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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나이가 엇비슷한 두 주거시설이 있습니다.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에 있는 장안현대아파트와 현대맨션. 그런데 이 둘은 완공된 지 30년이 넘었다는 것 이외에도 공통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서서히 기울어지는 '담장'입니다.

도로와 인접한 담장이 심하게 기울어 있다.
▲ 기울어진 담장 도로와 인접한 담장이 심하게 기울어 있다.
ⓒ 정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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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지난 4월 8일에 촬영한 현대맨션 북측 담장입니다. 보시다시피 담장이 상당히 기울어져 있습니다. 제가 담장이 이렇게 심하게 훼손돼 있다고 느낀 것은 이 길로 다니기 시작한 지 반 년이 넘어서부터였습니다. 여느 때처럼 길을 지나다가 우연히 경고문을 주의 깊게 읽어보게 됐기 때문입니다.

경고문의 상태로 보아 설치한 지 상당히 오래 된 것 같다.
▲ 경고문 경고문의 상태로 보아 설치한 지 상당히 오래 된 것 같다.
ⓒ 정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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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맨션 북쪽 담장에 붙어 있는 경고문입니다. 왼쪽 사진은 4월 8일에 촬영한 경고문이고, 오른쪽은 3개월 뒤인 7월 8일에 찍은 겁니다. 참 친절한 경고문이지만, 글을 다 읽고나니 담장 옆을 걷는 게 무서워졌습니다.

조금 더 걸어가보니, 장안현대아파트에도 비슷한 경고문이 북쪽 담장과 동쪽 담장에 붙어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 중 왼쪽이 지난 4월 8일, 오른쪽이 7월 8일에 촬영한 것입니다. 담장은 기울어져 있었지만,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습니다.

인근 주민들은 기울어진 담장에 크게 개의치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주차해놓은 차량들이 꽤 많았습니다. 주변을 지나는 주민들에게 물어봤습니다. "이 담장 주변에 종종 주차를 한다"는 30대 남성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가까이서 보니까 (담장이) 많이 기울긴 했네요. 근데 그렇게 위험해 보이진 않는데요. 저도 가끔 이 옆에 차를 대고 잠깐씩 일을 보고 오곤 하는데…. 담장이 무너져서 제 차가 어떻게 되거나 할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건너편 주공아파트에 사는 한 주부는 조금 다른 생각이었습니다.

"집에서 나와서 버스 타러 가려면 이 길을 지나야 해요. 그쪽 담장이 기울어 진 건 잘 알고 있어요. 사실 꽤 오래전부터 서서히 더 기울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예전엔 별 불안함이 없었어요. 그런데 언젠가 경고문이 붙고, 해가 갈수록 담장이 더 기우는 것 같아서 요새는 담장 옆으로는 걷지 않아요."

다른 한쪽에서는 자조 섞인 목소리도 들립니다. 인근 주공아파트에 거주하시는 한 할아버님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이 동네가 원래 좀 낙후됐잖아. (저 담장처럼) 기울고 금간 곳이 한두 곳이 아니야. 그렇다고 나라에서 어떻게 일일이 죄다 찾아서 다 고쳐주겠어? 본인이 알아서 조심해야지."

이 할아버님의 말씀처럼 본인이 알아서 조심하면 되는 걸까요. 혹시라도 담장이 무너져 피해가 발생한다면 누가 배상을 해줘야 할까요. 민법 제758조 1항은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공작물의 설치 또는 보존의 하자로 인하여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때에는 공작물 점유자가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점유자가 손해의 방지에 필요한 주의를 해태하지 아니한 때에는 그 소유자가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

정리하면 점유자·소유자에게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담장의 수리·보수를 소유자 책임자에게 물으면 되는 걸까요.

콘크리트로 보수된 장안현대아파트 담장의 모습.
▲ 보수된 담장 콘크리트로 보수된 장안현대아파트 담장의 모습.
ⓒ 정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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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리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장안현대아파트는 재건축을 앞두고 있습니다. 굳이 비용을 들여서 담장을 정비하길 기대하긴 어려워 보였습니다. 지난 8일 장안현대아파트 관리사무소장와 전화로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 담장의 붕괴 위험은 언제 처음 알게 됐는지요? 경고문은 언제 붙였나요?
"담장이 기울기 시작한 것을 인지한 건 2~3년 전인 것으로 기억합니다. 경고문도 그때 곧바로 붙였고요. 그리고 그때 일부 보강공사도 했어요. 담장이 기우는 이유는 '부동침하' 때문입니다. 보강을 한 이후로 지금까지 순찰을 하면서 주시하고 있습니다."

