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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아시아역사연대)는 국내외 교과서의 역사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활동하는 시민단체입니다. 지난 4월 6일 일본 문부과학성은 2015년 중학교 교과서 검정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아시아역사연대는 검정을 통과한 사회과(역사, 공민, 지리) 교과서 18종의 자료를 입수해 역사연구자들과 함께 분석을 진행했습니다. 아시아역사연대의 분석 결과를 몇 회에 걸쳐 전합니다. - 기자 말

2015년 검정을 통과한 일본 사회과 교과서 분석을 보면 '한국 식민지 시기'의 서술 경향은 '침략'을 부정하려는 현 아베정권의 역사인식이 그대로 담겨 있다. 한국사에서는 '일제 강점기 시기'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식민지 지배 자체의 억압성과 조선인의 독립 여부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근대화론' 즉 일본의 침탈이 동아시아의 근대화를 도왔다는 대칭 논리를 사용해 비판 지점을 축소시켰다.

검정을 통과한 일본 역사 교과서를 보면 아베 신조 정권이 과거사 정리를 거부하고 '보통국가화'를 정당화하려는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베 정권은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는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의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교훈으로 직시하며 역사교육을 통해 오랫동안 기억해 결코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고노담화의 결의는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들에서는 엿볼 수 없었다.

3.1 운동을 지지한 일본인이 있다?

제국서원 출판사에서 출간한 교과서엔 3.1 운동을 기술하며 그 배경으로 '민족자결주의'를 강조했다. 단원명 "4. 아시아의 민족자결과 국제협조"에서 조선의 3.1운동은 조선인들이 민족자결주의 사고에 자극을 받고 스스로 독립선언을 하고 민중운동을 전개했다고 기술했다.

'조선의 3.1운동' 제국서원 출판사의 교과서.p 200
▲ '조선의 3.1운동' 제국서원 출판사의 교과서.p 200
ⓒ 제국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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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자결 사고에 자극을 받은 사람들이 1919년 3월 1일 경성(현재 서울)에서 독립선언을 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민중운동이 조선 각지로 확산되었습니다(3.1독립운동), 이에 대응해 조선총독부가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서 겨우 탄압했습니다, 일본정부는 조선을 무력으로 통치하는 정책을 전환하여 그때까지 군인에 의한 경찰제도를 폐지하고, 조선인에게 집회, 언론, 출판에 일정한 자유를 인정하게 되었다."

제국서원에서 출판한 교과서엔 '조선과 가교가 된 일본인 : 야나기 무네요시, 임업기술자인 아사카와 다쿠미, 요시노 사쿠조'란 제목의 칼럼이 실려 있다. 일본인이나 조선의 문화와 예술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새롭게 등장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싣는 걸로 조선의 문화, 예술 부분 약탈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3·1운동을 탄압했던 일본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서술로 긍정적인 자국사 인식을 강화하고자하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제국서원 칼럼 제국서원 교과서에 실린 칼럼 p201
▲ 제국서원 칼럼 제국서원 교과서에 실린 칼럼 p201
ⓒ 제국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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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독립운동 등 조선에서 일본에 대한 저항 운동이 일어나는 가운데 조선의 고유한 문화나 예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지키려고 하는 일본인도 있었습니다. 문예평론가이며 나중에 '민예'라는 단어를 제창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는 조선의 독자적인 자기 등 조선의 공예작품을 높이 평가했었습니다. 그리고 3·1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나서 조선 사람들 입장에서 생각할 필요성을 일본인들에게 호소했습니다. 임업종사자의 아사가와 타쿠미는 조선의 숲 회복 등에 노력했습니다. 아사가와는 조선에서 생활하는 동안에 조선자기의 훌륭함을 알고, 이들 공예작품을 지키기 위해 야나기와 함께 조선민족미술관을 만들었습니다. 이 미술관은 1924년, 경성(현재 서울)에 완성되었습니다. 민본주의를 주장한 요시노 사쿠조(吉野 作造)도 민족자결의 사고를 지지해 3·1독립운동에 이해를 표했습니다."

