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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쉰전> 표지 .
ⓒ 이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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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발 쇼크로 스타 작가와 거대 출판사에 집중된 문단 권력의 타락상이 민낯을 드러내면서 큰 파문이 일고 있다.

논란이 된 작가가 사과를 하고 관행처럼 어물쩍 넘어가려던 출판사도 뒤늦게 사태 수습에 나서는 모양새지만 실망과 분노는 잦아들지 않고 있다. 문단 안팎에서 한국 문학계의 자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김누리 중앙대 교수는 '한겨레'에 기고한 칼럼에서 "신경숙 논쟁의 핵심에는 '어디까지가 표절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아름다운 문장을 지어내는 것이 과연 좋은 문학인가' 하는 물음이 자리하고 있다"며 '다른 시각'을 제공한다. 표절이라는 현상의 심연에 놓인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칼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의 비루한 세상에선 아름다운 언어는 언제나 거짓의 언어라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신경숙의 미문주의는 '표절'의 유혹자일 뿐만 아니라, '진실'의 적대자일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한다. 신경숙 논란에서 다시 드러난 한국문학의 위기는 미문주의의 위기이다. 문학이 현실의 심연을 도발의 언어로 천착하지 못하고, 단지 그 표면을 아름다운 언어로 치장할 때, 문학은 이 성형의 시대에 감성의 화장술로 타락한다. (<문제는 표절이 아니다>, 김누리, 한겨레 6월 28일자)

'표절이냐, 아니냐'에서 '문학의 사명이란 무엇인가'로 생각의 틀이 바뀌는 순간, 비로소 이번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라 할 만한 독자들이 개입할 공간이 생긴다. 문학 작품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작가의 '사유물'에서 '창조적 독법'으로 읽고 해석하는 수많은 독자들의 '공유물'로 재탄생되기 때문이다. 문학의 사명에 대한 숙고, 그것은 작가의 몫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독자의 몫이기도 하다.

문예는 결코 혼자 비약할 수 없다

나는 '신경숙 사태'를 보면서 루쉰을 떠올렸다. 예전에 읽었던 <루쉰전>(왕스징 지음/신영복,유세종 옮김)을 다시 펼쳤다. 군데군데 밑줄 그어 놓은 부분들에서 이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아주 절박한 시기이다. 작가는 해로운 사물에 대해 즉각 반응하거나 항의하고 투쟁하는, 느낌과 반응의 신경, 공격과 방어의 수족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장편 대작에 마음을 두고 앞으로 세워야 할 문화를 설계하는 것도 물론 좋은 일이지만, 현재를 위해 항쟁하는 것 역시 현재와 미래를 위해 싸우는 것이다. 현재를 잃는다면 미래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차개정 잡문, 414쪽)

루쉰은 신해혁명 실패로부터 내전, 국공합작과 항일전쟁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중국 현대사를 온몸 바쳐 살았던 인물이다. '벗들이 죽어감을 차마 볼 수 없노니 칼 든 놈들 향해 분노하며 시를 짓는다'고 했던 그는 사상가, 혁명가이기 이전에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현실주의 문학의 대가이다.

루쉰은 현실과 동떨어진 문학, '예술을 위한 예술'을 경멸했다. 문학이 지금 처한 현실에 발딛고 있지 않는다면, 그것이 자각하든 자각하지 못하든 '도피의 길'로 빠지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문예와 혁명>이라는 잡문에서 "사회가 정체되어 있는 상태에서 문예는 결코 혼자 비약할 수 없다"고 했다. 일제강점기를 살다간 무명시인 윤동주가 그러했듯이, 격동하는 중국의 현실에서 루쉰 또한 문학의 사명에 대해 고뇌하고 또 고뇌했다.

