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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의 장편소설 <엄마를 부탁해>를 처음 만난 건 문학계간지 <창작과 비평> 2007년 겨울호 지면에서였다. 첫 문장을 읽었을 때 느낀 서늘함이 생생하다.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 '국민작가' 신경숙의 힘이 새삼 느껴졌다.

신경숙은 전북 정읍 출신이다. 1979년 구로공단 근처 전기회사에서 납땜 일을 하면서 고등학교 공부를 한 '10대 여공'으로 알려져 있다. 17살의 주경야독은 힘든 일이다. 유신독재의 광기로 인한 시대의 우울이 그의 삶을 감쌌을 것이다. 모두 힘든 시절이었겠으나 감수성 예민한 예비 작가는 더욱 그랬으리라.

신경숙은 모교인 서울영등포여고에서 최홍이 전 서울시교육의원을 담임으로 만난 인연으로도 유명하다. 신경숙이 1주일 무단결석을 했을 때였다고 한다. 최 전 의원은 신경숙에게 반성문을 쓰게 했다. 신경숙은 대학노트 20페이지에 걸쳐 글을 써왔다. "자신의 얘기를 착 달라붙게 쓴 표현력에 감탄"한 최 전 의원은 신경숙에게 소설을 써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신경숙은 최 전 의원이 건네준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쏘공>)을 필사하면서 소설가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영민했으나 가난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고 인쇄소에 다녀야 했던 <난쏘공>의 '영수, 영호' 형제가 남으로 다가오지 않았을 것이다. 가난은 신경숙 자신의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가 소설에서 '아픔'과 '외로움'을 탁월하게 묘사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데 있지 않았을까.

세월이 흘렀다. 17살의 '여공' 신경숙은 52살의 유명 작가가 되었다. <엄마를 부탁해>는 국내에서만 200만 부가 팔렸다. 국내의 유수한 문학상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동인문학상의 종신심사위원이다. 번역된 그의 작품들은 미국, 독일, 일본 등지로 퍼져나가고 있다. 한국에서 '국민작가'처럼 대접받는 그는 외국에서도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한마디로 그는 한국 문학계의 살아있는 '권력'이다.

그런 신경숙이 표절 논란에 휩싸였다. 지난 16일, 신경숙의 소설 <전설>이 일본의 극우 작가인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 일부를 훔쳐 썼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응준이 인터넷 매체 <허핑턴포스트>에 "우상의 어둠, 문학의 타락 - 신경숙의 미시마 유키오 표절"이라는 글을 통해서였다.

그 누구든 내부에서 내부를 비판하기란 쉽지 않다. 내부로부터 배척되는 현실적인 위협의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순혈주의' 풍토가 강한 문학계는 더욱 그렇다. 동인과 계파가 주도하는 순혈주의 문화에서 내부 비판은 곧 자신의 '패밀리'를 향한 고발이 될 수 있다.

이응준은 예의 글에서 "표절을 저질러도 아무 문제가 없는 곳이 한국문단"이라고 썼다. "책이 많이 팔린다거나 그것과 음으로 양으로 연관된 문단권력의 비호가 있어야 한다"라는 조건이 있어야 한다면서 말이다. 표절에 눈을 감고 묵인하는 문학계의 풍토가 문학적 양심을 뛰어넘어 문단 내 권력구조의 문제와 연관된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이응준은 이를 '표절의 환락가화'로 표현했다.

이응준은 신랄하게 '고발'했다. 문학계 내부에서 배제될 위험을 감수했다. 이런 점들 때문일까. 언론 보도를 종합해 보면 그는 영화계로 '전직'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문학계에서 받은 상처를 보듬는 과정에서 영화가 위로가 되었던 모양이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는 자신의 전 존재를 내걸고 내부고발을 했다.

문학계는 어떻게 반응했나. 표절 논란이 커지자 신경숙은 17일 '전속출판사' 격인 창비에 이메일을 보냈다. 아래는 그 일부다.

(미시마 유키오는) 오래전 <금각사> 외엔 읽어본 적 없는 작가로 해당 작품(<우국>)은 알지 못한다. 이런 소란을 겪게 해 내 독자분들께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 풍파를 함께 해왔듯이 나를 믿어주시길 바랄 뿐이고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이런 일은 작가에겐 상처만 남는 일이라 대응하지 않겠다.

이응준이 그린 '시나리오' 그대로다. 신경숙은 "알지 못한다"고 했다. "믿어주시길 바랄 뿐"이라는 말로 독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말한 뒤 "대응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무시하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문학계 내부의 반응도 이응준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는 듯하다. 처음 창비는 침소봉대 하지 말라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평론가들은 익명의 그늘 아래서 원론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이번 논란에 실명으로 참여하고 있는 이들도 조심스러워하기는 마찬가지다. 나는 그 대표적인 사례를 평론가 신형철에게서 본다. 그는 이번 표절 논란과 관련해 <한국일보>가 보낸 질의에 대한 답변서에서 "같은 것을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표절을 인정하다는 뜻일 게다.

