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베트남 호찌민시 전쟁증적박물관 3층의 레퀴엠관에 전시된 베트남전에서 순직한 한 사진기자의 총탄 맞은 카메라 사진.
 베트남 호찌민시 전쟁증적박물관 3층의 레퀴엠관에 전시된 베트남전에서 순직한 한 사진기자의 총탄 맞은 카메라 사진.
ⓒ 김당

관련사진보기


기자 사회에서 하는 금언 중에 '우문현답'이라는 게 있다. 어리석은 질문에 현명한 대답을 뜻하는 우문현답(愚問賢答)이 아니다. '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는 문장의 줄임이다. 기자들에게 현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만든 말이다.

전쟁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가장 치열한 현장이다. 전쟁은 비정하지만, 기자에게는 특종의 보고(寶庫)다. 그러나 총알과 포탄은 군인과 기자를 가리지 않는다. '볼펜기자'와는 달리 전장의 사진기자들은 때때로 특종과 목숨을 맞바꾼다. 특히 베트남전쟁은 이라크전쟁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사진기자들이 죽은 '카메라의 무덤'이었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기록한 사진은 화보주간지 <LIFE>(1936~1972)를 통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TIME>지를 창간한 헨리 루스가 '인생을 보기 위해, 세상을 보기 위해(To see the life, To see the world)' 창간한 <LIFE>는 '움직이는 사진'(방송)이 안방을 점령하기 전까지, 베트남전이 한창일 때 무려 1,300만 부수를 기록하면서 전성기를 누렸다. 미국의 가치를 옹호했던 이 주간지가 '더러운 전쟁'으로 기록한 베트남전이 <LIFE>의 전성시대와 일치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베트남통신사 순직기자 270명... 베트남전 역사 다시 써야

호찌민 전 베트남 국가주석이 1945년 9월 2일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선언을 선포하고 있다. 그로부터 13일 뒤에 창립된 베트남통신사에서 찍은 역사적인 사진이다.
 호찌민 전 베트남 국가주석이 1945년 9월 2일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선언을 선포하고 있다. 그로부터 13일 뒤에 창립된 베트남통신사에서 찍은 역사적인 사진이다.
ⓒ 김당

관련사진보기


전장을 취재하는 기자(war correspondent)를 종군기자, 전쟁기자, 전선기자 등으로 부른다. 사실 언론 활동과 기자는 군에 종속되지 않거니와, 전쟁에 가담하지도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에선 '전선기자'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한국 기자로서는 보기 드물게 동남아를 근거지로 20여 년 간 전 세계의 전선을 취재해온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가 사용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기자는 지난 4월 27일 안병찬 전 <시사저널> 주간과 함께 한국 보도진으로는 처음으로 하노이의 베트남통신사(Vietnam News Agency) 7층에 자리잡은 역사관을 방문했다. 베트남통신사는 세계 30개 도시에 특파원을 파견하고 있는 베트남 유일의 국영 통신사이다. 견학은 서울지국장으로 근무할 때 안병찬 주간을 취재한 인연이 있는 쩐 카잉 번(Tran Khanh Van) 베트남통신사 국제국(9개 외국어판) 부국장의 초청으로 이뤄졌다.

호찌민 주석의 베트남 독립선언 직후인 1945년 9월 15일에 창간된 베트남통신사가 작성한 독립선언문 기사와 통신사 창립 초기의 사진들.
 호찌민 주석의 베트남 독립선언 직후인 1945년 9월 15일에 창간된 베트남통신사가 작성한 독립선언문 기사와 통신사 창립 초기의 사진들.
ⓒ 김당

관련사진보기


베트남통신사는 호찌민이 1945년 9월 2일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세우고 독립을 선언하고 13일 만인 9월 15일 창간되었다. 이 통신사는 올해 초에 본관 7층에 독립선언 당시의 기사를 포함해 70년 자료를 모아 전통역사관을 개관했다.

그런데 역사관 입구에 '1945. 9. 15~2015. 9. 15'라고 적힌 연혁을 보면, 70주년 개관 기념일까지는 아직 몇 달이 남아있다. 또한 전시된 자료에 대한 설명이 베트남어로만 적혀 있는 것을 보면 이 역사관이 대외홍보용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초창기 등사판 신문에서부터 컴퓨터 전송 시스템까지의 역사를 보여주는 자료는 다른 언론사의 역사와 다를 바 없다.

