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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새벽 여명

새벽 여명과 함께 구름이 엷어지면서 비행기 창 아래로 대륙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희은-어디에도 없던 곳》(호미,2013) 15쪽

여명(黎明) : 희미하게 날이 밝아 오는 빛
새벽 : 먼동이 트려 할 무렵
먼동 : 날이 밝아 올 무렵 동쪽
새벽빛 : 날이 새려고 먼동이 트는 빛

 새벽 여명과 함께
→ 새벽빛과 함께
→ 새벽에 찾아드는 빛과 함께
→ 새벽을 밝히는 빛과 함께
→ 새벽녘 빛과 함께

'새벽 여명'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이 글월에서는 이러한 모습으로 나오지만, '새벽 여명'은 말이 안 됩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한자말 '여명'은 '새벽빛'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월대로 말을 한다면 '새벽 여명'은 "새벽 새벽빛"이라고 하는 셈입니다.

한국말은 '새벽빛'입니다. 이를 한자말로 옮기면 '黎明'입니다. 한자말을 쓰고 싶다면 "여명과 함께"처럼 글을 쓸 노릇이고, 한국말로 쓰고 싶다면 "새벽빛과 함께"처럼 글을 쓸 노릇입니다. 꾸밈말을 넣고 싶다면 "새벽에 찾아드는 빛과 함께"라든지 "새벽을 밝히는 빛과 함께"처럼 쓸 수 있습니다.

ㄴ. 회색빛

회색빛의 털이 북슬북슬한 캥거루는 여전히 오만했어
《러디어드 키플링/박성준·문정환·김봉준·김재은 옮김-아빠가 읽어 주는 신기한 이야기》(레디셋고,2014) 84쪽

회색(灰色) : 재 빛깔과 같이 흰빛을 띤 검정

 회색빛의 털이
→ 회색 털이
→ 잿빛 털이

'회색빛'처럼 적으면 겹말입니다. '흑색빛'이나 '백색빛'이나 '청색빛'이나 '적색빛'처럼 적어도 겹말입니다. 겹말일 뿐 아니라 말이 안 됩니다. 한자말로 '회색·흑색·백색·청색·적색'으로 적든지, 한국말로 '잿빛·까망·하양·파랑·빨강'으로 적어야 합니다. 더군다나 이 보기글에서는 '회색빛'처럼 겹말로 쓰면서 '-의'까지 붙여 "회색빛의 털"처럼 쓰고 맙니다.

ㄷ. 경험을 통하고 겪는

참된 당신이 누구인지를 경험을 통해서 온몸으로 알게 될 때 당신은 살면서 겪는 모든 일에 달관할 수 있다
《디팩 초프라/이현주 옮김-우주 리듬을 타라》(샨티,2013) 111쪽

경험(經驗) : 자신이 실제로 해 보거나 겪어 봄

 경험을 통해서 온몸으로 알게 될 때
→ 온몸으로 겪으며 알 때
→ 온몸으로 겪으면서 알 때
→ 온몸으로 알 때

한자말 '경험(經驗)'은 "겪음"을 뜻합니다. 한자말로는 '경험'이고, 한국말로는 '겪음'입니다. 이 보기글을 살피면, 앞쪽에서는 한자말을 쓰고 뒤쪽에서는 한국말을 씁니다. 글쓴이는 왜 이처럼 글을 썼을까요. 앞과 뒤에 다른 낱말을 넣고 싶을까요. 보기글을 찬찬히 보면, 앞쪽은 "온몸으로 알 때"로 손질할 만합니다. 왜냐하면, 온몸으로 안다고 할 적에는 '몸으로 알다'를 가리키고, 몸으로 아는 일이란, 몸으로 부딪혀서 아는 일을 가리켜요. 그러면, 몸으로 부딪혀서 아는 일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겪다·겪음'입니다. 그래서, 이 보기글은 앞쪽에서는 "내가 누구인지를 온몸으로 알 때"로 손질하고, 뒤쪽에서는 "살면서 겪는 모든 일"로 두면 됩니다.

ㄹ. 학교 가고 등교하고

학교 갈 준비를 마쳤다 / 버스에서 내리면 / 언제나 같은 직선 도로로 / 등교를 한다. / 등교하는 길에는 / 중간 중간 샛길이 나 있다
《경남여고 아이들-기절했다 깬 것 같다》(나라말,2011) 18쪽

등교(登校) : 학생이 학교에 감

 등교를 한다
→ 학교에 간다
 등교하는 길에는
→ 학교 가는 길에는

이 글월을 보면 앞쪽에 "학교 갈"이라 적는데, 뒤쪽에 "등교를 한다"와 "등교하는"처럼 적습니다. 왜 앞과 뒤에 다른 말을 적었을까요. 왜 뒤쪽은 앞쪽처럼 "학교 가다"라 적지 않을까요.

아이들은 처음에는 "학교에 가다"와 "집으로 가다"처럼 쓸 테지만, 학교에서는 으레 '등교·하교'와 '등하교'라는 한자말을 씁니다.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부터 어른들이 학교에서 쓰는 한자말에 길듭니다. 이리하여, 이 보기글처럼 두 가지 말을 뒤죽박죽 섞어서 씁니다.

ㅁ. 맑고 쾌청

이미 말했듯이 정말 화창한 날이었다. 하늘이 너무나 맑고 쾌청해서, 공중을 나는 것은 틀림없이 아주 즐거운 일이었을 것이다
《셀마 라게를뢰프/배인섭 옮김-닐스의 신기한 여행 1》(오즈북스,2006) 36쪽

쾌청(快晴)하다 : 구름 한 점 없이 상쾌하도록 날씨가 맑다
화창(和暢)하다 : 날씨나 바람이 온화하고 맑다
맑다 : 구름이나 안개가 끼지 아니하여 햇빛이 밝다


 하늘이 맑고 쾌청해서
→ 하늘이 맑고 밝아서
→ 하늘이 맑고 싱그러워서
→ 하늘이 맑고 좋아서
→ 하늘이 맑고 시원해서

한자말 '쾌청'은 "맑음"을 뜻합니다. 한국말 '맑다'를 한자말로 옮기면 '쾌청하다'가 됩니다. 이 보기글에서는 "하늘이 더없이 맑고 맑아서"라든지 "하늘이 그지없이 맑디맑아서"처럼 고쳐쓸 만합니다. "맑고 쾌청해서"처럼 쓰면,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셈입니다.

그런데, '화창'이라는 한자말도 '맑다'를 뜻해요. 보기글 앞쪽에 나오는 "정말 화창한 날"은 "참말 따뜻하고 맑은 날"로 손질해 줍니다.

더 헤아려 본다면, 보기글 앞쪽에서는 "하늘이 맑고"라 적으면서, 바로 뒤에는 "공중을 나는"이라 적습니다. '하늘'과 '공중(空中)'이 잇달아 나옵니다. 두 낱말은 다른 낱말일까요? 새가 나는 '하늘'이 맑다고 하다가, 이 새가 '공중'에 있는 동안 아주 즐겁다고 하면 앞뒤가 맞을까요? 앞뒤로 똑같은 낱말을 안 쓰고 싶다면, "참말 맑고 따뜻한 날이었다. 오늘은 더없이 밝고 싱그러워서, 하늘을 날면"처럼 하나하나 살펴서 가다듬어 줍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글쓴이 누리사랑방(http://blog.naver.com/hbooklove)에도 함께 올립니다.



태그:#우리말 살려쓰기, #우리말, #겹말, #중복표현,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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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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