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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시계> 표지
 <할아버지의 시계> 표지
ⓒ 느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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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는 1929년 생, 일제강점기 광주학생 항일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이북 땅, 평양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1930년대는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시작하던 때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한반도를 병참기지로 만들던 때였습니다. 한반도에는 군수공장이 세워지고 전쟁 무기를 생산하기 위해 세숫대야, 숟가락까지 공출해갔습니다. 전시 식량 조달을 위해 산미증식계획을 하며 노동력을 착취하고, 쌀을 강제로 수매해 모두 일본 땅으로 전쟁터로 가져가버려 이 땅 백성들을 굶주림에 허덕이게 했습니다. 이러한 때에 내 아버지는 나고, 자라야만 했습니다.

1945년 한반도는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지만 5년 뒤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습니다. 이제 아버지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같은 민족에게 총구를 들이대며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역사의 격동기를 온 몸으로 겪어내신 아버지는 그렇게 이 땅의 살아있는 역사책이 되셨습니다. 

홍성찬 선생님은 1929년 생, 우리나라 1세대 일러스트레이터로 불리는 분입니다. <할아버지의 시계>는 선생님이 82세 되던 해 2010년에 만들어졌습니다. 켜켜이 쌓아놓은 세월 내내 그림책으로 살아오신 선생님의 삶을 고스란히 담은 채 말입니다.

그림책을 넘기며 들을 수 있는 글작가의 목소리는 정겨운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엄마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조용히 가슴에 스며드는 시낭송 같기도 합니다. 어두운 세상 속에서도 늘 반짝이는 것들을 찾아내는 글작가 윤재인 선생님의 목소리입니다. 홍성찬 선생님의 그림과 윤재인 선생님의 글이 어우러져 <할아버지의 시계>는 항아리 속에서 잘 발효된 구수한 된장 같은 맛이 납니다.

'할아버지가 태어난 날 처음 우리 집에 온 귀한 손님'은 바로 '시계'입니다. '똑딱똑딱' 가다가 정각이 되면 '땡땡' 울리기도 하는 괘종시계입니다. 시계는 대청마루에 걸려 할아버지의 가족이 됩니다. 할아버지가 엄마 품에서 칭얼대는 모습도 보고, 고모할머니가 혼례를 치르는 모습도 봅니다. 아버지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모습도 봅니다.

그렇게 할아버지 나이만큼 시계도 세월을 먹습니다. 눈이 펑펑 내리는 날, 할아버지는 가족들과 영원히 헤어집니다. 할아버지도 할아버지의 시계도 깊이 잠이 듭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시계는 먼지 쌓인 다락에서 조용히 쉬고 있습니다. 그래도 언제나 할아버지의 시계는 소중한 우리 집 식구라고 이야기 하네요.

<할아버지의 시계>는 단출한 이야기 속에 긴 세월을 담았습니다. 흑백 사진첩을 보는 듯한 장면은 오랜 시간 던져 둔 어릴 적 앨범을 보는 듯합니다. 볼펜으로 그려진 거친 선은 온갖 세상 일 다 겪어내신 할아버지의 시간들을 대바늘뜨기로 뜨개질한 것처럼 한올 한올 표현하였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물건들이 쏟아져 나오는 세상, 화려하고 빛나는 것들만 좋아하는 세상, 조금만 싫증나도 던져버리고 새 것을 장만하는 세상에서 <할아버지의 시계>는 오래된 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오래된 것들은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세상의 지혜를 여기저기에 숨겨두고 있어 참 아름답습니다. 할아버지의 주름지고 거친 손처럼 모진 세월 이겨 내온 힘이 담겨 있어 참 아름답습니다. 세상만사 희노애락 사람과 사람, 사랑과 행복이 들어있어 참 아름답습니다.

1929년 생,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시계처럼 이제 하늘나라에서 쉬고 계십니다. 힘써 사신 아버지의 삶은 우리 곁에 남아 지금도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1929년 생, 홍성찬 선생님은 이제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우리 곁에서 미소 짓고만 계셔도 서까래를 버티고 있는 든든한 기둥처럼 참 아름답습니다.

오래된 것들은 우리 아버지들처럼 그렇게 참 아름답습니다.

덧붙이는 글 | <할아버지의 시계> 윤재인 씀, 홍성찬 그림, 느림보 펴냄, 2010.06.10, 36쪽, 1만1000원



할아버지의 시계

윤재인 지음, 홍성찬 그림, 느림보(2010)


태그:#할아버지의 시계, #그림책, #느림보, #윤재인 글, #홍성찬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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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속 보물들을 찾아 헤매는 의미 탐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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