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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만들기, 밥상공동체, 협동조합, 공제조합, 셰어하우스, 대안은행 등 '깨알 같은' 프로젝트를 가로 지르는 정신을 들자면, 아마 '행복'일 것이다. 왜 오늘의 불행을 감히 거부하고 기꺼이 이룰 수 있는 '행복'을 찾지 않냐는 것이다. 감히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현실적인 이상주의자가 되자? 과연 그래도 좋은 것일까. 그런 생각이 놓치고 있는 것은 없을까. (프롤로그, 8쪽)

상당히 어렵고 무거운 주제와 내용임에도 주저 없이 이 책을 펼친 이유는 '프롤로그'의 이 대목 때문이다. 서동진 교수의 <변증법의 낮잠>. 저자가 보기엔 더 이상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변혁'은 불가능하다면서도, '지금 이 곳'에서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다며 대안 운동에 몰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

자본주의의 위기와 더불어 대안 공동체 운동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관에서도 경쟁적으로 뛰어들 정도로 마을 만들기 사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협동조합도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이러한 운동이 정착된 유럽에 비하면 아직 초기 단계일 뿐이지만, 마을 만들기 사업에 마을 사람이 없고 무늬만 협동조합인 경우도 허다하다는 비판도 거세다.

마을공동체와 협동조합, 과연 좋기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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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증법의 낮잠> 표지 .
ⓒ 이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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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안 공동체 운동이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느냐, 없느냐고 묻는 것은 애초에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개혁'이라고 이름 붙이든 아니든 간에 애당초 대안 공동체 운동은 '혁명'의 기획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결함을 보완하면서 이미 산소 호흡기를 달고 있는 자본주의의 생명을 연장하는 데 복무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허무하기는 매한가지. 오히려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이 아닌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는 시도가 보편화, 대중화될수록 자본주의를 넘어서고자 하는 기획도 동력을 얻게 될 것이다.

또 대안 공동체 운동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요구도 문제라고 본다. 대안 공동체 운동이 기존의 사회운동을 대체하는 새로운 이론도 아닐 뿐더러, 지금 우리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론도 아니다. 마을 공동체 운동, 협동조합 운동 등은 거대한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여러 길 중 하나다. 노동운동이 그러하듯 자기 고유의 사명이 있고 원칙과 본령에 충실하게 제 몫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마을 공동체 운동, 협동조합 운동의 활동가들이 서동진 교수가 프롤로그에서 던진 질문을 가슴에 품어야 하는 이유는, 이 운동이야말로 끊임 없이 자본주의라는 매트릭스의 전복을 꿈꿔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마을 공동체와 협동조합은 '그들만의 유토피아'라는 의심과 비난으로부터 당당해질 수 있다.

'행복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시 <변증법의 낮잠>으로 돌아와서, 서 교수는 '행복'을 강조한 나머지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성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행복을 저항과 거부의 목표로 삼고 그것으로 유토피아의 자세한 내용을 꿈꾸는 것은 부정이란 몸짓을 미래의 행복을 긍정하는 행위로 바꿔치기하여 버린다"며 "구체적인 유토피아라는 유혹을 지지하여야 할 핑계는 수두룩하겠지만 행복이라는 긍정적 현실은 목표가 될 수 없다"고(10쪽) 단언한다. 그가 보기에 행복이라는 정신을 통해 이뤄지는 우리 시대의 부정(否定) 아닌 부정, 그것의 백치 같은 면모를 깨닫지 않는 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정치란 불가능하다.

행복이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게 아니다. 그것에 관해 꿈을 꾸는 것이다. 행복이란 기회주의자를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지극히 만족스러운 삶이란 영원한 투쟁이 삶, 특히 자신과 투쟁하는 삶이라 생각한다... 행복하게 지낼 양이면 쪼다로 살면 된다. 진정한 주인들이란 결코 행복하지 않다. 행복은 노예들의 범주이다. (슬라보에 지젝, 15쪽 인용)

지젝의 말은 '행복론'이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을 가리고 사회 변혁의 발목을 붙잡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 삶의 주인이라는 착각에 빠져 '노예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무서운 경고다. 서 교수가 이 책에서 낮잠 자는 변증법을 깨워야 한다고 설파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애도와 기억, 느낌 등의 아름다운 개념으로 조직된 공동체는 부정의 정치를 조직하는 힘을 갖지 못한다. 부정이란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만드는 세계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나에게 왜 그러한 방식으로 나타나는지를 반성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 신자들이 회심이나 개종이라고 부르는 절차와 같은 어떤 것을 감행하는 것이다.