문교출판사의 교과서엔 조선에서 1919년 3월 1일 경성(현재 서울)에서 독립선언이 발표되어 사람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다고 정확하게 기술됐다. '3·1 독립운동을 지지한 일본인'들이 사진과 더불어 상세히 서술된 점이 특징이다.

3.1 독립운동 문교출판사의 교과서에 실린 3.1독립운동 p212
▲ 3.1 독립운동 문교출판사의 교과서에 실린 3.1독립운동 p212
ⓒ 문교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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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3·1 운동'을 명시하며 동시에 3·1 운동의 영향으로 일본이 언론이나 집회의 자유를 한정된 범위에서 인정하는 등 통치방식을 일부 개정했다는 서술도 있다. 기존 교과서에 서술되었던 야나기 무네요시 외에 요시노 사쿠조라는 인물도 새롭게 추가되었다. 그는 일본 국내의 민주화를 도모한 인물이다. 전문가들은 3·1 운동을 서술한 부분에서 자국사 인식을 강화하는 방식을 택해 침략성을 희석했다고 분석했다.

일본군 위안부, 실종된 '강제동원' 기술

[그림] 끌려가다/한국의 ‘위안부’ 김순덕 그림. [지도] 공문서로 확인되는 ‘위안소' 검정전 마나비샤 교과서(불합격본)에 실린 그림과 지도
▲ [그림] 끌려가다/한국의 ‘위안부’ 김순덕 그림. [지도] 공문서로 확인되는 ‘위안소' 검정전 마나비샤 교과서(불합격본)에 실린 그림과 지도
ⓒ 마나비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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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들에서 마나비샤 교과서를 뺀 17종의 교과서에서 위안부 기술이 완전히 소멸됐다. 특히 마나비샤 교과서에는 일본군 '위안부' 관련 기술이 있었으나 교과서 검정 과정에서 일본문부과학성의 수정 지시로 '위안부'라는 단어가 삭제되었다. 그럼에도 마나비샤 교과서에서 유일하게 일본군 '위안부' 관련 내용이 짧게 나온다. 마나비샤 교과서 불합격본과 추후 검정을 통과한 합격본 교과서를 비교해 보면 전반적으로 일본군 '위안부' 기술은 대폭 축소되었다.

검정전의 마나비샤 교과서엔 [그림] 끌려가다/한국의 '위안부' 김순덕이 그린 그림과 [지도] 공문서로 확인되는 '위안소' 지도가 등장한다.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도 비교적 자세히 실렸다.

김학순의 증언

"1990년 일본 정부는 국회에서의 질문에 대해 '위안부'는 민간업자가 데리고 다닌 것이라고 답하여 한국에서도 보도되었다. 이를 알게 된 김학순(당시 67세)는 "살아있는 증인이 여기 있다"고 이름을 밝히고 나와 군의 '위안부'였음을 밝혔다. 김학순에 이어 이름을 밝히고 나오는 여성들이 계속 나타나, 일본 정부에 사죄와 보상을 요구했다.

*일본 정부는 '위안소'의 설치나 운영에 군이 관여하였음을 인정, 사죄와 반성의 뜻을 표했다."

하지만 검정을 거치며 일본군 '위안부' 관련 사진과 지도가 삭제되었다. 대신 '현재 일본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군과 관헌에 의한 이른바 강제연행을 직접 나타내는 자료는 발견되어 있지 않고"라는 견해를 추가하였다.

또한 검정을 통과하며 <고노담화> 내용도 수정되었다. 아래 사진에서 왼쪽이 검정을 통과하지 못한 불합격본 교과서에 실린 내용이고, 오른쪽이 검정 통과 후 합격한 교과서에 실린 내용이다. 두 번째 항목에 추가되었고, 맨 끝에(주황색 네모칸) 출판사의 입장이 추가되었다.

