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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이호정 선생님, 정다한, 신용섭, 양병창
 왼쪽부터 이호정 선생님, 정다한, 신용섭, 양병창
ⓒ 박병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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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은 참 신기하다. 맨발로 밟을 때는 땅의 숨결이 섞인 향기를 피워 올리지만, 손으로 만질 때는 마음에서 나온 그대로 모양을 만들 수 있다. 흙을 빚는 것은 곧 마음을 빚는 것이고, 마음을 빚다 보면 이것이 언젠가는 나의 꿈이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품게 된다.

흙으로 빚을 수 있는 것들은 무척 많다. 눈에 보이는 것부터 보이지 않는 것까지, 세상에 있는 것부터 없는 것까지 흙은 사람의 손에 이끌려 자신의 모습을 바꾼다. 꿈이란 결국 자신의 모습을 자신이 결정하는 대로 바꾸는 것. 흙을 빚는 것은 어쩌면 꿈을 빚는 것일 수도 있다.

'흙수다' 친구들을 만나다

지난 23일 토요일, 한여름 같은 햇볕이 내리쬐던 날, 경기도 부천 춘의동에 있는 어느 공방을 찾아갔다. 바리바리 싸들고 간 떡볶이와 순대를 본 아이들이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상이 '장애 청소년'이라 부르는 그 아이들은 겉으로 보기엔 여느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장애 등급제는 아이들을 '지적장애 2급', '자폐성장애 2급', '지적장애 3급'으로 분류할 뿐이다. 아이들과 말 한마디 제대로 섞어 보지도 않은 채 말이다. 공방 안은 아이들 셋과 선생님 한 분이 작업하기엔 비좁아 보인다. 낮 2시부터 시작되는 수업이지만, 아이들은 둘 뿐이다. 용섭이가 아직 안 왔다고 했다.

'흙수다' 1기생 정다한
 '흙수다' 1기생 정다한
ⓒ 박병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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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섭이 형은요.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걸 좋아해요."

다한이가 말한다. 공방 안 탁자에 먹을거리들을 늘어 놓자 병창이도 다가와서 앉는다.

"기자님, 뭐 물어보러 오신 거예요?"
"아무 생각 없이 왔어요. 여기 와서 이런저런 얘기 나누다 보면 궁금한 것들이 생기지 않을까 해서요."

공방 구석에서 수업을 준비하던 이호정 선생님도 탁자로 와서 앉는다.

"호근이도 있었으면 좋을 텐데. 지금 시골 내려가 있어요. 지금은 아이들 셋이랑 저뿐이니 뭐든 물어보세요."

'흙수다' 1기생 양병창
 '흙수다' 1기생 양병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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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한이와 병창이가 젓가락을 들고 떡볶이와 순대를 먹기 시작한다. 이호정 선생님도 옆에서 몇 점 집어 먹는다.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밖에서 자전거 소리가 들리더니 용섭이가 등장한다. 이호정 선생님은 금세 엄한 모습으로 변해 왜 늦었는지 묻는다. 용섭이가 횡단보도 초록불이 늦게 켜졌다고 더듬거리며 대답한다. 그러나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수업이 2시 시작인데 2시에 출발하면 어떡하니?"

'흙수다'가 결성되기까지

용섭이까지 앉자 공방 안은 금세 북적북적해진다. 떡볶이와 순대도 어느덧 바닥이 났다. 우린 떠오르는 대로 아무렇게나 잡담을 시작했다. 나이 얘기, 소풍 가서 졸업 사진 찍은 얘기, 좋아하는 음식 얘기, 여자 친구 얘기, 서로의 장·단점 얘기, 그러고 보니 아이들은 모두 18살 아니면 19살. 고등학교를 다니는 청소년들이다.

용섭이가 자전거 타는 걸 무척 좋아한다고 해서 용섭이의 자전거를 보러 밖으로 나갔다. 아이들이 우르르 쫓아 나온다. 찌르릉 울리는 경적 소리가 맑고 경쾌하다.

