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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은편에 앉아 있던 내담자의 얼굴엔 핏기 하나 없었다. 분노하듯 울먹이는 그의 입술에서 "방금 친구가 목을 매어 죽었대요, 그 친구도 '에이즈'였다네요"는 말이 흘러 나왔다.

지금은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친구에게도 숨길 수 있느냐'는 분노보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측은한 연민에 가슴이 메어질 듯하다고 한다. 사실 지금의 내담자도, 자살을 했다는 내담자의 친구도 모두 HIV 감염인이다. 

지난해 이 내담자가 HIV에 감염된 사실을 울며불며 친구에게 하소연할 때 "에이즈, 이제 약만 잘 먹으면 괜찮다카더라"는 말을 덤덤하게 했던 이였다. 그때 "나도 감염인이다. 그래도 멀쩡하게 지내고 있잖아" 이 한마디가 그리도 어려웠을까? - 어느 날 오후 대한에이즈예방협회 대구경북지회 상담실에서 기록 (*내담자: 심리학 용어, 심리적 문제를 가지고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

'사회적으로 명명된 죽음의 병'

내담자 A씨의 취미는 식물을 키우는 것이다. 사람과 소통하지 못하니 식물에 애정을 쏟는다. 내동댕이처진 한 토막의 나무에서 잎이 4개나 자라 무척 반가웠단다. 네 잎 크로버처럼 행운을 가져다 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물과 영양분이라는 관심으로 혼자 키워왔지만 제법 자란 네 잎의 행운목을 이제는 상담실에 두고 여러 사람들의 따뜻한 관심과 사랑으로 함께 키우고 싶어 상담실로 가지고 왔단다. 그가 말하는 관심과 사랑이 이 작은 행운목에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내담자 A씨의 취미는 식물을 키우는 것이다. 사람과 소통하지 못하니 식물에 애정을 쏟는다. 내동댕이처진 한 토막의 나무에서 잎이 4개나 자라 무척 반가웠단다. 네 잎 크로버처럼 행운을 가져다 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물과 영양분이라는 관심으로 혼자 키워왔지만 제법 자란 네 잎의 행운목을 이제는 상담실에 두고 여러 사람들의 따뜻한 관심과 사랑으로 함께 키우고 싶어 상담실로 가지고 왔단다. 그가 말하는 관심과 사랑이 이 작은 행운목에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 대구인권시민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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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절친이라도, 상대가 같은 감염인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감염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아니 말하기가 두려운 질병. 에이즈는 이런 질병이다. 자신의 감염 사실을 말하는 순간, 자신의 정체성이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으며 그나마 남아 있던 상대방과의 연결도 끊어지는 냉정한 낙인의 질병.

언제부터였을까? 또 어찌 이리 가혹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가 이름 지어 놓은 갖가지 오명들이 HIV 감염인의 삶 전반에 검게 드리워 있다. 

내담자 역시 마찬가지다. 감염의 사실을 알고 가장 힘들었던 일은 가족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하는가였다고 한다. 결국 내담자는 HIV 감염 사실을 알리고 아내와 자녀들을 스스로 떠나는 선택을 했다. 하지만 형제들과 부모님에게는 끝내 말하지 못했다.

"형제가 알면 어떻게 될까요?"

내담자에게 비수를 꽂지는 않을까 조심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끝이지요. 내게 누가 남았습니까? 1년에 한 번 보든 두 번 보든 형제들만 이제 남았는데... 형제들이 내 감염 사실을 알고 나면 다시는 연락을 안 할 텐데... 생각만 해도 너무 너무 무서워요. 그렇게 되면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남은 가족과의 단절, 그것은 HIV 감염인에게 최후의 안식처마저 빼앗는 일일 수 있다. HIV에 감염된 분들을 상담하면서 가끔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고 스스로 자문해본다. 오늘 내가 상담실에서 내담자를 통해 배우는 것은 '인간은 의미 있는 타인의 관심으로 살아간다', '힘들어도 누군가 있기에 살아낸다'는 인간 근본의 실존에 관한 물음과 답이다.

인간은 혼자 고립된 상황을 가장 힘들어한다. 가족이나 의미 있는 존재로부터 고립되고 나 혼자 남게 된다면 '내가 없어지는 듯' 불안하고, 두려움을 겪게 되고, 견딜 수 없어지는 것이다. 이럴 때 인간은 절망하게 된다. 이 절망은 키에르 케고르가 말한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내담자의 친구는 그렇게 죽음을 선택하게 된 것이 아닐까?

