러도 못 가고, 스승의 날에도 찾아뵙지 못하고... 너무 죄송해요. 선생님.

○ 편집ㅣ홍현진 기자



태그:#김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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