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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최초의 기록물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넘어 넘어') 영문판 저자 중 한 명인 팀 샤록(Tim shorrock)이 26일 국회 정론관에서 열린 '넘어 넘어' 영문판 재출판을 위한 국회의원 공동성명 발표 기자회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팀 샤록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미국 행정부 고위 관리들과 전두환 신군부 사이에 오간 비밀 전문(이른바 '체로키 파일')을 공개해, 당시 미국의 5·18민주화운동 개입 전략을 밝혀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최초의 기록물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넘어 넘어') 영문판 저자 중 한 명인 팀 샤록(Tim shorrock)이 26일 국회 정론관에서 열린 '넘어 넘어' 영문판 재출판을 위한 국회의원 공동성명 발표 기자회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팀 샤록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미국 행정부 고위 관리들과 전두환 신군부 사이에 오간 비밀 전문(이른바 '체로키 파일')을 공개해, 당시 미국의 5·18민주화운동 개입 전략을 밝혀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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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19일,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와 서울에 살던 9살짜리 미국인 소년에게 거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가는 한국 청년들의 모습은 충격이었다. 시민들의 함성과 피 흘리는 부상자들을 두 눈으로 목격한 소년은 다음날 생애 처음으로 신문기사를 오려 클리핑했다.

미국으로 돌아가 대학을 졸업한 뒤, 인쇄공장 육체노동자로 일하면서 노조와 연관을 맺었다. 그러나 고용주는 노조원 전체를 해고해 버렸다. 그는 1930~1940년대 강성했던 미국의 노조운동이 왜 이렇게 허약해졌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한국전쟁 이후 거대한 반공 운동이 미국의 노동운동마저 파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냉전이 아시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에 갔다.

"한국 측은 질서회복을 위해 무력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미국 오리건대학교 대학원에서 미국과 한국의 관계, 한국의 노동운동을 연구한 그는 30세에 기자가 되어서 다시 한국을 찾았다. 그리고 그가 다시 목격한 것은 피로 점철된 광주의 참상이었다. 그는 4년 뒤인 1985년 재차 한국을 방문해 5.18 민주화운동으로 수감됐다 풀려난 광주 시위대를 찾아다니며 그들의 증언을 취합했고, 광주의 진실을 취재수첩에 담았다.

미국 정부는 1989년 한국 국회 '5·18 진상조사특위'의 질의에 대해 "한국 당국은 5월 18일 0시 1분 시작된 비상계엄 확대선포 2시간 전에 이를 미국에 통보했다. 그러나 미국은 정치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대학과 국회를 폐쇄하려는 의도를 사전에 알지 못했다"고 발뺌하는 답변서를 보냈다.

미국 정부의 답변이 거짓이라고 판단한 그는 1996년 정보공개법(FOIA)을 통해 광주항쟁 관련 미국 국무부의 비밀 해제 문건, 이른바 '체로키(Cherokee) 파일'을 입수해 폭로했다. 카터 대통령의 한국 담당 비밀대책팀과 전두환 신군부 사이에 오간 비밀 전문이 담겨 있는 이 파일을 통해 미국의 5·18민주화운동 개입 전략을 최초로 세상에 알린 것이다.

당시 카터 행정부 크리스토퍼 국무부 부장관이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에게 보낸 1980년 5월 8일 자 극비전문에는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한국 측의 비상계엄계획(contingency plan)에 대해 반대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 대해 우리는 동의한다"라고 쓰여 있다.

또한, 전두환과의 면담 이후 글라이스틴이 보낸 그 다음 날(5월 9일 자) 보고서에는 "학생시위와 안보 상황에 대한 매우 긴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짐작건대 전두환 장군은 나의 태도가 우호적(sympathetic)이라고 생각했을 거라고 본다"라고 적혀 있다.

특히 광주시민에 대한 학살이 자행된 직후인 5월 22일 백악관에서는 국무부, 백악관, 국방부, CAI, 합참, NSC가 참석한 한국 관련 최고위급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의 결론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광주에서의 상황에 대한 미국의 태세 : 지금까지 한 것 이상으로 무엇을 할 필요가 없다는 데 동의하였다. 우리는 온건조치에 대해 협의했지만, 무력사용을 배제하지 않았다. 한국 측은 질서회복을 위해 무력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만약 미국의 묵인이나 지원이 없었다면 광주의 비극은 시작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미국이 5·17 이전 신군부의 비상계엄과 군대를 통한 무력진압에 동의했다는 이 중요한 내용을 폭로한 주인공은 바로 미국 탐사전문기자 팀 샤록(Tim Shorrock.64)이다.