윤동주가 일제의 부역자로 전락한 문단에 환멸을 느끼고 우리말과 글을 지키는데 목숨을 걸었다면, 루쉰은 문학을 '혁명의 무기'로 삼아 현실을 돌파하고자 했다. 그는 "진보를 위한 싸움은 전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민중이 억압받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투쟁하지 않겠는가? 문학예술은 곧 이것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문학예술을 단지 투쟁의 표어나 구호로 전락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한 선을 그었다. 루쉰은 "모든 꽃이 다 빛깔을 지니고 있지만, 빛깔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다 꽃이라고 할 수는 없다"(344쪽)는 비유를 들어 "모든 선전이 결코 다 문학예술인 것은 아니다. 혁명이 문학예술을 필요로 하는 것은 그것이 문학예술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루쉰은 '병적인 사회'에서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서 글감을 구했다. 문학이란 마땅히 인생을 위해 힘써야 하고, 또 인생을 개량하는데 복무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중국 현대 문학의 빛나는 성과이자 세계 문학사에서도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되는 <아큐정전>은 이 믿음이 창조해낸 걸작이다. 루쉰은 신해혁명 실패 후 군벌과 관료, 지주들로부터 수탈당하는 농민들에게 비분을 느끼고 그들의 삶을 고통스러워했다. 비록 아큐를 위해 '정전'을 쓰는 것처럼 했지만, 진정 그가 그리고자 한 것은 '침묵하는 국민의 영혼'이었으며 자신의 눈으로 본 낡은 중국인의 삶이었다.

'무쇠 방'에 갇혔어도 한 줄기 희망을 위해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원래 있다고 할 수도 있고 없다고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것은 마치 땅 위에 난 길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사실 길이란 원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차차 생긴 것이다. (소설 '고향' 중에서, 173쪽)

문학의 힘으로 절망에 빠진 중국의 혼과 희망을 일깨우고자 했던 루쉰은 창작에 혼신의 힘을 바쳤다. 1907년부터 1936년까지 소설 3권, 산문회고록 1권, 산문시 1권, 잡문 16권(650편)을 남겼고 번역해 소개한 작품들도 중장편소설 9권, 단편소설 78권, 희곡이 2권, 문예이론 저서 8권, 단편논문 50편에 이른다.

"가령 무쇠로 지은 방이 있다고 하세. 창문은 하나도 없고 부수기가 여간 힘들지 않은 그런 방 말이야. 만일 그 안에 많은 살마들이 깊이 잠들어 있다면, 얼마 안 가서 수밍 막혀 죽을 게 아닌가. 그러나 잠을 자다가 죽은 것이니까 죽어가는 고통을 느낄 수는 없을 걸세. 그런데 자네가 크게 소리쳐서 잠이 덜 든 몇 사람을 깨워놓는다면, 그 불행한 몇몇은 임종의 쓰라린 고통을 피할 수 없을 터인데, 그러고도 자네는 그들에게 미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닐세, 몇몇 사람이 깨어났으니 그 무쇠 방을 무너뜨릴 수 있는 희망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네."
그렇다. 희망을 버릴 수는 없는 것이었다. 앞날에 희망을 갖는 것, 이것은 루쉰이 일관되게 가진 신념이었다. 바로 이 앞날의 희망을 위해 루쉰은 또다시 자신의 무기, 곧 붓을 들기로 결심한 것이다. (151~152쪽)

루쉰은 "먹으로 쓰인 거짓말은 결코 피로 쓰인 사실을 덮을 수 없다"고 했다. 이 말은 오늘의 수많은 작가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문학의 진정성, 그것이야말로 세계와 인간의 삶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탐구하는 문학이 품어야 할 유일한 정체성이 아닐까.

'먹으로 쓰인 거짓말'이 횡행하던 중국 문단에 대해 날카로운 붓을 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루쉰은 "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에는 쌀쌀하게 눈썹 치켜세워 응대하지만, 아이들을 위해서는 기꺼이 머리 숙여 소가 되리라"고 했다. 이러한 루쉰의 생애에 대해 <루쉰전>을 번역한 신영복 선생은 '옮긴이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루쉰에게 양심은 인간을 '더부살이'로 이해하는 것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흙과 더불어 살고 이웃과 더불어 살고 조국과 민중과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루쉰이 지켜낸 양심의 내용이었다. 루쉰이 이룬 초인 같은 업적도 이 양심이 만들어낸 산물이었으며, 루쉰의 문학적 천재성도 이 양심의 승화였으며, 불굴의 전투성도 이러한 양심의 실천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양심은 이처럼 루쉰의 모든 고뇌와 달성의 원천이었다. (옮긴 이의 말, 12쪽)

덧붙이는 글 | <루쉰전>(왕스징 지음, 신영복 유세종 옮김/ 다섯수레 펴냄 / 2007.09 / 1만2000원)
이 기사는 이민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yes24.com/xfile340)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루쉰전 - 기꺼이 아이들의 소가 되리라, 개정판

왕스징 지음, 신영복.유세종 옮김, 다섯수레(2007)


태그:#루쉰, #신경숙, #현실주의, #문학, #아큐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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