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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사는 후배는 고등학교에서 '민중가요'를 대놓고 부르는 학교는 전국에서 유일할 거라고 말했다.
▲ 5. 18 음악회 행사를 알리는 배너 서울 사는 후배는 고등학교에서 '민중가요'를 대놓고 부르는 학교는 전국에서 유일할 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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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서울 사는 후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카톡에 올려놓은 사진과 상태 메시지를 보고 놀라 전화를 한 것이란다. 그가 근무하는 학교에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도발'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내 카톡에는 지난 20일 저녁에 연 '5.18 작은 음악회' 배너 사진이 올라 있고, 그 옆엔 '5월 광주를 학교 교정에!'라는 글이 덧붙여져 있다.

그의 설명은 이랬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자체가 금기어는 아니지만, 학교에서, 그것도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대놓고 '민중가요'를 부를 수 있느냐는 거다. 음반 시장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요즘엔 대학가에서도 여간해선 듣기 힘든 그런 노래들을 고등학생과 함께 부른다는 게 놀랍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러고도 '무사'하냐며 진심 걱정하는 말투였다.

연신 그는 말끝마다 '역시 광주'라며 되뇌었다. 다른 지역에서라면 학교에서는커녕 일반 공연장에서조차 엄두내지 못할 일이란다. 그것도 아이들 앞에서라면 십중팔구 '종북 좌빨' 교사로 몰려 몹쓸 짓 당할 수도 있는 위험한 행동이라고 했다. 5월 광주의 상징인 '임을 위한 행진곡'조차 제창하지 못하도록 몽니부리는 현 정부임에랴.

기실 4년 전부터 이어져온 이 행사의 공식 명칭은 '윤상원 열사를 기억하는 5.18 작은 음악회'다. 무대는 늘 교정에 세워진 그의 동상 앞이고, 행사의 맨 마지막 꼭지는 항상 모두 일어서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는 것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아이들에게 알리고 함께 부르며 윤상원 열사의 올곧은 정신을 기리는 것, 그것이 행사를 만든 이유다.

주지하다시피, '임을 위한 행진곡'은 5. 18 당시 시민군의 대변인이었던 윤상원 열사와 '들불 야학'의 동지였던 박기순 열사의 1982년 '영혼결혼식' 때 '축가'로 불렸던 곡이다. 노래의 주인공인 윤상원 열사의 모교에서 그를 기억하는 추모 음악회를 여는 건 하등 이상할 게 없다. 더욱이 그의 후배들이 그를 기리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한다는 건 권장할 일이지 백안시할 이유는 없지 않나.

아이들이 민중가요 좋아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편견

아카펠라로 도전한 이 노래는 아이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민중가요다. 노래하는 아이들 뒤로 피리를 불고 있는 윤상원 열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 아이들이 편곡해 부른 '솔아 솔아 푸른 솔아' 아카펠라로 도전한 이 노래는 아이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민중가요다. 노래하는 아이들 뒤로 피리를 불고 있는 윤상원 열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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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 김에 후배에게 짬을 내 이번 행사가 어떻게 기획되고 진행됐는지 설명해주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내심 아직도 5.18을 색안경 쓰고 보려는 척박한 서울 땅에서 이런 추모 음악회를 시도라도 해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4년 동안의 경험으로 확신하건대, 밋밋한 민중가요를 아이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편견이다. 그저 들어본 적이 없으니 낯설어할 뿐이다.

올해는 윤상원 열사가 10대 때부터 삶을 마감한 서른 살까지 쓴 '일기장'을 주제 삼아 행사를 기획했다. 추모 사업회에서 묶어낸 <윤상원 일기>의 제목은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대학 졸업 후 서울서 직장생활을 하던 그가 귀향을 하고, 야학 교사가 되어 힘들고 가난한 이웃들을 만나는 삶의 궤적을 노래에 담았다. 그들과 함께 불의한 세상에 맞서 희망을 노래했던, 그 순결한 영혼을 어린 후배들에게 보여주려 애썼다.

'해는 점점 뜨거워지는데, 점점 나태해져서야 되겠느냐. 해처럼 열기를 품자!' 그가 스물일곱 되던 해 5월 27일에 썼던 일기의 내용이다. 그렇듯 하루하루 치열한 성찰의 삶을 산 그는, 꼭 세 해 뒤 같은 날 도청을 마지막까지 사수하다 '화려한 휴가'를 즐기러온 공수부대의 대검에 몸이 찢긴 채 서른 해의 짧은 생을 마쳤다. 그렇게 그는 5.18의 상징적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5월 광주'를 떠올리는 '오월의 노래' 독창을 시작으로, 1990년대 민중가요의 신세대를 표방한 록그룹 천지인의 '청계천 8가'와 '희망을 위하여'가 이어졌다. 윤상원 열사가 들불 야학에서 동고동락한 가난한 이웃들의 삶, 그리고 그들과 희망을 노래하며 맞잡은 손을 떠올리기에 안성맞춤인 곡들이다. 태어나 처음 듣는 낯선 노래였을지언정 아이들은 노랫말을 음미하는 듯 고개를 끄덕여가며 공감했다.