광주광역시는 지난 21일 광주항쟁의 진실을 밝히고 세계에 널리 알린 공로를 인정해 팀 샤록을 초청, 광주 명예시민증을 수여했다. 그가 체로키 파일을 폭로한 지 19년 만이다. 글로리아 스타이넘 등 세계적 여성 시민운동가들이 DMZ를 통과하는 '위민 크로스 DMZ(Women Cross DMZ)' 행사를 취재하기 위해 서울을 방문한 그를 지난 23일 인터뷰 했다. 다음은 팀 샤록과의 일문일답 요지이다.

"광주 명예시민, 늦은 감 있지만... 퓰리처상보다 큰 영광"

- 광주 명예시민이 된 소감이 어떤가?
"커다란 영예이다. 정부가 잘못을 저지를 때, 정의를 위해 일어서는 것은 시민의 의무이다. 행사 당일(21일) 광주 망월동 묘지에 가서 그런 시민의 의무를 다하려 일어섰다가 쓰러져간 희생자의 묘역을 참배했다. 시민으로서 나의 임무는 나의 (미국) 정부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런 사실을 밝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체로키 파일을 찾아낸 것이다. 미국은 광주항쟁에 대한 사실을 왜곡했고, (한국) 병력 이동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

내가 광주 명예시민이 됐다는 것은 우리가 영원히 연대한다는 의미이다. 저널리스트로서 상을 받은 적은 없다. 진실을 밝혔다는 이유로, 한 도시의 명예시민이 됐으니, 퓰리처상을 받는 것보다 큰 영광이다."

- 체로키 파일을 폭로한 지 19년 만에 광주 명예시민이 되어 그 공을 인정받았는데, 너무 늦은 것 아닌가?
"늦은 감은 있다. (웃음) 그동안 광주에서 한 번도 나를 초청한 적이 없었다. 결정은 그들이 하는 것 아니겠나. 그래서 이번 명예시민 수여 결정에 완전히 놀랐다. 한 도시의 명예시민이 된다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광주는 매우 특별한 도시가 아닌가. (항쟁 기간 동안) 의료품과 식료품을 서로 나누었고, 헌혈도 서로 해줬다. 공동체 정신(communal spirit)이다. 이런 사실을 세계가 알아야 하고,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게다가 호남이 오랫동안 받아왔던 편견을 생각해 보라. (과거에) 타지 사람들은 전라도 지방 사람들을 업신여겼다. (한국의) 보수 세력들이 이러한 사실을 깎아내리는 것은 볼썽사나운 노릇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최초의 기록물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넘어 넘어') 영문판 저자 중 한 명인 팀 샤록(Tim shorrock)이 26일 국회 정론관에서 열린 '넘어 넘어' 영문판 재출판을 위한 국회의원 공동성명 발표 기자회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팀 샤록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미국 행정부 고위 관리들과 전두환 신군부 사이에 오간 비밀 전문(이른바 '체로키 파일')을 공개해, 당시 미국의 5·18민주화운동 개입 전략을 밝혀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최초의 기록물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넘어 넘어') 영문판 저자 중 한 명인 팀 샤록(Tim shorrock)이 26일 국회 정론관에서 열린 '넘어 넘어' 영문판 재출판을 위한 국회의원 공동성명 발표 기자회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팀 샤록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미국 행정부 고위 관리들과 전두환 신군부 사이에 오간 비밀 전문(이른바 '체로키 파일')을 공개해, 당시 미국의 5·18민주화운동 개입 전략을 밝혀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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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인이 생각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의미는 무엇인가?
"미국은 그전까지만 해도 한국을 이상적 동맹국으로 여겼다. 한국은 미국을 사랑하고, 미국이 원하는 대로만 한다고 믿었다. 베트남에 파병도 해주고. 그 탓에, 미국의 관변 이론가들은 한국을 좋아했다. 다른 동맹국에 비해 유별났기 때문이다. 광주항쟁은 그런 점에서 전환점이었다.

내가 80년대 광주를 갔을 때, 많은 사람은 (광주항쟁 당시) 미국이 한국의 민중을 지지하고,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이뤄지는 것을 바란다고 믿었었다고 하더라. 항쟁 도중 미국이 한국으로 항공모함 코럴시를 보냈을 때, 미국이 항쟁을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믿었다고 말했다. 그 당시 시민들이 그런 식의 순진한 생각을 했다는 것은 어쩌면 슬픈 일인지도 모른다. (나중에) 시민들은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배신당한 것이다.

