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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를 알려드립니다, 띠, 띠, 띠, 땡, 전두환 대통령 각하께서는..."

1980년대, 우리나라 사람들은 신비한 예지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 중 가장 비중 있는 정보가 다뤄지는 9시 공중파 뉴스의 첫머리를 미리 알 수 있었던 것.  

당시 뉴스 첫머리는 무조건 전두환 대통령의 업적이나 동정을 칭송하는 기사로 채워졌다. 이른바 '땡전 뉴스'다. 아무리 사소해도, 아무리 민생과 관련한 주요 뉴스거리가 있어도 9시를 알리는 신호음 뒤엔 어김없이 앵커의 "전"자가 뒤따랐다.

언론사에 기관원이 상주하던 시절이다. 요즘으로 치면 국정원 직원들이다. 그들은 친절하게도 그날그날 언론사에 기사의 선별과 크기, 방향, 심지어 제목까지 정해준 '보도지침'을 하달했다. 이를 따르지 않으면 보복이 뒤따랐다. 

국경없는 기자회(Reporter Without Borders)는 올해 한국의 언론자유지수를 180개 조사 대상 국가 중 60위로 평가했다. 2013년 50위, 2014년 57위로 박근혜 정부 이후 매년 순위가 하락한 것. 일본 역시 올해 언론자유지수는 우리보다 한 계단 밑인 61위를 기록했다.
▲ 2015 세계 언론자유지수 지도 국경없는 기자회(Reporter Without Borders)는 올해 한국의 언론자유지수를 180개 조사 대상 국가 중 60위로 평가했다. 2013년 50위, 2014년 57위로 박근혜 정부 이후 매년 순위가 하락한 것. 일본 역시 올해 언론자유지수는 우리보다 한 계단 밑인 61위를 기록했다.
ⓒ 국경없는 기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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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없는 기자회'는 매년 '세계보도의 자유'란 제목으로 국가별 언론 자유지수 순위를 발표한다. 언론과 보도의 자유를 옹호하기 위해서다. 한국은 노무현 정부 때인 2006년, 최고치인 31위에 올랐다가 2015년, 무려 29단계나 떨어져 60위를 기록했다.

일본은 더 심각한 상황이다. 자민당 장기 집권 체제에서 민주당으로 정권 교체가 이뤄진 2009년부터 순위가 급등해 이듬해인 2010년 11위까지 상승했다. 그러다 우파 아베 신조가 재집권한 후 다시 떨어지기 시작해 2015년에는 61위에 이름을 올렸다. 우리와 사이좋게 붙어있다.

평화헌법 개정 64% 반대, 아베가 밀어붙일 수 있는 이유

일본 아베 정권과 언론의 협착 <보수의 공모자들>
▲ 책표지 일본 아베 정권과 언론의 협착 <보수의 공모자들>
ⓒ 메디치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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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외무성에 36년 동안 재직했던 마고사키 우케루는 <보수의 공모자들>이란 책을 통해 이 위험성을 경고한다. 감시자 역할을 해야 할 언론이 정부의 충실한 하녀로 전락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말이다.

일본 언론의 보도는 "무엇이 사실일가"를 전할 의도가 없다. "무엇이 아베 총리가 좋아하는 것일까" 또는 "무엇을 좋아하지 않을까"가 보도의 기준이 되고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많은 일본 국민들이 그런 보도를 신뢰하고 있다. 그리하여 여론은 아베 정권의 정책을 철석같이 믿고, 그 결과 일본의 정치는 위험한 영역으로 나아가고 있다. - <보수의 공모자들> '한국어판 서문'에서

2013년 6월 <아사히신문>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원전 재가동에 반대하는 사람의 비율은 59%로 나타났다. 역시 같은 매체가 지난해 실시한 평화헌법 개정에 대한 조사에서도 일본 국민의 64%가 반대하는 걸로 나타났다. 그러나 아베는 이를 밀어붙이고 있다. 국민의 의지가 정책에 반영되지 않는 상황이 실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 이면에는 바로 아베 신조와 언론의 충실한 협착관계가 자리한다. 2013년 12월, 아키히토 일왕은 여든 살 생일을 맞이해 이렇게 말했다.