<고노담화> 불합격본(왼쪽)과 검정을 통과한 합격본(오른쪽) 마나비샤 교과서에 불합격본과 검정통과 후 합격한 교과서에 실린 <고노담화> 내용
▲ <고노담화> 불합격본(왼쪽)과 검정을 통과한 합격본(오른쪽) 마나비샤 교과서에 불합격본과 검정통과 후 합격한 교과서에 실린 <고노담화> 내용
ⓒ 마냐비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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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 요헤이 관방장관 담화(1993년)

"조사 결과 장기간, 그리고 관범위한 지역에 위안소가 설치돼 수많은 위안부가 존재한 것이 인정된다.

한반도로부터 위안부의 모집, 이송 등은 대체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서 이루어졌다.

군의 관여 하에서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 정부는 고통을 겪고 몸과 마음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사과와 반성의 뜻을 밝힌다.

역사의 진실을 직시하고, 역사연구. 역사교육을 통해 이런 문제를 기억하고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표명한다.

*현재, 일본정부는 '위안부'문제에 대해 "군과 관헌에 의한 모든 강제연행을 직접 나타내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합격본에 *표시와 함께 다른 서술이 추가된 것은 마나비샤 출판사가 교과서 검정을 거치며 아베 정부가 2014년 1월 제시한 '교과용 도서 검정기준'의 개정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지침 내용 중 '교과용 도서 검정기준'에서는 사회과 교과서(역사, 공민, 지리)에 ▲ 근현대사에서 통설적인 견해가 없는 경우는 그것을 명시하고, 학생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표현할 것 ▲ 정부 통일적인 견해와 최고재판소의 판례가 있는 경우 그것에 기초해 기술할 것이라는 기준이 있다.

마나비샤 교과서 "조선, 대만 사람들과 일본의 전쟁" 서술 부분에서도 '위안부'단어가 검정을 통과하며 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불합격본에는 "조선과 대만의 여성 중에서 '위안부'로서 전쟁터에 보내진 사람들이 있었다"란 서술이 명확하게 나온다. 아래 그림 주황색 네모가 '위안부'란 단어다. 하지만 검정을 통과하며 '위안부'란 단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조선, 타이완의 사람들과 일본의 전쟁] 마나비샤 불합격본
▲ [조선, 타이완의 사람들과 일본의 전쟁] 마나비샤 불합격본
ⓒ 마나비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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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타이완의 사람들과 일본의 전쟁]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일본정부는 폐전까지 약 70만 조선인을 일본 내 탄광 등으로 보냈다. 장시간 중노동과 불충분한 식사 때문에 병에 걸리거나 도망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더불어 지원과 징병으로 다수가 일본군에 동원되었다. 혹은 군속으로 일본 점령지 포로수용소의 감시인과 토목작업 등을 명령 받았다. 조선에서는 군인 20만 이상, 군속 약 15만 명, 타이완에서는 군인 약 8만 명, 군속 약 12만 명에 달했다. 한편, 조선 대만의 젊은 여성 중에는 '위안부'로서 전쟁터로 보내진 사람들이 있었다. 이 여성들은 일본군과 함께 이동되어 자신의 의사로 행동하는 것은 불가능 하였다."

[조선, 타이완의 사람들과 일본의 전쟁]   마나비샤 합격본
▲ [조선, 타이완의 사람들과 일본의 전쟁] 마나비샤 합격본
ⓒ 마나비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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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타이완의 사람들과 일본의 전쟁]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일본정부는 폐전까지 약70만 조선인을 일본 내 탄광 등으로 보냈다. (중략) 한편 조선, 타이완의 어린 여성 중에는 전쟁터로 보내어진 사람들이 있었다. 이 여성들은 일본군과 함께 이동되어지면서 자신의 의사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

검정을 통과한 일본 중학교 교과서 '식민지 시대' 부분을 분석한 아시아역사연대 연구자는 "한일관계에 관한 사실적인 기술에서는 한국의 문제제기를 받지 않으려고 한계선을 유지하려 노력했다는 인상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역사관, 즉 한국에서는 흔히 우익적인 역사관이라고 말하지만 보통의 일본인이 품고 있는 역사인식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한국이 상대해야 할 일본인의 역사인식이란 바로 이 지점이다"라고 총평했다.

○ 편집ㅣ곽우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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