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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마미술관 프리다 칼로전 포스터
▲ 프리다 칼로전 소마미술관 프리다 칼로전 포스터
ⓒ 조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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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내 모습만 간직하고 싶은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현대인들에겐 더욱 그렇다. 페이스북과 같은 SNS상 멋진 모습을 게재하면 괜스레 뿌듯해지고, 여성들은 화장기 없는 '민낯'을 부끄러워하곤 한다. 그런데 여기 자신의 아픈 모습, 고통스러운 모습을 직접 화폭에 담으며 대면한 용기 있는 사람이 있다. 바로 멕시코의 유명 근대화가 프리다 칼로다. 올림픽 공원 내 위치한 아름다운 미술관, 소마 미술관에 프리다 칼로가 찾아왔다.

프리다 칼로의 그림은 꼭 어른들을 위한 동화책 제목, '잔혹동화'라는 단어를 떠오르게 만든다. '잔혹동화'는 유명 동화를 어른의 시각으로 그려낸 책이다. 프리다의 작품은 프리다 자신과 그녀를 둘러싼 초현실적인 요소들이 어우러져 있다. 욕조에 거꾸로 쳐박혀 있는 뉴욕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나, 자신의 얼굴에 사냥꾼에게 포위된 사슴의 몸통이 이어져 있는 식이다.

하지만 프리다는 그녀의 작품을 초현실주의로 분류했던 평론가들의 판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프리다는 "나는 결코 꿈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난 나의 현실을 그린다"고 말했다. 프리다는 왜 대개 사람들의 눈에 현실과는 영 멀어 보이는 자신의 작품들을 '현실을 그렸다'고 말했을까. 이는 그녀의 삶이 그만큼 비현실적인 육신의 고통, 사무치는 외로움으로 점철돼 있었던 것과 연결된다. 프리다의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 그녀가 겪었던 삶의 고통들을 찬찬히 더듬어볼 수 있을 만큼, 작품 속에서 그녀는 삶의 민낯을 드러냈다.

1907년 멕시코 코로야칸에서 태어난 프리다 칼로(1907~1954)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교통사고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렸고 침대를 벗어나 걷지 못했다. 그녀는 18살, 하굣길에 탔던 버스가 전차와 부딪치는 큰 사고를 겪었다. 사고로 그녀는 전차의 쇠봉이 옆구리를 뚫고들어가 척추와 골반을 관통하는 큰 부상을 입었다. 자신의 조각난 척추와 으스러진 오른쪽 다리뼈를 두고 프리다는 "다친 것이 아니라 몸이 부서졌다"고 표현했다.

프리다 칼로는 부서진 자신의 육체를 여과없이 화폭에 담았다. 조각조각난 신체, 피 흘리는 몸, 그리고 수십번의 재건 수술로 여기저기 흉물스럽게 꿰매지고 나사가 박혀진 육체를 그렸다. 1944년작 부서진 기둥(The Broken Column)에서 그녀는 척추를 지탱해주는 보조기구만을 착용한 상체를 드러내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또 다른 그림 '상처입은 사슴(1946년작)에서 프리다는 포위된 듯 몸에 화살이 박혀 있는 사슴의 몸에 그녀의 얼굴을 이식했다.

자화상, 그것도 가장 아름다울 때 가장 내가 멋져 보일 때가 아닌 고통스러울 때를 그린 자화상. 프리다 칼로 그림의 가치는 거기에 있다. 사람들은 숨기고만 싶어하는 가장 아픈 모습과 괴로운 모습을 그녀는 온전히 화폭에 담았다. 그러기까지 프리다는 얼마나 많이 자신에 대해 고뇌하고, 외면하고만 싶을 수천번의 유혹을 물리치며 용기를 냈을까.

프리다가 일생일대를 사랑했던 멕시코 유명 화가 디에고 리베라조차 프리다의 외로움을 치유하지 못했다. 오히려 프리다에게 디에고 리베라는 또 다른 고통을 주기도 했다. 프리다는 "내 인생 두 번의 대형사고가 있었다. 하나는 전차사고이며, 다른 하나는 디에고이다"고 말할 만큼 디에고는 또 다른 그녀였다.

디에고는 프리다에게 사랑하는 남자 그 이상이었다. 프리다에게 디에고는 평생의 사랑이자 정신적 지주이자, 그녀의 아이이기도 했으며 외로운 그녀를 더욱 외롭게 만드는 근원이기도 했다.

외로웠던 칼로와는 달리 리베라는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예술가이면서도 뚜렷한 정치적 신념이 있는 사람이었다. 당시 한창 건축 중이었던 뉴욕 록펠러 빌딩 1층의 벽화를 부탁받았을 때, 그는 벽화에 레닌의 얼굴을 그려넣었다. 그리고 그것의 수정을 요청받자, 차라리 벽화를 포기하겠다는 선언을 했던 뚜렷한 신념의 소유자였다.

늘 사람들의 중심에 섰던 리베라의 뒤에서 칼로는 더 큰 외로움에 직면했다. 리베라가 미국에서 활발한 사교 활동을 즐기는 동안 칼로는 그 뒤에서 멕시코에 대한 향수에 시달렸고, 세 차례의 유산으로 고통을 겪었다. 당시 그녀가 그렸던 그림엔 뉴욕 하늘에 나부끼는 멕시코 전통 의상이 놓여져 있거나 록펠러 빌딩에서 추락하는 킹콩이 있었다. 화려한 외면과 달리 깊이가 없었던 미국에서 그녀는 그녀의 뿌리인 멕시코를 그리워했다.

칼로를 또 괴롭게 만들었던 것은 그녀의 삶을 바꿨던 디에고의 외도였다. 리베라와 친동생인 크리스티나 칼로의 불륜을 목격한 칼로는 방에 틀어박혀 술과 담배, 창작활동으로 삶을 채웠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칼로에게 리베라는 사랑도, 애증도 넘어선 또 다른 그녀 자신이었다. 그것은 칼로의 대표작인 1943년 작 '테우아나 차림의 자화상 혹은 내 생각 속의 디에고'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전통 의상인 테우아나를 입고 불안한 듯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그림 속 칼로의 이마엔 선명하게 리베라가 버티고 있다. 칼로의 다른 그림 속 이마에 그려진 눈이 파괴의 신으로 알려진 힌두교 대신(大神) 시바신에게서 따온 듯, 칼로의 이마에 선명한 리베라의 모습은 그녀 자신과 그녀를 둘러싼 세계를 파괴하는, 그러나 뽑아버릴 수 없는 제3의 눈을 의미했다.

프리다 칼로는 "내가 나를 그리는 이유는 너무 자주 외롭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이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그녀는 끝없이 자신의 내면으로 침참할 수밖에 없었고 자신을 대면함으로써 스스로를 치유했다. 외면할래야 할 수 없는 교통사고 후유증과 잊을 만하면 이어졌던 디에고의 외도. 칼로는 '차라리 대면'했고 그녀의 용기는 오늘날 멕시코 근대 회화의 큰 획으로 남았다.

전시회에선 프리다의 생애를 생생하게 그린 영화 '프리다 칼로'(감독 줄리 테이머, 2002)를 하루 세 번씩 상영하고 있다. 그녀의 생애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된다면, 그녀의 작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한편 절망에서 피어난 천재 화가 '프리다 칼로' 전시회는 올림픽공원 내 소마미술관에서 9월 4일까지 만날 수 있다.


태그:#프리다 칼로, #프리다 칼로전, #전시 , #미술관, #디에고 리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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