"전후 연합군의 점령하에 있던 일본은 평화와 민주주의의 수호를 소중히 여겨 일본국 헌법을 만들고, 여러 가지 개혁을 거쳐 오늘의 일본을 쌓아올렸습니다. 전쟁으로 황폐한 국토를 재건하고 또 개선해가기 위해 당시 우리 일본 사람들이 쏟아야 했던 노력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 <보수의 공모자들>에서 재인용

이 발언은 현재 국제정세와 일본의 정치상황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NHK>의 보도에서는 "평화와 민주주의의 수호를 소중히 여겨 일본국 헌법을 만들고"란 구절이 삭제된 채 공개된다. 자칫 아베 정권을 비판하는 모양새로 보일까 두려워서다.

이 책은 일본의 원전재가동, 오키나와 문제, 아베 정권, 센카쿠 열도 분쟁 등의 이면에 감춰진 진실을 파헤친다. 그 과정에서 벌어진 '언론통제'가 얼마나 교묘하게 자행됐는지를 추적했다. 결론적으로 국민의 생각으로부터 역주행하는 아베의 자민당이 왜 선거에서 압승하는지, 언론과 아베 정권의 공생관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대형매체의 보도도 의심하라

어떤 기사가 신문 1면에 실렸다고 해서, 뉴스 첫머리에 보도됐다고 해서 모두에게 중요한 뉴스는 아니다. 같은 뉴스라도 대형 언론매체와는 다른 논조의 보도나 해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꼭 대형매체의 보도라고 해서 온전히 받아들이기보단 '의심하는' 시각을 가져야 할 이유다.

미래 예측은 눈에 보이는 게 아니다. 스스로 생각해야 나타나는 현상이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겐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에서 내가 거듭 얘기해왔듯이, 눈앞의 정보를 '의심하는 것'부터가 그 첫걸음이다. - <보수의 공모자들>에서

일본의 언론자유지수 61위나, 한국의 60위나 별 차이가 없다. 대통령 인수위에 참여했던 뉴라이트 인사가 방송통신심의위원장에 오르고, 종편이 출범하고, <문화방송> 사장의 낙하산 파동이 일고, <한국방송>이 총파업을 결행했다. 이 모두는 분명히 현재 우리의 언론이 일본과 사정이 다르지 않음을 알려준다.

1980년대 '땡전뉴스'를 바라보며 느꼈던 갈증이 또다시 재현되고 있다. 책을 옮긴 한승동 기자는 '이게 일본 얘기인지 한국 얘기인지 헷갈릴 정도로 두 나라는 언론과 정치권을 비롯한 언론 취재·보도 대상들의 행태조차 사뭇 닮았다'고 평했다.

작년 5월, 64개 언론사 5623명의 현직 언론인들이 '언론의 사명을 다시 가슴에 새기겠습니다'란 시국선언문까지 발표했다. 재밌는 점은 우리나라 신문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대형매체 3곳의 언론인은 단 한 명도 이 자성적 선언에 참여하지 않았단 사실이다. 같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토록 다를 수 있다니, 반추해볼 만한 현상이다.

만약 우리가 사회나 정치에 무관심하고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편안한 생활은 모래알처럼 손아귀에서 흘러 내려버릴지 모른다. 진심으로, '땡박뉴스'는 보고 싶지 않다.

대한민국 언론은 죽었습니다. 세월호 참사는 이미 한참 전에 죽어버린 언론의 모습을 드러내는 하나의 계기였을 뿐입니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고, 언론의 존재 이유는 대한민국의 주인인 국민에게 정확하고 공정하게 사실을 알려주기 위함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언론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습니다. '죽은 언론'의 주인은 국민이 아니라 대통령이고 '죽은 언론'은 오직 권력자를 향한 해바라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 현업 언론인 시국선언문 '언론의 사명을 다시 가슴에 새기겠습니다'에서

덧붙이는 글 | <보수의 공모자들> (마고사키 우케루 지음 / 한승동 옮김 / 메디치미디어 펴냄 / 2014.06 / 1만2500원)



보수의 공모자들 - 일본 아베 정권과 언론의 협작

마고사키 우케루 지음, 한승동 옮김, 메디치미디어(2014)


태그:#보수의 공모자들, #마고사키 우케루, #한승동, #메디치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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