국무성 차관보 리처드 홀부르크 같은 많은 미국인에게도 광주항쟁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들은 한국인들이 말을 잘 듣고 온순하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들도 한국을 업신여긴 셈이다. 당시 주한 미군 사령관 위컴은 한국인들을 들쥐(lemmings) 같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점에서 광주항쟁은 한국인의 대미 인식을 바꿔버렸다.

항쟁 몇 년 후, 사람들이 '미국 나가라'는 구호를 외치지 않았나? 그런 식의 구호는 이전에는 절대 나올 수 없었다. 반미감정의 시발점이 광주항쟁이었다. 미국 관리들은 한국인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박정희 치하에서 한국 시민들이 민주적 권리를 박탈당했지만, 경제가 성장하는 한,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나라가 부유해질수록 국민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미국 관리들이 충격을 받았다는 것인가?
"그렇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1979년 4월에 쓴 박정희에 대한 정보보고서를 읽어보면, 한국의 사회 역학에 대한 완전한 몰이해를 엿볼 수 있다. 정보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일부 학생시위가 있지만, 만사가 평온하다고 묘사돼 있다. 그 보고서가 나온 지, 불과 6개월 만에 독재자 박정희가 암살됐다. 부마항쟁도 그 전에 있었고, 1980년 봄에는 전국적 시위가 있지 않았나."

-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학 명예교수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미국은 한국보다 일본을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그 또한 사실이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을 아이 취급한다. 한일 양국의 역사 논쟁도 투닥거림으로 취급하고, 공동 방위 계획에 참가하라고 종용하지 않는가. 박근혜에게 일본에 대해 지나치게 비판적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일본의 아베 정권은 역대 최악의 보수 정권이고, 과거사에 대해 어느 것도 사과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친하게 지내라고 말하지 않는가. 미국 관리들은 아직도 한국을 모르고 있다."

- 한국에서 4.19 혁명을 지켜봤고, 미국 대학원에서 미국과 한국의 관계, 한국의 노동운동을 연구했다. 당신에게 한국은 어떤 나라였나?
"나에게 4.19 혁명은 억압적 정부에 맞서 시민들이 봉기하여, 그 정부를 패퇴시킨 것을 목격한 첫 경험이다. 참으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물론 학교에서 미국 독립혁명,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 배웠지만, 모두가 과거지사로 느껴지지 않는가. 그런데 4.19 혁명은 실존적 경험이었다.

한국전쟁은 여러 면에서 전환점이었는데, 미국은 군사력을 다시 키우기 시작했고, 미국 내 노동운동은 공격을 받았다. 따라서 냉전의 시작점인 한국전쟁과 미국의 노동·대중운동에 대한 억압은 상호연관성이 있었다. 그래서 냉전이 아시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에 갔다. 그때가 1979~80년인데, 미국신문을 통해 한국의 경제 기적을 칭송하는 기사도 읽고, 전태일 분신 사건에 대한 기사도 읽었다.

특히 당시에는 (한국) 여성노동자의 투쟁이 두드러졌는데, 나는 당시 이런 것을 열심히 모니터했다. YH 여공의 신민당사 농성과 진압 과정에서 여공 하나가 떠밀려 추락한 일도 알게 됐다. 이에 뒤따른 부마항쟁도 열심히 모니터했다. 박정희가 암살당하자, 전두환 일당이 권력을 장악하려 한다는 소식도 들었다. 한국에서 군부가 권력을 장악할 거라는 기독교 조직의 보고서도 접했다. 거의 매일매일 그런 소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미국이 광주시민을 기만하고 배신.... 부끄럽다"

-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상을 취재하게 된 배경은?
"광주항쟁이 일어나자, '올 것이 왔다'고 믿었다. 미국이 사태의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것을 즉시 짐작할 수 있었다. 1981년, 저널리스트로서 한국을 방문했는데, 광주의 취재원을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도시산업선교회 선교사의 도움으로만 가능했다. 노조는 정부 통제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의 공식입장은 광주항쟁을 한국의 극좌 소요로 치부했고, 군대의 진압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하고 있었다. 1985년에 다시 광주를 갔는데, 당시 감옥에서 석방된 많은 광주 시위대를 만나, 그들의 증언을 취합할 수 있었다. 서울에서는 이부영의 동료들 도움으로 경찰 감시망을 따돌리고, 가택 연금 중이었던 김대중을 만나 인터뷰했다. 이 수많은 만남 하나하나가 감동적이었다.