따뜻한 사회적 온도 필요해

2015. 7. 14. 상담실을 찾은 어느 내담자가 내민 그림. 내담자는 상담실을 찾을 때마다 색칠그림을 가지고 가서 손이 붓고 트도록 칠한 후 가져와 새로운 그림을 또 가져간다. '내맘대로 예쁘게'라는 제목의 19번째 그림. 두 마리는 새는 모두 내담자 자신이란다. 한 마리는 아직 에이즈로 인해 움직임이 완벽하지 못한 자신의 몸. 또 한 마리는 에이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힘들어 하는 그의 마음. 함께 있는 것이 아닌 세상과 단절된 외로운, 혼자인 분열된 에이즈 감염인 자신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2015. 7. 14. 상담실을 찾은 어느 내담자가 내민 그림. 내담자는 상담실을 찾을 때마다 색칠그림을 가지고 가서 손이 붓고 트도록 칠한 후 가져와 새로운 그림을 또 가져간다. '내맘대로 예쁘게'라는 제목의 19번째 그림. 두 마리는 새는 모두 내담자 자신이란다. 한 마리는 아직 에이즈로 인해 움직임이 완벽하지 못한 자신의 몸. 또 한 마리는 에이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힘들어 하는 그의 마음. 함께 있는 것이 아닌 세상과 단절된 외로운, 혼자인 분열된 에이즈 감염인 자신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 대구인권시민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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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에 감염된다는 것은 고립을 초래하고 절망에 이르게 하는 '사회적으로 명명된 죽음의 병'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심리적으로 죽음에 이른 절망의 상태라도 누군가에게라도 말할 수 있다면 살 수 있다. 대한에이즈예방협회 대구경북지회의 상담실은 그 절망을 극복하고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말할 수 있는 공간'이다.

앞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다른 병과는 다르게 에이즈는 심리적 사회 문화적 고립이 심각한 상황이다. 이젠 신체적으로 반드시 죽는 질병은 아니지만, 사회적 죽음은 여전하다. 내담자의 비밀을 보장하는 전문 상담실을 찾는 일조차 상상할 수 없는 큰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나는 아직 살아 있소'라고 당당히 고립을 벗어나 밖으로 나오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사회적 시선이 부드러워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들도 우리도 다 같이 36.5도의 따뜻한 사회적 온도가 필요하다.

노령 감염인의 수 1000명 시대다. 노령이라는 이유로 사회적 연결 고리가 더욱 약해지고 있지만 노령 에이즈 감염인의 삶은 더욱 고달프다. 아파도 장기 요양이 가능한 감염인들을 위한 시설 하나 없기 때문이다. 그 많은 노인요양병원도 감염인이라는 이유로 받아주는 곳 하나 없다.

언제까지 이렇게 에이즈라는 병에 걸렸다고 배제하고 고립할 것인가? 벌써 고립 속에서 자살을 선택한 감염인들의 이야기가 내 귀에 들어온 것만 해도 올해 들어 세 번째다. 가난하고 고립되고 사회와 연결될 줄이 없어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면,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더 이상은 안된다. 사람으로 태어나 에이즈에 감염됐다는 말을 하지 못해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고립 속에 쓸쓸하게 죽는 일은 없어야 한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자신의 감염 사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힘이 돼준다면 충분히 살아갈 힘을 얻을 것이다.

에이즈 감염인의 인권 보장은 우리네 삶 속에서 '보고, 듣고, 말할 수 있을 때' 바로 시작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역할을 에이즈 전문기관이나 협회 상담실 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많은 사람이 하게 될 날을 꿈꿔본다.

덧붙이는 글 | 인권위와 함께 하는 시민기자단이 꾸려갈 '별별인권이야기'는 일상생활 속 인권이야기로 소통하고 연대하기 위한 공간입니다. 글쓴이 차명희님은 대한에이즈예방협회 대구경북지회 상담팀장으로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인권사무소 인권상담네트워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태그:#HIV 바이러스 , #HIV 감염인, #에이즈 , #AIDS, #감염인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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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 대구인권사무소와 함께 차별없는 인권공동체 실현을 위하여 '별별 인권이야기'를 전하는 시민기자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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