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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 아내와 네팔이주노동자가 함께 산책을 하던 4월 25일 지진 소식을 듣기 이전의 모습이다. 그리고 나머지 사진은 지진 이후의 활동들
▲ 사진 왼쪽 아내와 네팔이주노동자가 함께 산책을 하던 4월 25일 지진 이전 사진 왼쪽 아내와 네팔이주노동자가 함께 산책을 하던 4월 25일 지진 소식을 듣기 이전의 모습이다. 그리고 나머지 사진은 지진 이후의 활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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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5일은 격일 근무하는 나에게 꿀맛 같은 봄날의 휴일이었다. 한국시간 오후 2시쯤이었을 것이다. 나는 아내와 네팔이주노동자 여성 써삐나 수누와르(26세) 씨와 함께 광교호수공원에서 산책을 즐겼다. 그리고 행복한 휴일을 보내는 보통 사람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나는 그 순간부터 긴장과 공포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아내의 나라, 네팔에 규모 7.9에 강진이 발생했다는 뉴스를 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소식을 접하면서도 내게 전개될 앞으로의 일에 대해 전혀 예감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날 저녁 참담한 뉴스가 이어진 가운데 나는 페이스북을 통해 "Help To Nepal-네팔 지진피해자를 위한 성금 모금 및 후원물품 모집"이라는 이벤트를 만들었다. 그렇게 한 달 보름이 지난 6월 8일 나는 아내와 함께 네팔과의 11년 인연 만에 처음으로 직항을 이용해 카트만두 트리뷰반 국제공항에 발을 디뎠다.

사진 왼쪽 위는 황금사원에 랑탕마을 지진피해지역의 돌마 타망을 만나서....그리고 사진 아래 오른쪽은 고르카 피해지역 주민들이 머물고 있는 포카라에서 신생아 의류 등을 전달하며
▲ 네팔 입국 후 활동들 사진 왼쪽 위는 황금사원에 랑탕마을 지진피해지역의 돌마 타망을 만나서....그리고 사진 아래 오른쪽은 고르카 피해지역 주민들이 머물고 있는 포카라에서 신생아 의류 등을 전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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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인들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페이스북에 네팔에서 발생한 지진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또한 오마이뉴스와 E-수원뉴스 등 내가 가능한 수단과 방법으로 네팔지진참상을 전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5월 15일 직장에 사직서를 냈고 6월 7일 낮 집을 떠나 출국하기 좋은 장소인 김포 여동생 집으로 이동했다. 나는 출국하기 전까지 1200만 원의 성금을 모금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금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받기도 했고, 또 전해 받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이 약속대로 지켜지지는 않았지만 최종적으로 1200만 원의 성금이 접수되었다.

과정마다 성금 진행상황을 통장사본을 통하여 페이스북에 게재하였고, 과정 중에 네팔에 가서 직접 빵을 만들어 지진피해지역 주민을 찾겠다는 공약을 했다. 그리고 어제인 7월 17일 네팔시간 8시 45분(한국시간 정오)에 네팔을 찾은 지 한 달 열흘 만에 랑탕피해지역 주민들이 임시거주하고 있는 황금사원(Yellow Gumba)을 찾았다. 5일 전부터 만든 빵과 쿠키, 그리고 지인들이 보내주신 아동의류 100명 분과 신생아의류, 그리고 전남대학교 의대 이준행 교수님께서 전달해주신 상비의약품을 전달했다.

아내와 함께 다시찾은 황금사원 그리고 붕괴된 건물 옥상 위의 모습이다. 한 아이가 삽을 들고 건물 잔해를 치우는 어른들을 흉내내고 있다.
▲ 아내와 함께 다시찾은 황금사원 아내와 함께 다시찾은 황금사원 그리고 붕괴된 건물 옥상 위의 모습이다. 한 아이가 삽을 들고 건물 잔해를 치우는 어른들을 흉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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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20년 만에 빵을 만들었다. 두려움 없이 말과 행동을 함께하자는 내 마음에 다짐을 지키기 위해 5일전 빵 만들 설비가 갖추어지자 곧 생산에 들어갔다. 나는 1996년 제과점을 하다가 그만둔 적이 있다. 그리고 20년 만에 처음이었다. 제과점을 그만둔 후 단 하루도 빵을 만들어 본 적이 없어 걱정도 되었지만 마음이 시키는 대로 가자고 다짐하며 앞치마를 매었다. 그런데 갑자기 전기가 나가버렸다. 그리고 하루 종일 정전이 되어 하는 수없이 하루를 허비했다. 그 다음 날 처음 만든 식빵은 아쉬운 과정이 있었지만 맛이 좋은 식빵으로 태어났다.