그런데 그는 원고지 4장 분량의 제법 긴 답변서 전체에서 '표절'이라는 말을 한 번도 쓰지 않았다. "과정이 어떠하였건 '우국'과 '전설' 사이에 빚어진 이 불행한 결과에 대해서는 작가의 자문(自問)과 자성(自省)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표절' 대신 '불행한 결과'로 쓰고 있다. 표절을 했으나 선한 의도를 갖고 있었으며, 단지 결과가 불행했을 뿐이라는 식의 시선이 느껴지는 게 나뿐일까.

정우영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의 말처럼 "필사로 자신을 단련해온 작가로 알려져 온 만큼 작가가 필사한 부분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표절에 이르렀을 가능성"도 고려할 만하다. 의도하지 않은 표절의 가능성이다. 역시 신중한 발언이다.

법학자 남형두는 <표절론>(2015)에서 표절의 일반적인 정의를 '해당 분야의 일반지식이 아닌 타인의 저작물 또는 독창적 아이디어를 적절한 출처 표시 없이 자기 것인 양 부당하게 사용하는 행위'로 정의했다. 이에 따르면 남의 것을 훔치는 '절취행위'와 속이는 '사기행위'를 '인식'하면 표절자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표절이 성립한다.

이번 표절 논란의 시발점이 된 신경숙의 <전설> 한 문단은 표절 대상작인 <우국>의 해당 문단과 매우 흡사하다. '절취'니 '사기'니 하는 건조한 법적 개념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상식적인 일반인의 눈에 거의 똑같이 보이므로 명백한 표절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나름대로 신망 있어 보이는 문학계 내부자들이 '불행한 결과'니 '무의식적으로 표절에 이르렀을 가능성'이니 하는 식으로 신중하게 발언하는 이유는 뭘까. 신경숙이 살아있는 '권력'이어서만은 아닌 듯하다. 내부 비판에 따른 심리적·현실적 부담감 외에 표절 행위를 규정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신경숙이 훔치고 속이는 행위를 '인식'했을까. 쉽게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 언젠가 신경숙은 훔친 게 아니라 빌려온 것이며, 속이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진실 여부는 신경숙 자신을 제외하면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다.

논란이 거세지면 법정에 갈 수밖에 없다. 이미 그렇게 될 조짐이 보이고 있다. 현택수 한국사회문제연구원장이 신경숙을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창비를 속이고 인세를 취득했으니 사기와 업무방해 혐의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어떻게 될까.

남형두 교수가 <표절론>에서 펼친 논리에 따르면 표절에 관한 법적 공방은 '무혐의'로 나올 가능성이 높다. 한국 법원은 미국 법원과 달리 '의도성'을 중시하며 이에 관한 판례도 있기 때문이다. 신경숙이 문학 창작 과정의 특수성을 내세우며 의도성이 없었다는 논리를 펼치면 이응준이 제기한 표절 논란은 또 다시 한바탕 '소란'으로 문단사에 기록될 것이다.

이응준은 현택수 교수의 검찰 고발에 대해 "표절은 문학의 일"이라며 "검찰조사는 반드시, 즉각 철회돼야 한다. 미개사회가 될 수는 없다"라고 밝혔다고 한다. 그는 "글 쓰는 사람들이 글로 문제를 해결하길 바라고, 문학하는 사람들이 자정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애초 문제제기부터 글로 시작한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맞는 말이다. 이번 논란이 법정으로 가면 '진흙탕' 싸움 이상이 될 수 없다.

문학이 죽었다는 '풍문' 같은 말을 너무 많이 들었다. 그저 나온 말이 아닐 것이다. 학맥과 인맥으로 복잡하게 엮여 서로에게 입바른 소리를 내지 못한 채 갈수록 사회와 유리되어가는 문학계의 모습은 한숨만 나오게 한다.

그렇다고 이응준의 바람이 바람으로만 그쳐서는 안 되리라. 문학의 본령은 불온성과 전복성에 있다. 시인 김수영은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라고 말했다. 불온과 전복은 기존 질서와 체제에 맞서 그것을 뒤집어엎는 것이다. 문학인을 포함한 예술가들에게 (세속적이 아닌) 근본적인 도덕과 양심이 중요한 이유다. 이응준 작가의 목소리가 텅 빈 메아리로 그치지 않도록 문학인들의 뜨거운 발언이 이어졌으면 한다.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



태그:#신경숙, #이응준, #<전설> 표절, #미시마 유키오, #문학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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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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