다시 공방으로 들어가려다 유리창에 붙은 '작품' 사진들을 보았다. 사진 구석에는 아이들의 이름이 각각 적혀 있다. 용섭이, 다한이, 병창이, 그리고 이 자리에 없는 호근이는 장애 청소년 도예 직업 교육 모임인 '흙수다' 멤버들이다. 사진 속 도자기 작품들이 꽤 멋지다. 흙수다 아이들이 만든 작품은 전국 장애인 도예 공모전에서 2014년과 2015년 연속으로 상을 탔다.

'흙수다' 1기생 신용섭
 '흙수다' 1기생 신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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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탁자에 둘러앉았다. 아이들을 보며 물음을 던졌다.

"바깥에 붙어 있는 작품들 정말 멋있던데, 얼마나 연습하면 저렇게 만들 수 있어요?"

앞서거니 뒤서거니 아이들의 대답이 쏟아져 나온다.

"용섭이 형은 고1 때부터 했으니까 이제 2년?"
"병창이는 호정쌤이랑 유치원 때부터 봤으니 10년 넘었어요."
"다한이는 호정쌤 처음 만난 게 열 살 때니 이제 8년 됐네."

이호정 선생님이 흙수다의 '역사'를 덧붙여 말한다.

"처음엔 장애 청소년이 아니라 대여섯 살짜리 장애 '아동'이었죠. 제가 예전에 부천 고강동 복지관에서 장애 아동들이랑 일주일에 한 번 도자기 수업을 했어요. 근데 아이들과 함께 흙 만지는 게 너무 좋은 거예요. 그 수업이 쭉 이어지다가 아이들이 나이를 먹으며 장애 청소년이 된 거죠. 아이들이 고등학생이 되니 직업 교육을 나가는데, 공장에 가서 견학하고 부품 끼우고 하는 것만 시키니까 불만이 많았어요.

얼마든지 다른 것도 할 수 있는 아이들인데. 그래서 이 아이들과 도자기로 먹고살 수 있는 뭔가가 없을까 고민하다가 2013년쯤에 '통합예술나눔터(통예나)'라는 단체를 준비했고, 아이들이 이쪽 통예나 공방으로 옮겨 온 거예요. 그러면서 흙수다 팀이 결성됐죠."

공방 유리창에 붙어 있는 '흙수다' 아이들의 작품 사진
 공방 유리창에 붙어 있는 '흙수다' 아이들의 작품 사진
ⓒ 박병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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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력만큼은 흙수다에서 으뜸이라는 병창이가 말한다.

"여기 옆에 있는 공방에서 '7인의 통예나'라는 이름으로 맨 처음 시작했어요."

그러자 모두가 손뼉을 치며 맞다고 한다. 이호정 선생님이 이어 이야기한다.

"그때는 저와 이정현 선생님(이호정·이정현 선생님은 '공예 놀이 콘텐츠 개발 및 장애인 직업 전환 도예 교육'을 위해 만들어진 단체 통예나의 공동 대표다), 그리고 아이들 다섯이랑 모두 일곱 명이었어요.

그래서 '7인의 통예나'로 시작했는데 아이들이 워낙 수다가 심해서 (웃음) 차라리 흙수다가 어떠냐고 물어보니 다들 좋다고 했죠. 여기는 복지관과 달리 공방이라 도자기가 만들어지기까지 모든 과정을 함께 작업할 수 있어요. 뒷정리나 청소하는 법도 배우고요."

"내년엔 대상 타야죠."

부천 통합예술나눔터에서 '흙수다' 아이들과 함께 흙을 빚는 이호정 선생님
 부천 통합예술나눔터에서 '흙수다' 아이들과 함께 흙을 빚는 이호정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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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도예 공모전에는 어떻게 나가게 됐느냐고 물었다. 이호정 선생님이 대답한다.

"전부터 공모전에 참여하고 싶었는데 여건이 안 되다가, 2013년에 이 아이들이 모아지면서 작년에 처음으로 도전했어요. 작년에 특선, 올해도 특선."

5월 초 흙수다 아이들은 이천에서 열리는 경기 세계 도자 비엔날레에 가서 직접 시상식에 참석했다. 상 타는 기분이 어땠는지 아이들이 이야기한다.

용섭이는 "뿌듯했죠. 두 번 탔잖아요."
병창이는 "내년엔 대상 타야죠. 특선은 질려요 이제."
다한이는 "대상 받으려다가 너무 무리하면 이상한 작품 나와."
이호정 선생님은 "얘들아, 계속 입선만 하는 친구들도 있어. 호호호."