아열대지방의 기후조건에 맞게 이스트를 줄였지만 그래도 빵은 한국보다 급하게 부풀러왔다. 밀가루가 거칠어서 빵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고소한 맛과 거친 맛이 또 다른 미감을 자극했다. 나는 처음 만든 빵을 인근에 살고 있는 지인들과 처제 등에게 시식할 수 있도록 곧 아내와 서로 다른 길을 정해 배달하기 시작했다. 사실 지인들이 모두 "괜찮다. 맛있다."라고 말하고 나서야 나는 식빵 맛을 볼 수 있었다.

영혼 안식지 같은 랑탕마을 사람들, 빵을 들고 찾아가 황금사원에서 만난 랑탕마을 사람들과 웃다.
▲ 빵을 들고 찾아간 황금사원에서 만난 랑탕마을 사람들 영혼 안식지 같은 랑탕마을 사람들, 빵을 들고 찾아가 황금사원에서 만난 랑탕마을 사람들과 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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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생산을 한 나는 다음날에도 다시 식빵과 땅콩 쿠키를 생산했다. 그런데 땅콩 쿠키에 대한 반응이 의외로 좋았다. 아무튼 나는 다음날부터 빵을 생산하면서 네팔에서 "삐토"라고 불리는 강력분과 "머히다"라 불리는 중력분을 적당하게 나의 기준에 맞게 섞어보았다. 역시 일명 과자빵이라 불리는 곰보빵과 버터크림빵 등이 보기 좋고 맛나게 생산되었다. 나는 그 원리대로 식빵도 배합률을 달리해서 적용해 만들었다. 그리고 곰보방과 버터크림빵, 땅콩크림빵을 180여 개 생산했다. 다음날에는 더 많은 양의 빵을 생산하고 파운드 케잌과 도너츠류, 또 다음날에는 곰보스틱을 생산했다.

이틀 동안 격렬하게 빵을 만드는데 좁은 공장에서 혼자서 모든 것을 진행하던 나는 두 세차례 어지럼증을 느꼈다. 땀은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나는 급하게 소금 한 스푼을 컵에 넣고 뜨거운 물을 섞어 마시려 했다. 하지만 너무 뜨거워 마실 수가 없었다. 스스로 절감한 위험 앞에 어쩔 줄 몰라 하다 곧 찬물을 섞고 단숨에 들이마셨다. 곧 아내를 불러 즙을 내어 파는 과일가게에 가서 사탕수수 즙을 구해오기를 부탁했다. 사탕수수가 다 떨어져 망고와 파인애플을 섞은 주스를 사온 아내에게 괜찮다며 급하게 마셨다. 아침식사도 거스른 채 일을 시작한 오후 3시쯤이었다.

랑탕마을 사람들이 처음에는 의아해하며 어색한 표정이더니 곧 한국 빵 맛있다며 입 맛을 다셨다. 고마운 일이다.
▲ 한국 빵 참 맛있어요. 랑탕마을 사람들이 처음에는 의아해하며 어색한 표정이더니 곧 한국 빵 맛있다며 입 맛을 다셨다.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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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tstroke, Sunstroke"라는 단어를 찾아 아내에게 나의 증상을 설명했다. 열사병과 일사병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어제 지난 4월 25일 이후 극심한 고통 속에 살고 있는 네팔지진피해지역 주민들에게 작은 희망을 전하기 위한 나의 시도가 처음 실행되었다. 내가 전달한 빵은 많은 지인들에 성금과 지극한 인간애로 전해진 것이라 믿는다. 그 뜻을 대신해 전할 수 있어 매우 행복한 날이 가고 있다.

나는 내게 성금을 보내신 분들에게 나에 의지는 내일도 지속될 것이며 가능한 오랜 기간 이어지길 희망한다는 뜻을 전하고 왔다. 나를 주사위라고 주사위를 던진 여러분은 원하는 숫자의 얻기 위해 멈추시지 말고 밀가루값과 우유값, 계란값 등을 성원하시라 엄포아닌 엄포를 놓고 왔고 이제 그 결실이 시작되고 있다.

카트만두 2015년 7월 18일 새벽 5시 15분 김형효


태그:#황금사원에 랑탕마을 사람들, #네팔 대지진 후 네팔에서, #빵 만드는 시인, #네팔한국문화센타, #먼주 구릉, 김형효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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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사람의 사막에서" 이후 세권의 시집, 2007년<히말라야,안나푸르나를 걷다>, 네팔어린이동화<무나마단의 하늘>, <길 위의 순례자>출간, 전도서출판 문화발전소대표, 격월간시와혁명발행인, 대자보편집위원 현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홈페이지sisarang.com, nekonews.com운영자, 전우크라이나 예빠토리야한글학교교사, 현재 네팔한국문화센타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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