다른 언론사에서는 볼 수 없고 오직 베트남통신사에서만 볼 수 있는 전시자료는 이 역사관의 맨 끝에 있는, 항불-항미 30년 전쟁 기간에 순직한 전선기자들의 사진과 명단이다. 번 부국장에 따르면, 순직 기자는 총 270여 명이지만 명단이 확인된 기자는 253명이다.

순직자 전원이 다 기자는 아니다. 취재-편집기자와 사진기자 외에 사진 현상기사와 전송기사 등이 포함된 것이다. 그럼에도 한 언론사에서 200명이 넘는 순직자가 발생한 사례는 역대 어떤 전쟁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진기록'이다.

사진 현상기사부터 부사장까지 순직

베트남의 항불-항미전쟁 기간에 순직한 베트남통신사 전선기자들의 초상사진. 270여명이 순직한 가운데 명단이 확인된 사람은 253명이다. 한 언론사에서 200명이 넘는 순직자가 발생한 것은 세계 전쟁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진기록'이다.
 베트남의 항불-항미전쟁 기간에 순직한 베트남통신사 전선기자들의 초상사진. 270여명이 순직한 가운데 명단이 확인된 사람은 253명이다. 한 언론사에서 200명이 넘는 순직자가 발생한 것은 세계 전쟁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진기록'이다.
ⓒ 김당

관련사진보기


순직자를 시기별로 구분하면 ▲항불전쟁(1946~1954) 8명 ▲항미전쟁(1955~1975) 237명 ▲종전 이후(1976~1985) 4명 ▲사망시점 미상 4명 등이다. 종전 이후 순직자는 미군이 남긴 불발탄 등에 의한 사망자다.

베트남 정부 자료에 따르면, 베트남전 기간에 베트남인 300만 명이 사망했는데 그중 200만 명이 민간인이다. 부상자는 200만 명, 실종자도 30만 명이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베트남에는 60만 톤의 불발탄이 남아, 660만ha 땅과 9,284개의 마을공동체가 포탄과 폭발물로 오염되었다. 그로 인해 종전 이후(1975~2002년)에도 4만 2135만명이 죽고, 6만 2143명이 부상을 입었다. 불발탄이라고 해서 기자를 피해가진 않았을 것이다.

순직 명단은 쩐 킴 쑤엔(Tran Kim Xuyen, 1921~1947)으로 시작해 즈엉 득 덩(Duong Duc Thang, 1952~1985)으로 끝난다. 그중에서 초상(사진)이 남아있는 순직자는 90명이고, 그중 9명이 여성이다. 연도별로 보면, 61년 1명, 62년 0명, 63년 2명, 64년 3명, 65년 8명, 66년 8명, 67년 21명, 68년 50명, 69년 35명, 70년 35명, 71년 24명, 72년 27명, 73년 13명, 74년 7명, 75년 3명 등이다. 1961년에 1명으로 시작해 해마다 늘더니 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과 북베트남군이 뗏(구정) 공세를 펼친 1968년에 50명으로 정점을 기록하고 다시 줄어드는 것을 알 수 있다.

쩐 카잉 번(Tran Khanh Van) 베트남통신사 국제국(9개 외국어판) 부국장이 1945년 9월에 창립된 베트남통신사의 초기 상황을 재현한 모형 앞에서 설명하고 있다.
 쩐 카잉 번(Tran Khanh Van) 베트남통신사 국제국(9개 외국어판) 부국장이 1945년 9월에 창립된 베트남통신사의 초기 상황을 재현한 모형 앞에서 설명하고 있다.
ⓒ 김당

관련사진보기


최초의 순직 기자인 쩐 킴 쑤엔 부사장은 순직자 중에서도 가장 직책이 높다. 2013년 하노이에 그의 이름을 딴 길이 생겼다고 한다.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여성 사진 현상기사인 우트 낭(Ut Nang)은 1972년 캄보디아 콤퐁참에서 전사했다.