몇몇 아이들은 음악 선생님의 지도로 '솔아 솔아 푸른 솔아'를 아카펠라로 소화해냈다. 조금 화음이 엉성하고 고음 처리에 힘들어했지만, 아이돌 그룹의 노래만 불러온 그들에게는 대단한 도전이었고 색다른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곡은 대중가수 MC 스나이퍼에 의해 리메이크된 적이 있어선지, 객석에서 따라 부르는 아이들도 여럿 있었다. 기실 이곡은 일기장에 '역경에 의연히 맞서자'고 적은 윤상원 열사의 다짐을 가장 잘 표현한 노래라 할 수 있다.

교회나 성당의 성가로도 애용되는 '바위처럼'을 율동을 섞어 함께 부르며 무거워진 분위기를 반전시킨 후, 어느덧 '제2의 교가'가 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며 행사를 갈무리했다. 특별한 객석도 마련되지 않은 40분짜리 스탠딩 야외 공연이지만, 끝나고도 아이들은 쉬이 자리를 뜨지 못했다. 행사 직후 스마트폰으로 공연된 곡을 검색해 다시 듣는 아이도 더러 있었다.

교실 스피커 통해 들려온 '청계천 8가'

십대 때부터 삶을 마감한 서른 때까지 쓴 그의 일기를 추모사업회에서 책으로 묶어냈다. '5. 18 음악회' 때문인지 덩달아 도서관에 와서 이 책을 찾는 아이들이 늘었다.
▲ <윤상원 일기> 표지 십대 때부터 삶을 마감한 서른 때까지 쓴 그의 일기를 추모사업회에서 책으로 묶어냈다. '5. 18 음악회' 때문인지 덩달아 도서관에 와서 이 책을 찾는 아이들이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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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며칠 뒤 느닷없이 교실의 스피커를 통해 '청계천 8가'가 들려왔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청소 시간 20분 동안 교내 방송으로 아이들의 신청곡을 틀어주는데, 대개는 아이돌 그룹의 '케이팝'이거나 귀에 익숙한 성가들이다. 그런데, 여느 때와는 달리 아이들에겐 여전히 생경할 수밖에 없는 민중가요를 애써 찾아 튼 것이다. 방송실에 이유를 물으니, 작은 음악회 때 들었던 그 곡이 너무 좋았더란다.

덩달아 도서관에 와서 <윤상원 일기>를 찾는 아이들이 부쩍 늘었다. 150여 쪽 분량의 문고판 크기의 이 책은 형광색 표지로 눈에 확 띄었지만, 아무도 찾지 않아 지금껏 서가의 한쪽에 먼지만 수북이 인 채 꽂혀 있었다. 5.18 작은 음악회가 윤상원 열사에 대한 기억을 불러냈고, 이는 <윤상원 일기>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것이다.

적어도 이젠 윤상원 열사를 모르는 아이는 단 한 명도 없다. 처음엔 교정에 있는 그의 동상을 아이들은 그저 '피리 부는 사람'으로 불렀다. 그 앞을 무대로 음악회를 열기 전까지는 부러 가서 동상 받침돌에 새겨진 글귀를 읽지 않으면 누구를 기리는 동상인지 알 수 없었다. 아이들이 가져다 놓은 건 아닐 테지만, 요즘 들어선 이따금 동상 앞에 국화가 놓이곤 한다.

<윤상원 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봤다는 한 아이가 도서관에 찾아와 책을 펴 보이더니, 정말로 그가 쓴 글이 맞는지 물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날짜를 보면 지금 자신과 똑같은 나이에 쓴 일기인데, 어떻게 이런 '철학자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느냐는 거다. 그가 읽고 놀랐다는 1968년 1월 23일자 일기 내용의 일부를 여기에 옮겨본다. 윤상원 열사가 갓 열여덟 살이 된, 고3 때다.

"돈과 사랑과 술…. 충분히 인생을 향락할 수 있을 게 아니냐. 그것보다 선각자들은 고통의 길을 택했다. 만약 그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이 세계가 이룩될 수 있었겠는가. 비록 훌륭하게 뛰어나지 못했다면, 그런 대열에서 세계를 밝히는 데 정열을 태워보고 싶다. 훌륭한 사람들의 글을 읽어볼 때 인간의 삶을 값있게 보내야겠다는 결심이 더욱 강렬하게 솟는다. 시간은 흐를 것이다. 잠시라도 헛되이 보낼 여유가 없다. 항상 노력해야겠다."

믿기지 않는다며 놀라워한 건 그지만, 정작 반성해야 할 사람은 교사인 나인지도 모른다. 낼모레면 성년이 되는 고3을 철딱서니 없는 아이로 만들어버린 '죗값'을 받아야하는 건 기성세대이고, 그들을 가르치는 교사일 테니까. 고작 서른 해의 불꽃같은 삶을 기록한 그의 일기는 헛되이 마흔 다섯의 세월을 보낸 나를 참으로 부끄럽게 만든다.

윤상원 열사를 선배로 둔 아이들이 부럽고, 그가 졸업한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는 게 너무나 자랑스럽다. 내내 가만히 듣고만 있던 후배는 이런 내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언젠가 그가 근무하는 학교에도 뜨거웠던 '5월 광주'의 정신이 움트리라 확신한다. '윤상원 열사를 기억하는 5. 18 작은 음악회'는 내년에도 계속된다.

○ 편집ㅣ최유진 기자



태그:#5. 18 광주민주화운동, #윤상원, #임을 위한 행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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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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