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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마다 제비가 처마 밑에서 노래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하루를 엽니다. 제비한테는 시계가 없을 테지만, 제비는 몸으로 때를 헤아립니다. 언제 일어나서 둥지에서 날아올라 먹이를 찾아야 하는가를 몸으로 압니다. 저 멧자락 너머로 살몃살몃 희뿌윰하게 빛이 퍼질 무렵 일어나서 부산하게 노래하고 날갯짓을 합니다.

아득하게 멀지 않은 쉰 해쯤 앞서만 헤아려도, 제비집은 이 땅에 대단히 많았습니다. 쉰 해쯤 앞서라면 제비집은 서울 한복판에도 있었고, 시골에서는 모든 집에 제비집이 몇 채씩 있었을 테지요. 제비집 숫자를 알뜰히 적어서 '기록'으로 남긴 학자는 없을 테지만, 한 집에 '제비 한 식구'가 있다고 할 만큼 제비는 한겨레하고 오래된 벗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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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수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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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한테 책과 연필이 있다고 한다면, 제비는 무엇을 책에 적바림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제비가 지켜본 '사람들이 치고받으며 죽이고 죽은 발자취'를 적바림할까요, 아니면 땅임자가 소작농을 짓누르던 모습을 적바림할까요, 아니면 시골 사람 누구나 손수 밥이랑 옷이랑 집을 지으면서 착하게 어깨 동무하는 삶을 적바림할까요.

우리는 과거를 이해하기 위해서 역사를 보지만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기 위해서도 역사를 봅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어디서부터 왔는지, 어떤 길을 통해 '지금 여기'에 와 있는지를 알면,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또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어떤 길을 선택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서도 비교적 합리적 근거를 갖고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시기(구석기 시대)에는 지배하는 사람도 지배받는 사람도 없이 모두가 한 무리가 되어 평등하게 살았습니다. 사회가 복잡하지 않아 계급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17, 34쪽)

제비가 역사를 글로 남긴다고 한다면, '고단한 제비집'을 적바림할 수 있습니다. 흥부, 놀부하고 얽힌 이야기도 제비 눈길로 적바림할 테고, 한국 전쟁 때 온통 불바다가 되어 시골집이 타 버려 사라질 적에도 제비는 시골집과 함께 불타서 죽었겠지요. 어미 제비는 불타는 마을에서 벗어났을 테지만 날갯짓을 못하는 새끼 제비는 슬픈 사람들하고 함께 슬프게 죽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제비는 새마을운동을 맞이하면서 삶이 우지끈 무너집니다. 도시에서는 재개발하고 아파트 몸살에 보금자리를 빼앗깁니다. 시골에서는 보기 싫다며 둥지를 빼앗깁니다.

고향을 잃은 제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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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상윤/철수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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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현대 문명 잣대로만 본다면, 제비 한 마리가 있거나 없거나 대수로울 일이 없습니다. 현대 문명에서는 살충제와 농약을 쓰면 풀벌레나 날벌레나 애벌레를 손쉽게 죽입니다. 시골살이에서는 제비가 날마다 수백 마리에 이르는 풀벌레나 날벌레나 애벌레를 잡아서 먹습니다. 제비랑 참새랑 콩새랑 박새 같은 조그마한 새들은 그야말로 온갖 벌레를 날마다 어마어마하게 잡습니다.

아무튼, 제비는 새마을운동 바람이 부는 동안 애꿎게 목숨을 잃고 새끼를 잃으며 집을 잃습니다. 사람만 시골을 떠나 도시에서 공돌이·공순이가 되어 '고향을 잃'지 않습니다. 사람만 댐을 크게 짓느라 '고향을 잃'지 않습니다. 갑작스레 도시가 되고, 갑작스레 아파트가 서며, 갑작스레 농약 바람이 춤을 추니, 제비는 수천 수만 수십만 해에 이르던 '사람하고 맺은 사이좋은 삶'을 하루 아침에 빼앗기거나 잃을 뿐 아니라 '고향을 잃'습니다.

백제는 '백성이 즐겁게 따랐다'는 뜻입니다. 한강 유역은 일찍부터 철기 문화가 발달한 데다가 바다를 통해 중국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기 좋은 곳이었기 때문에 백제는 다른 두 나라에 비해 조금 더 빨리 국가 체제를 정비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고려에서) 무신들이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백성들과 일반 군사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벌 귀족들 밑에서 백성들은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무신들은 백성들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무신들은 백성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권력을 잡기 위해 정변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57, 97쪽)