흙수다 아이들의 소박한 꿈

2015 전국장애인도예공모전에서 특선을 수상한 '흙수다' 아이들의 작품
 2015 전국장애인도예공모전에서 특선을 수상한 '흙수다' 아이들의 작품
ⓒ 박병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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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어느덧 다한이의 장래희망으로 옮겨 갔다. 연기자가 꿈인 다한이는 주변에서 자기 꿈을 두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 너무 싫다고 한다. 이번에는 용섭이에게 꿈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도자기요. 도자기 계속 만들고 싶어요."

병창이도 질세라 자신의 꿈을 이야기한다.

"저는 바리스타가 될 거예요. 지금까지 3년인가 4년쯤 공부했어요."

"나중에 커피집 차리면 직접 만든 잔에 커피를 담아 손님에게 줘도 좋겠네요. 병창이가 커피집 차리면 내가 크게 기사 써 줄게요."

그러나 병창이에겐 기사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기자님, 혹시 외상으로 하실 건 아니죠? 남자는 일시불이에요."

모두가 깔깔대며 웃었다.

"야, 누가 커피를 할부로 사 먹냐?"
"병창아, 난 선불이 편하니 선불로 할게."

상장을 들고 기뻐하는 '흙수다' 아이들
 상장을 들고 기뻐하는 '흙수다'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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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호정 선생님은 이 아이들이 평생 도자기만 붙잡고 있기를 바라진 않는다.

"얘들아. 내가 너희들한테 도자기를 직업으로 삼으라고 강요하는 건 아냐. 이건 직업으로 할 수도 있지만 취미로 할 수도 있고 알바로도 할 수 있어. 그냥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재밌게 하는 게 중요한 거야. 알지?"

아이들은 다 알고 있다는 눈빛이다.

문득 재미난 물음이 하나 떠올라 아이들에게 던져 보았다.

"도자기의 신이 꿈에 나타나서 너희들에게 이 세상에서 최고로 멋진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딱 한 번 주겠다고 한다면 뭘 만들어 보고 싶어요?"

공방 탁자에 둘러앉은 흙수다 아이들과 이호정 선생님
 공방 탁자에 둘러앉은 흙수다 아이들과 이호정 선생님
ⓒ 박병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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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섭이, "집이요. TV에서 봤어요. 도자기로 만든 집." 모두가 우와 하는 탄성을 지른다.
병창이, "바리스타가 쓰는 커피잔이요. 많이 만들 수 있게 호정쌤한테 도와달라고 할 거예요."

이호정 선생님이 깔깔 웃는다.

"그래. 커피는 좋은 잔에 마시면 맛도 더 좋지."

다한이, "저는 집을 얻으면 쓸 수 있는 식기 위주로 만들 거예요."

병창이가 불쑥 묻는다.

"기자님은 카메라 만들고 싶지 않아요?"
"일하는 데 쓰는 지긋지긋한 카메라를 왜 또 도자기로 만드니?"

기자의 대답에 다들 큭큭거리며 웃는다.

같이 살아간다는 것

흙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흙수다 아이들
 흙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흙수다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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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수업이 끝날 시간이 돼 있었다. 나는 몸 둘 바를 모른 채 머리를 조아렸지만 아이들은 기자님 자주 오시라고 웃으며 말했다. 이호정 선생님도 크게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짐을 싸고 일어나자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 작업을 하기 위해 자리를 잡고 이호정 선생님도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공방에서 나오기 전 이호정 선생님께 몇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부천시에서 나오는 지원 같은 건 없어요. 하지만 부천 문화 예술계 쪽에 있는 사람들이 참 좋아요. 우리 아이들 만나도 당황하지 않고 잘 보듬어 줘요. 장애 청소년이라 불리는 아이들과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포용력이 있는 분들이죠. 그리고 딱히 부천시가 뭘 해주기를 기대하지도 않아요. 시에서 공간을 준다고 해도 아마 저는 임대받은 것처럼 불안할 거예요. 나가라면 나가야 하니까요.