즉 세상이 그렇게 굴러갔던 것은 내가 세계를 그런 식으로 응시했던 탓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택한 이후에는 세상은 전연 다른 방식으로 나에게 나타나는 것처럼 우리는 스스로를 바꾸어야 한다.

모순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세계를 모순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세계의 악이라든가 고통을 발견하고 그것을 비난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자유로운 주체로 만들어내지 못하도록 만드는 힘을 원망하고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세계를 탐색하고 추궁하는 것이다. (227쪽)

한 사회의 모습은 우리가 사회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변증법'의 눈으로 본 세상과 '형이상학'의 눈으로 본 세상은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어떤 세계관을 가졌느냐는 운명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문제다. 변증법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세상이 '모순' 때문이라고 파악한다. 사물 현상의 변화 발전은 낡은 것을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는 끊임없는 과정이다. 연속된 부정의 과정이 곧 진보며, 변화 발전의 원인은 내부 갈등 관계 즉 '모순'으로부터 파생된다.

변증법적 인식에 따르면 모순이 사라진 사회는 행복한 사회가 아니라 변화 발전이 멈춰버린 죽은 사회다. 조지 오웰이 "유토피아를 창조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치통 없는 세상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치통 환자들과 비슷하다"고(9쪽 인용) 비난한 것도 이 때문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서 교수는 '위험 사회' '불안 사회' 등과 같이 사회를 하나의 이미지로 뭉뚱그려 보려는 경향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사회적인 것에 관한 하나의 가정을 주조하고 부지런히 사회의 이미지를 그려내려는 세태는 수상쩍다. 그것은 사회적인 것을 일관된 하나의 이미지로 그려내고자 진력한다. 그리고 그를 통해 사회라는 유기적 전체를 상상하지 못하게 만드는 부정성을 제거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사회에 관한 지식을 통해 사회에 관한 의심을 침묵시킨다.

이런 강박적 제스처는 사회적 관계의 적대와 모순을 부인하면서 사회적인 것을 이미 경험한 다양한 인상들을 통해 즉 사실과 증언, 인터뷰, 관찰을 통해 드러낼 수 있다고 강변하는 것이다. (중략) 이런 주장들은 사회적인 것의 새로운 형상을 발견한 것인 양 자처하지만 이는 사회적인 것을 관류하는 부정성을 은폐하는데 기여할 뿐이다. (62~63쪽)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정치는 가능한가

결국 본질적인 문제는 정치다. 대안 공동체 운동의 시도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자본주의적 행복론'을 확산하는 데 복무하는 것이 아닌,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과감한 기획이 되려면 정치가 본연의 힘을 발휘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최선이면서 동시에 최악인 듯 '보이는' 세계에 살고 있다. 최선인 듯 보이는 세계와 최악인 듯 보이는 세계를 조율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극과 극은 결국 통한다는 싸구려 지혜로 이런 배리를 설명하여 봤자 그것은 자신의 무지를 은폐하는 짓에 불과하다.

서로를 배척하는 두 가지의 시선을 조정할 수 있는 방편은 없다. 최선이거나 최악일 수밖에 없는, 서로 전연 다르게 현상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를 보는 관점을 통합하는 방편을 찾으려면 그것을 발명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한 관점은 저절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날 가장 무관심한 것으로 전락한 정치를 되살려 냄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 지금까지 나는 변증법의 가능성을 정치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자 했다. 내게 있어 정치란 변증법적 부정의 다른 이름이다. (230쪽)

서 교수는 "우리는 최악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무력한 허무주의와 최선에 세계에 살고 있다는 긍정적 능동주의 사이를 오락가락한다"며 "최악의 세계와 최선의 세계를 변증법적인 부정의 관계 속에서 매개할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한 것처럼 보인다"고(228쪽) 진단한다.

이것은 잠자는 변증법을 깨워야 가능하다. 그렇다고 지루한 철학공부를 하자는 말은 아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세상이 모순'이라는 변증법적 원리에 입각한다면, 정치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그 '모순'이 존재하는 자리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 편집ㅣ조혜지 기자

덧붙이는 글 | <변증법의 낮잠>(서동진 지음 / 꾸리에 펴냄 / 2014.12 / 1만 5000원)

이 기사는 이민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yes24.com/xfile340)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변증법의 낮잠 - 적대와 정치

서동진 지음, 꾸리에(2014)


태그:#자본주의, #변증법, #대안운동, #마을공동체,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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