고성국·서인원 두 분이 글을 쓰고, 심상윤 님이 그림을 넣은 <10대와 통하는 한국사>(철수와영희,2010)를 읽습니다. <10대와 통하는 한국사>는 초·중·고등학교 교과서로는 더 깊거나 넓게 다루지 못하는 한국사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시험 문제로 한국사를 바라보도록 하지 않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그동안 어떤 발자국을 남겼는지 차분히 돌아보자고 이야기합니다. 임금님 이름을 줄줄이 늘어놓는 역사가 아니고, 전쟁 기록이나 전쟁 영웅 몇 사람을 치켜세우자는 역사가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를 '역사'라는 거울로 바라보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학교에서 다루는 역사책을 보면, 지구별에 처음 사람이 태어난 이야기라든지 이 땅에 처음 한겨레가 생긴 이야기를 제대로 다루지 않습니다. '기록'이 없어서 다룰 수 없다고 하지만, 기록이란 '책'이 아닙니다. '글'을 아는 사람이 '책'을 써야만 기록이 되지 않습니다. 글을 아는 사람이 참거짓을 뒤틀어서 책을 쓴다면, 이러한 책을 앞으로 '즈믄 해(천 년) 뒤'에 어떻게 바라볼까요? 참 거짓을 뒤틀어서 쓴 책도 '역사'나 '기록'으로 여겨야 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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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상윤/철수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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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에 선 우리는 오늘 이곳에서 어떤 지식인이나 작가가 '짜깁기'나 '표절'이나 '뒤틀기'를 하더라도 웬만큼 알아채거나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천 년 뒤에 이곳에서 살 사람들로서는 '1000년치 글과 책과 자료'가 쌓일 테니, 이 모두를 샅샅이 살피거나 따지면서 무엇이 옳거나 그른가를 헤아리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천 년 뒤에는 거짓 기록이 참 기록을 뒤집을 수 있습니다.

지금의 한복은 조선 시대가 돼서야 만들어졌습니다. 그 이전에는 지역에 따라 각각 다르게 입었습니다. 고구려나 백제의 고분 벽화를 통해 고대 사람들이 입었던 옷 모양을 보면 지금의 한복과 크게 다릅니다... 1787년 5월 해군 대령 라페루즈의 지휘 아래 부솔 호는 제주도 해안을 측량한 다음, 동해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또 다른 섬을 발견했습니다. 자기네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은 섬이었으므로, 같이 타고 있던 프랑스 육군 사관학교 교수 이름을 따서 '다줄레 섬'이 바로 울릉도입니다. (128, 161쪽)

학교에서 교과목으로 가르치기에 배워야 하는 역사가 아닙니다. 시험 문제에 나오니 달달 외워야 하는 역사가 아닙니다. 정치 권력 입맛에 따라 바뀌는 역사 지식이나 정보를 시사 상식처럼 머릿 속에 넣어야 하지 않습니다.

내가 살고 네가 사는 이야기를 가슴에 담을 노릇입니다. 우리 어버이가 살아왔고 너희 어버이가 살아온 나날을 가슴에 새길 노릇입니다. 서로 아끼고 돌보면서 함께 가꾼 살림살이를 마음에 담을 노릇입니다. 기쁘게 사랑하면서 아름답게 일군 보금자리와 마을을 마음이 새길 노릇입니다.

말 한 마디마다 역사가 어립니다. '쑥'이나 '마늘' 같은 낱말 하나를 얻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나물과 남새를 뜯거나 기르면서 슬기를 쌓았습니다. 이런 낱말 하나는 몇 천 해가 되었는지 몇 만 해가 되었는지, 또는 수십만 해가 되었는지 까마득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나 '사랑'이라는 낱말도, '하늘'과 '아이'라는 낱말도, '님'이나 '꽃'이라는 낱말도, 대단히 오래된 말이요 아주 깊은 역사가 깃든 말입니다.

어버이는 '시내'나 '샘'이라는 말을 아이한테 물려주면서, 시냇물과 샘물을 어떻게 찾고 얻고 다루고 돌보면서 삶을 짓는가를 가르칩니다. 어버이는 '호미'나 '낫'이나 '쟁기'라는 말을 아이한테 물려주면서, 호미나 낫이나 쟁기라는 연장을 어떻게 벼리고 쓰고 다루고 아끼면서 삶을 짓는가를 가르칩니다.

완벽하게 짜인 각본에 의해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습니다. 국제 정세의 변화를 외면하여 근대화에 뒤처졌고, 문호가 개방된 이후에도 제국주의 열강들에 기대어 독립을 유지하고자 했던 대한제국의 실낱같은 희망은 냉엄한 국제 현실 앞에서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경제 개발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많은 자금이 필요했는데, 일본으로부터 3억 달러의 지원금과 3억 달러의 차관을 받기 위해 전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일 국교 정상화를 추진했습니다. 이때 일본이 내건 조건이 식민지 지배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 것과 독도를 '돌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184, 190∼191쪽)

민중에겐 곧 '살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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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상윤/철수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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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스스로 삶을 지은 여느 사람들, 이른바 민중이나 백성한테는 '삶이 역사'입니다. 여느 사람들, 이른바 민중이나 백성한테는 '살림이 역사'요, '사랑이 역사'이자, '사람이 역사'입니다.

이 땅에서 권력을 세워서 정치나 사회를 세우려 한 사람들, 이른바 권력자한테는 '통치 기간이 역사'입니다. 권력자한테는 '전쟁 기록과 전쟁 영웅이 역사'일 테고, '지식인 이름이나 행정 기록이 역사'일 테며, '훈장과 외교가 역사'일 테지요.