당시 목포도 갔었는데, 모든 곳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진상을 세상에 알려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모두 미국에 배신당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미국을 믿었고,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는지 미국은 알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이 일을 알려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고, 내 나라(미국) 정부가 이들을 기만하고 배신했다는 것에 깊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 5.18 민주화운동의 진실을 담고 있는 이른바 '체로키 파일'은 어떻게 공개하게 됐나?
"1989년 한국 국회에서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조사가 시작되자, 미 정부에서 이에 대한 대응으로 백서를 발행했는데, 읽어보니 모두 거짓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백서에서 공개된 회의 날짜 등의 정보를 기반으로 정보공개법(FOIA)을 통해, 모든 정보 공개를 요구했다.

백서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광주항쟁 당시) 제7공수여단의 이동을 몰랐다고 했으나, 공개된 문건은 미 정부가 이 모든 것을 상세히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줬다. 7공수여단이야말로 진압 살인의 주역이었다. 미국이 진압명령을 하지는 않았지만, (한국 군부의) 누가 어떤 명령을 내렸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외면한 것이다.

당시 국방정보국(Defense Intelligence Agency: DIA)의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의 공수부대가 1979년에 부산과 마산에 동원됐을 때, 극단적 폭력을 보여줬음을 잘 알고 있었다. 미군 정보관계자들은 전두환이 장악한 공수부대의 악명을 잘 알고 있었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휩쓴 후, 취재를 갔었을 때, 당시 시민들도 제발 이 사실을 세상에 알려달라고 애원했다. 말하자면, 광주와 목포 시민들도 (나에게) 같은 애원을 한 것이다."

- 당신이 폭로한 체로키 파일로 인해 미국 정부의 거짓말이 드러났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이에 대해 사과하거나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 아닌가?
"미국의 공식입장은 '한국인이 한국인을 죽인 사건으로 미국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이다. 미국은 방관자였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은 이란 이슬람교 혁명으로 난처한 처지였고, 한국이 제2의 이란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한국 사태를 봉쇄하려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중동과 극동에서 동시에 어려운 사태를 직면하게 될 테니 말이다. 그게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었다.

또한, 한국 군부 내의 분열도 크게 염려했다. 12.12사태 당시 노태우가 전방에서 9사단을 동원했을 때 미국은 분노했지만, 비슷한 사태가 재연되지 않도록 한국 군부를 달랬다. 심각한 군기 위반이 아닐 수 없었지만, 그냥 덮어버렸다. 군부 내 분열을 더 우려했기 때문이다. 전두환의 권력 장악에 대해서 수수방관한 셈이다. 전두환에게도 지나치게 행동하지 말라고 할 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광주항쟁이 일어나자, (미국 정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1980년 5월 22일 백악관 (최고위)회의 직후 나온 메모를 살펴보면, 미국은 한국 군부를 지지해야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반면, 항쟁 지도자 윤상원은 미국의 중재 하에 군부와 협상하려고 했다. 이 제안에 대해 당시 미국 대사였던 글라이스틴에게 나중에 내가 질문을 한 적이 있는데, 그는 '우리는 윤상원이 누구인지도 몰랐다'고 말했다. 윤상원이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미국은 이미 군부를 지지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 5.18 민주화운동으로 많은 시민이 피해를 당하였지만, 미국은 여전히 한국의 군사정권을 지지했는데.
"내가 가장 화가 나는 대목은 1980년 6월 미국의 수출입은행(US Export Import Bank)의 총재가 한국에 와서 6억 불 차관을 승인한 것이다. 미국이 정말 한국 군부를 압박했으려고 했으면, 차관부터 중지해야 했다. 말하자면, 광주에서는 아직도 희생자를 매장하고 있는데, 미국은 국책은행 총재를 서울로 보내, 차관 보증을 해 준 것이다. 군부가 사람을 죽여도 여전히 미국은 그들을 지지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모든 게 미국 기업들의 거대한 자금 영향력 때문이다. 미국 투자가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게 정말 혐오스러웠다. 미국 정부는 모두 국가 이익 때문이라고 하겠지. 그러나 미국의 천안문 사태에 대한 대응(1989년 6월 천안문 사태 진압 과정에 대한 비판)과 광주항쟁에 대한 대응을 비교하면, 천양지차이다. 서글픈 일이다. 그 시절을 돌이켜 보면, 나도 가끔 (미국 정부 측) 대응의 비인간성에 충격을 받는다."

[인터뷰 ②] "미국 사이버 댓글 부대? 보수층부터 분노했을 것"

○ 편집ㅣ손병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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