기자는 보강공사를 했다는 장안현대아파트 북쪽 담장을 살펴봤습니다. 관리소장의 말대로 공사는 단단하게 잘 돼 있는 것 같았습니다.

- 현대아파트가 재건축을 앞두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향후 보수계획은 없습니까.
"올해 안으로 재건축 고시가 나올 것이고, 그러면 내년에 재건축조합이 설립되겠지요. 담장은 항시 순찰하면서 주시하고 있어요. '현저한 징후'가 있어야 공사를 더 할지 결정할 텐데, 지금껏 이상은 없었습니다. 현재 상태에서 담장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은 아파트 담장에 리어카나 탁자 등을 쇠사슬로 묶어놓는다든지, 현수막을 설치한다든지 등의 행위입니다."

관리사무소장의 말은 '담장의 이상 상태는 인지하고 있고, 최선을 다해 관리하고 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담장이 더 심하게 기울어져 있는 현대멘션 측의 입장을 들어보기로 했습니다. 현대맨션 측이 붙인 경고문은 반장이 붙인 것이었습니다. 현대맨션에 사는 한 주민은 반장을 찾는다는 말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아, 저도 반장이 누군지 잘 몰라요. 그냥 어느 분이 반장을 맡고 있나보다 하는 거죠. 지금 낮인데 여기 사람 있는 집이 없죠? 여기 사람들은 다 바빠요. 다들 일 나갔을 거예요. 담장 때문에 오셨다고요? 저기 경비 아저씨께 여쭤보세요."

저는 경비 업무를 보고 있는 분께 몇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 담장 경고문에 '반장 백'이라고 적혀 있는데, 반장님은 어디가면 뵐 수 있나요?
"반장? 그 사람은 왜? 지금 없어, 일 나갔어. 새벽 일찍 나갔다가 밤늦게 들어와. 나도 얼굴보기 힘들어."

- 그럼 여기 관리는 반장님께서 하는 게 맞나요?
"자세한 건 나도 몰라, 나도 여기 일한 지 얼마 안 됐고.  반장 이름이 뭔지, 연락처가 뭔지 잘 몰라."

- 기울어진 담장 때문에 왔습니다.
"담장이 왜? 담장이 기울어져서? 그렇지 않아도 경찰도, 구청에서도 사람이 와서 뭐라 했는데, 나도 잘 몰라. 어떻게 하는지."

현재 열여덟 세대가 살고 있는 주거시설의 기울어진 담장. 담장 보수에 대한 책임은 세대주들이 해야 하는 걸까요? 법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이와 관련해 동대문구청 건축과에 문의해봤습니다.

"시설물의 관리·보수는 원칙적으로 건축주(소유주)의 책임입니다. 현대맨션의 경우 지자체에서 보조금을 지급하는 등의 법률은 없습니다."

현대맨션 담장 끝 벽면에 금이 가있다. 현재는 넝쿨에 덮여서 위험이 가려져 있다.
▲ 금간 벽 현대맨션 담장 끝 벽면에 금이 가있다. 현재는 넝쿨에 덮여서 위험이 가려져 있다.
ⓒ 정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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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 주민들의 엇갈린 의견처럼 기울어진 담장은 위험할 수도, 당장은 전혀 위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현대아파트의 경우, 관리사무소라도 있지만 현대맨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만약 사고가 발생한다면 누가 책임을 지려고 할까 의문입니다.

두 주거시설에서 붙인 경고문에 적혀 있는 대로 '각별한 주의'를 다하면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씁니다. 그러나 최근 '메르스 사태'에 대응하면서 박원순 서울시장이 한 말이 떠오릅니다.

"과소대응보다 과잉대응이 낫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외양간이 망가진 걸 알았다면 즉시 고치는 게 맞습니다. 비록 그 외양간을 누가, 언제,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를 따지기 어려운 상황일 지라도 말입니다.

'안전 의식'에 대한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그러나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우리는 자주 그것을 망각합니다. 넝쿨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금간 벽처럼 말입니다.


태그:#담장, #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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