캄보디아 출신인 쩐 녹 당(Tran Ngoc Dang)은 19살에 베트콩(NLF)에 가입해 사진기자 겸 현상기사로 복무했다. 이 젊은 전사는 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기 전에 미군 탱크 두 대를 폭파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일보 사이공-홍콩특파원을 지낸 안병찬씨는 "베트남통신사의 전선기자는 기자인 동시에 전사의 성격을 갖는다"면서 "사회주의 베트남의 유일한 국영통신사로서 중국 국영통신 신화사와 같은 구조다"고 강조했다.

베트남전쟁은 단일규모 전쟁으로 가장 많은 취재기자가 전선에 올랐고, 가장 많은 기자가 희생당한 전쟁이기도 했다. 전선기자를 연구한 한 논문에 따르면, 1964년 40여 명에 지나지 않던 전선기자 수가 1965년 미군이 개입하면서 크게 늘어나 1970년대 들어 2천 명 이상에 이른 것으로 집계되었다.

한 비공식 통계에 따르면, 순직한 전선기자는 2차 세계대전 69명, 한국전쟁 23명, 베트남전쟁 63명 등이다. 한국전쟁의 경우 나중에 중국 정부가 신화사 기자 5명의 순직을 공식 확인함으로써 기록이 수정되었다. 베트남통신사 역사관 자료에 따르면, 전선기자의 역사는 전면적으로 다시 기록되어야 한다.

미군의 융단폭격과 레퀴엠

베트남 호찌민시 전쟁증적박물관 3층의 레퀴엠관에 전시된 사진 작품들. 주간화보지 <라이프>의 전성시대를 이끈 래리 버로우즈(Larry Burrows) 등 베트남전에서 순직한 전선기자들이 죽음으로 기록한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베트남 호찌민시 전쟁증적박물관 3층의 레퀴엠관에 전시된 사진 작품들. 주간화보지 <라이프>의 전성시대를 이끈 래리 버로우즈(Larry Burrows) 등 베트남전에서 순직한 전선기자들이 죽음으로 기록한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 김당

관련사진보기


호찌민 시내의 전쟁증적박물관 2층의 '전쟁범죄관'에는 20세기에 미군이 참전한 3대 전쟁(2차 세계대전, 한국전, 베트남전)에 관한 통계를 비교한 사진이 있다. 미군의 참전 병력(연인원 1611만 명)과 전사망자(40만 명)는 2차 세계대전이 최대이지만, 전쟁 기간(17년2개월)과 폭탄 및 포탄 사용량(1430만 톤), 그리고 전쟁 비용(6760억 달러)은 베트남전이 최대이다. 특히 미군이 베트남전에서 쏟아부은 폭탄의 총량은 1㎡당 1개꼴이다. 그래서 생겨난 신조어가 '융단폭격'이다.

<표> 미군이 참전한 세 전쟁에 관한 통계 비교
 비고
 2차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전쟁 기간
 3년8개월
 3년1개월
 17년2개월
참전병력(연인원)
 16,112,566
 5,720,000
 8,744,000
 최대 주둔병력
         -
 327,000(1953년 6월)
 549,500(1969년 4월)
 폭탄 및 포탄(톤)
 5,000,000
 2,600,000
 14,300,000
 전쟁 비용(달러)
 3410억
 540억
 6760억
 사망/부상자(명)
 405,399/671,846
 36,407/103,284
 58,159*/304,000

* 장군 12명, 대령 89명, 중령 295명, 소령 696명 포함

전쟁증적박물관 3층의 베트남 전선기자들이 베트남전의 참상을 기록한 사진들로 꾸민 '레퀴엠'(진혼)관은 베트남전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베트남과 인도차이나에서 사망한 사진가들'이라는 부제가 붙은 '베트남전 컬렉션 레퀴엠'은 원래 베트남전에서 부상당한 전선기자인 팀 페이지(Tim Page)와 호스트 파스(Horst Faas)가 기획한 레퀴엠 전에서 가져온 것이다.

두 사람은 베트남 정부에 국적과 정치적 관점에 상관없이 베트남전과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사망한 모든 사진기자들 공통의 기억에 남은 베트남전 사진들을 광범위하게 모아 출판 및 전시를 하자는 제안을 했고, 국영 베트남통신사(VNA)가 두 사람에게 베트남전 기록에 대한 접근을 허용함으로써 성사되었다.