공간이 되게 열악해요. 덩치가 어른만 한 흙수다 아이들 넷과 같이 쓰다 보니 너무 비좁죠. 그리고 공방은 원래 가마가 별도의 공간에 있어야 해요. 가마를 때면 몸에 안 좋은 것들이 많이 나오거든요. 또 아이들이 이젠 손 작업은 어느 정도 할 줄 아니 이젠 전동 물레(전기로 돌아가는 물레)를 써야 하는데 그게 너무 비싸니 구입할 엄두를 못 내고 있어요. 아이들이 네 명이니 전동물레도 네 개가 필요한데 그게 총 6백만 원이에요.

서울 희망제작소에서 일 년에 두 번씩 하는 '모금학교'라는 게 있어요. 이번 모금 학교 실습에 저희 통예나가 운 좋게 선정이 됐어요. 그래서 곧 전동 물레 구입을 위한 모금이 진행될 예정이에요. 그게 있어야 아이들이 계속해서 도자기를 배울 수 있거든요.

흙수다 아이들과 저의 가장 큰 목표는, 그냥 이렇게 같이 살면서 함께 늙는 거예요. (웃음) 지금은 어떻게든 흙수다를 널리 알려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앞에 '장애 청소년'이라는 말을 붙이는데요. 나중에 십 년 이십 년 계속 부천에서 사람들과 지내다 보면 굳이 그 말을 붙이지 않아도, 용섭이는 뭘 잘하고 다한이 병창이 호근이는 또 뭘 잘한다더라, 그렇게 인식될 수 있을 거예요. 장기적으로는 그렇게 된다면 정말 좋겠죠.

근데 단기적인 목표는 일단 아이들이 안전하게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거예요. 그래야 아이들도 스무 살 넘어서 독립할 수 있을 테니까요. 전동 물레 모금도 그래서 진행하려는 거고요. 아이들 부모님과는 이런 얘기도 해요. 나중에 건물 하나 사서 1층엔 커피집 차리고, 2층엔 도자기 작업실 꾸미면 참 좋겠다. 그게 정말 꿈같은 얘기라는 건 다 알아요. 하지만 그게 아니어도 괜찮아요. 우리 이렇게 살고 있는 거, 나쁘지 않아요. 그냥 이렇게 쭉 가는 거? 그걸 바라는 거예요. 같이 살아가는 거."

여주에서 열린 장애인도예공모전 시상식에 참여하러 간 흙수다 아이들과 이정현 선생님
 여주에서 열린 장애인도예공모전 시상식에 참여하러 간 흙수다 아이들과 이정현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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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수다 아이들의 위대한 꿈

춘의동 공방을 나오는데 어느새 햇살이 주홍빛으로 변해 있었다.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장애인'이라 부르는 흙수다 아이들의 꿈은 소박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 그리고 곁에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언제까지고 함께 살아가는 것.

하루의 햇살이 지듯 시간은 흘러갈 것이고 아이들은 곧 성인이 될 것이다. 이 세상은 '장애인'들이 섞여 살기에 여전히 만만치 않다. 흙수다 아이들에게 도자기는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을 표현하는 수단이자, 세상 사람과 소통하기 위한 통로일 수도 있을 것이다.

흙수다 아이들이 도자기 작업을 하는 공간. 전동물레가 없으면 아이들의 도자기수업은 제자리걸음일 수밖에 없다.
 흙수다 아이들이 도자기 작업을 하는 공간. 전동물레가 없으면 아이들의 도자기수업은 제자리걸음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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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이미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고 있다. 그리고 비좁은 부천 춘의동 공방에 매주 토요일마다 모여, 자신의 마음을 빚고, 꿈을 빚는다. 언젠가는 이 세상 속에서 당당한 한 사람으로서 오롯이 서는,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꾸준히 살아가는, 그런 꿈.

방금 했던 이야기를 수정해야겠다. 흙수다 아이들의 꿈은 소박하지 않다. 그들의 꿈은 '비장애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고, 그만큼 평범하며, 그만큼 위대하다. 흙수다 아이들에게 앞으로도 계속 따뜻한 인연들이 함께 하기를 빌어 본다.

'완전체' 흙수다 아이들이 작업하는 모습
 '완전체' 흙수다 아이들이 작업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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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조혜지 기자



태그:#통합예술나눔터, #통예나, #흙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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