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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저녁 한 시간가량 웃으며 시청한 <개그콘서트>가 끝나갈 무렵, 어김없이 스티비 원더의 음악이 흐른다. 모든 출연진이 무대에 나와 인사하는 모습을 보면 심장 박동이 점점 더 빨라진다.

'아... 빨리 자야 내일 아침에 출근하지.'

어김없이 잠자리를 재촉한다. 다음 날, 서둘러 집을 나오면서 휴대폰를 두고 나왔다. 종일 회사에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중요한 전화가 오면 어떡하지?' 온갖 잡생각에 머리가 복잡하다. 막상 퇴근하면 부재중 전화 하나 없는 현실에 두 번 서글퍼진다.

퇴근길, 방향 지시등을 켜지 않고 갑자기 끼어드는 앞차에 '분노 게이지'가 급상승한다. 어김없이 상향등과 클랙슨에 손이 가는 로드 레이지(도로에서 벌어지는 운전자의 난폭 행동)를 경험하게 된다. 이 같은 상황이 비단 필자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아픈' 도시인, 마음은 어디서 치유할까

500원을 넣고 자신의 증상에 맞는 번호를 누르면 그에 맞는 처방전이 나온다. 현대인의 마음증상 20개에 따른 다양한 처방전을 받을 수 있다.
▲ 자판기 이용 모습 500원을 넣고 자신의 증상에 맞는 번호를 누르면 그에 맞는 처방전이 나온다. 현대인의 마음증상 20개에 따른 다양한 처방전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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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온라인 여론조사 패널(mVoting)은 지난해 12월 22일부터 한 달 동안 서울 시민 849명을 대상으로 '현대인의 생활 속에서 느끼는 마음의 병'에 관한 조사를 진행했다. 위 사례에서 선보인 출근하기 싫은 '월요병 말기', 휴대전화 없이 하루도 살 수 없는 '유행성 스마트폰 중독', 화를 참을 수 없는 '분노 조절 장치 실종' 등을 비롯해 현대인의 마음 증상 20여 가지가 나왔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 처방전을 받는다. 우리는 이 처방전으로 약국에서 약을 살 수 있다. 그런데 마음이 아플 땐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이 아픈 것을 어디 가서 누구에게 속 시원히 얘기하는 것도 쉽지 않은 세상이다.

이는 현대인의 '익명성'과 무관하지 않다. 카운터에서 사람이 돈을 받지 않고 기계가 계산을 처리해주는 무인 모텔이나, 우리나라 최초의 자판기라 할 수 있는 '콘돔 자판기'를 보자. 1975년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은밀한 곳에 위치한 콘돔 자판기를 이용하는 사람의 숫자가 현저하게 늘었다고 한다.

이것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익명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또 자판기의 나라로 불리는 일본에는 약 509만 개의 자판기가 설치돼 있으며, 이는 인구 25명당 1대꼴로 운영되는 셈이다. 이처럼 자판기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일본 사람의 특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마음을 치유하는 자판기 <마음 약방>

서울시청 지하 1층 시민청에 설치된 마음치유 자판기 <마음약방>의 설치모습이다.
▲ 마음약방 사진 서울시청 지하 1층 시민청에 설치된 마음치유 자판기 <마음약방>의 설치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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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병을 치유해주는 자판기 <마음약방>이 지난 2월 13일(금) 서울시청 지하 1층에 위치한 시민청에 생겼다. 이 자판기는 '꿈 소멸증', '외톨이 바이러스', '미래 막막증' 등 현대인이 앓고 있는 20가지 마음 증상에 대해 시, 그림, 영화 등 예술 작품을 추천하거나 테마 지도, 비타민, 엿, 초콜릿 등 소소한 재미와 스토리가 있는 물품을 처방한다. 마음의 병을 치유 받고 싶은 현대인의 바람과, 그것을 잘 드러내고 싶지 않은 숨김의 욕망에서 나오는 절묘한 조합이다.

이처럼 자판기는 현대의 사회적 현상을 표현하면서 해결해주는 사회적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기원전 215년에 만들어진 인류 최초의 자판기인 '성수(聖水) 자판기'와 19세기 영국에서 성경을 비판하는 이성에 관한 내용을 다룬 금서를 판매하는 도서 자판기가 바로 익명성을 활용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신비의 물인 성수를 사람이 아닌 누군가(?)에게서 받는 것만으로도 치유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자판기 내부에 있는 처방전 모습. '월요병 말기', '노화자각', '자존감 바닥' 등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면 그에 맞는 버튼을 누르면 된다.
▲ 처방전 키트 자판기 내부에 있는 처방전 모습. '월요병 말기', '노화자각', '자존감 바닥' 등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면 그에 맞는 버튼을 누르면 된다.
ⓒ 장기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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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개의 처방전에는 각기 증상에 따라 다양한 처방전이 들어있다. 시, 글, 그림 등을 비롯해 박카스, 초콜렛, 엿 등 소소한 재미를 더하는 물건으로 즐거움을 받을 수 있다.
▲ 처방전에 들어있는 키트 20개의 처방전에는 각기 증상에 따라 다양한 처방전이 들어있다. 시, 글, 그림 등을 비롯해 박카스, 초콜렛, 엿 등 소소한 재미를 더하는 물건으로 즐거움을 받을 수 있다.
ⓒ 장기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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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3일 시민청에서 첫 오픈된 <마음약방>은 현재까지 7534명이 참여해 1일 평균 110명이 이용할 정도로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이 기간 동안 기부금은 376만 7천 원이 모였으며 이 기금은 향후 2, 3호점으로 확대되는 데 다시 사용할 예정이다.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데 기업과 문화 예술가들의 기부도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동아제약, 종근당, 공정무역아름다운커피, 올댓스토리엿츠, 아이더치, CH수박 등의 기업이 후원하고 있으며, 문화 예술인으로는 이철수, 고도원, 김흥숙씨가 참여해 의미를 더하고 있다.

<마음약방> 자판기를 통해 마음의 병을 근본적으로 치료받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500원짜리 동전 한 개로 마음속에 담아뒀던 증상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해결 방안을 제시받는 시도(?)만으로도 새로운 활력과 치료제가 될 것이다.

새로운 영화를 추천받고, 마음의 아픔을 이해하는 시를 같이 읽고, '힐링'과 산책을 할 수 있는 탐방 투어에 참여해보는 색다른 처방전으로 마음의 병에 관한 흥미로운 치유를 경험할 것이다.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여! 시민청에서 자신의 증상에 맞는 색다른 처방을 받아보는 것은 어떨까?

지난 2월 13일 시민청에서 오픈된 <마음약방>은 현재까지 총 7,534명이 이용했으며, 총 기부금은 3,767,000원이 모금될 정도로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 마음약방 오픈식 지난 2월 13일 시민청에서 오픈된 <마음약방>은 현재까지 총 7,534명이 이용했으며, 총 기부금은 3,767,000원이 모금될 정도로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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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마음약방, #시민청, #자판기,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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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빼고 문화만 씁니다." 매주 금요일마다 한겨레신문에 예술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사람in예술' 코너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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