두 사람은 베트남전에서 순직(martyr)한 72명의 베트남 사진기자들의 기록을 포함해 134명의 사진기자들이 찍은 수천 장의 사진을 4년 동안 수집해 미국 등지에서 전시회를 열고 사진집을 출판했다.

베트남 호찌민시 전쟁증적박물관 3층의 레퀴엠관. 주간화보 < LIFE>의 전성시대를 이끈 래리 버로우즈(Larry Burrows) 등 베트남전에서 순직한 전선기자들이 죽음으로 기록한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베트남 호찌민시 전쟁증적박물관 3층의 레퀴엠관. 주간화보 < LIFE>의 전성시대를 이끈 래리 버로우즈(Larry Burrows) 등 베트남전에서 순직한 전선기자들이 죽음으로 기록한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 김당

관련사진보기


이곳에 전시된 기록사진들은 주로 서방, 주로 미국 기자들이 베트남전에서 목숨을 걸고 찍은 생생한 기록들이다. 스페인 내전과 2차 세계대전, 중일전쟁, 이스라엘 독립전쟁 등 평생 전선을 누빈 전설적인 사진가 로버트 카파(1913~1954)도 베트남전에서는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베트남전이 절정인 1966년부터 1971년 라오스 국경지대에서 헬기 추락으로 사망하기까지 로버트 카파 금메달을 3번이나 수상하며 <LIFE>의 전성기를 이끈 영국의 사진작가 래리 버로우즈(Larry Burrows)의 걸작들도 눈에 띈다.

1966년 베트남 탄빈 전투에서 미군이 장갑차에 베트콩 시신을 끌고 가는 사진은 UPI에서 활동하던 일본 사진기자 쿄이치 사와다가 찍은 것이다. 쿄이치는 같은 해 필사적으로 강을 건너는 두 가족의 애절한 모습을 찍은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받은 뒤에 사진 속 가족들을 찾아 상금을 나눠주는 미담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4년 뒤 또 다른 전쟁의 현장을 취재하던 중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베트남전에서 순직한 전선기자 134명... 한국 기자는 없어

베트남 호찌민시 전쟁증적박물관 3층의 레퀴엠관의 한쪽에 전시된 베트남전 순직 기자들의 초상사진.
 베트남 호찌민시 전쟁증적박물관 3층의 레퀴엠관의 한쪽에 전시된 베트남전 순직 기자들의 초상사진.
ⓒ 김당

관련사진보기


레퀴엠관의 한쪽에는 베트남전에서 순직하거나 실종된 사진기자들의 초상과 명단이 전시돼 있다. 베트남 사진기자를 포함한 순직자 57명과 실종자 17명의 초상사진과 명단이다. 본래의 레퀴엠 전에 전시된 베트남 72명, 미국 16명, 프랑스 12명, 일본 4명, 남베트남 11명을 포함해 호주, 오스트리아, 영국, 독일, 스위스, 싱가폴, 캄보디아 등 순직기자 134명의 일부다.

베트남 정부는 이 가운데서 전투병력을 파병해 자국과 총부리를 겨눈 미국과 한국, 태국, 호주, 필리핀, 뉴질랜드를 미국의 '5개 위성국'으로 부른다. 미국 다음으로 많은 전투병력을 파병한 한국은 베트남전에 가장 먼저 참전해 미국보다 더 나중에 철군했다. 전투 기간이 가장 길고 치열했다는 얘기다.

베트남전에서 순직한 기자들의 유작을 박물관에 기증한 유가족들은 "(내 남편 또는 아들이) 살아있다면 자신이 찍은 사진들이 베트남에 전시되기를 바랐을 것이다"고 했다. 그 진혼의 작품 중에 한국인 전선기자가 찍은 사진은 한 장도 찾아볼 수 없다. 물론 베트남 전선에서 순직한 한국 기자도 없다.

○ 편집ㅣ손병관 기자



태그:#베트남전, #전선기자, #베트남통신사, #레퀴엠, #라이프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