가만히 보면, 역사라고 할 적에 두 가지 역사가 있습니다. 한 가지 역사는 사람들이 스스로 지으면서 가꾸는 삶입니다. 다른 한 가지 역사는 사회와 정치가 사람들을 길들이려고 퍼뜨리는 지식입니다.

법을 몰라도 착하게 사는 사람은, 통치자나 집권자 이름을 모를 뿐 아니라 통치자나 집권자하고 얽힌 역사를 몰라도 언제나 착하게 삽니다. 법을 잘 알고 통치자나 집권자 이름을 잘 아는데다가 통치자랑 집권자하고 얽힌 역사를 잘 안다고 해서 착하게 살지는 않습니다.

유럽에서는 전쟁을 일으킨 독일이 분단됐는데 아시아에서는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분단되지 않고 우리나라가 분단되었습니다. 이는 일본의 전략적 위치 때문이었습니다... 광복 직후부터 주요 정당과 사회 단체들은 민족 반역자인 친일파들을 처단하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군정은 자신들의 군정 통치를 위해 친일파들을 처벌하지 않고 관리로 임명해 행정을 담당하게 하거나 민족 지도자 행세를 할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1954년에는 대통령 중인 제한을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 철폐하도록 개정하여 장기 집권을 꾀했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이때 전 세계적으로 조롱거리가 되는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225, 230, 240쪽)

청소년 인문책 <10대와 통하는 한국사>는 청소년한테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합니다. 먼저, 역사란 무엇인가 하고 밝힙니다. 다음으로, 아스라히 먼 옛날에 이 땅에 처음 나타난 사람은 어떤 삶을 가꾸려 했는가를 헤아립니다. 그리고, '글'이나 '책'이 생긴 뒤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 지식'을 놓고서, 이러한 역사 지식이 우리 삶하고 어떻게 이어지는가 하는 대목을 살핍니다.

여기에, 한 가지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아프거나 슬프거나 구비진 역사를 놓고서, 청소년이 스스로 옳고 바르면서 아름답고 사랑스레 생각을 북돋울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정치 권력이 이 땅에서 무슨 일을 왜 했는가를 짚고, 정치 권력을 거꾸러뜨린 사람들은 어떤 꿈을 품었는가를 다루며, 2000년대 오늘을 살면서 3000년대 '천 년 뒤'를 내다보면서 살아갈 청소년한테 '삶을 스스로 지어서 기쁘게 가꾸는 길'을 걷는 동안 길 동무로 삼을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밝히려 합니다.

박정희 정부는 국가 안보와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정치적 안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내세워 강압적인 통치에 나섰습니다. 1971년 12월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해 대통령에게 초법적인 비상대권을 부여하고, 1972년 10월 이른바 '10월 유신'을 선포하여 모든 권력이 대통령에게 집중되는 유신 헌법을 공포했습니다...

박정희는 우리나라에 서구식 민주주의는 맞지 않아서 '한국적 민주주의'인 유신 헌법이 필요하다고 강변했지만, 유신 체제는 민주 헌정의 기본 질서를 철저하게 파괴한 비민주적, 권위주의적 통치 체제였습니다. 국민의 기본권과 자유를 근본적으로 제약하는 독재 체제였습니다. (245쪽)

어미 제비 두 마리가 하루 내내 그야말로 바지런히 들과 숲을 가로지릅니다. 어미 제비 두 마리는 아주 먼 옛날부터 해 왔듯이 새끼를 돌봅니다. 오직 사랑으로 새끼를 낳아서 돌보고는, 여름이 저물 무렵 너른 바다를 넘어서 따스한 고장으로 갑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한국 사람은 어디에서 무엇을 왜 하면서 하루를 여는가 하고 돌아봅니다. 이 나라를 버티는 바탕이 될 여느 사람들은 어떤 하루를 보내고, 이 나라에서 대통령이나 공무원이나 정치 일꾼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어떤 하루를 보낼까 하고 돌아봅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대통령이나 정치 일꾼 목소리나 발자국을 꽤 크게 다루거나 싣습니다. 그러나, 이런 목소리나 발자국을 두고 '역사'라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기록'은 될 수 있어도 역사라고는 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어버이요, 어른으로서 아이나 청소년한테 역사를 물려주거나 가르치려고 할 적에는, 아이나 청소년한테 삶을 아름답게 가꾼 발자취와 슬기를 물려준다는 뜻이면서, 삶을 기쁘게 누리는 웃음과 어깨동무를 가르친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손에 따순 마음을 담아서 역사를 씁니다. 두 눈에 밝은 넋을 실어서 역사를 짓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최종규 시민기자의 누리사랑방(http://blog.naver.com/hbooklov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10대와 통하는 한국사>(고성국·서인원 지음 / 심상윤 그림 / 철수와영희 펴냄 / 2010.10 / 1만2000원)



10대와 통하는 한국사 - 국민이 주인 되는 우리 역사 이야기

고성국.서인원 지음, 심상윤 그림, 철수와영희(2010)


태그:#10대와 통하는 한국사, #한국사, #한국역사, #청소년인문, #청소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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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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