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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의 사량도 등반에서의 아내.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이 보인다고 '지리망산'이라고도 합니다.
 통영의 사량도 등반에서의 아내.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이 보인다고 '지리망산'이라고도 합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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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량도로 출발합니다. 한등74기들과 무박이일로"

지난 토요일(4월 25일) 늦은 밤, 아내로 부터 카톡메시지가 왔습니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는 아내는 직장의 노동과 그 노동의 대가인 월급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것들에 대해 늘 갈급한 마음이었습니다. 나이와 함께 노후된 육신은 늘 비상호출을 했습니다. 발걸음을 옮기면 무릎관절에서 '삐그덕 삐그덕' 소리가 나고, 허리를 굽히면 당최 다시 펴기가 힘들다는 호소를 입에 달고 있었습니다. 

"아니, 50년을 넘게 사용한 육신이 어디 온전하겠소? 그래도 그만하니 다행이지. 다른 기계 같았으면 벌써 파기처분 되었을 거요." 

저는 아내의 잦은 하소연을 애써 태연하게 받았습니다. 

그 즘, 지인의 방문이 있었습니다. 서울 백림치과의 최영림 원장님이셨습니다. 최 원장님은 아내와 비슷한 연배인 분입니다. 그분과 함께 오신 분은 서울산악구조대 김남일 대장님이셨습니다. 두 분으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최 원장님께서 한국등산학교를 졸업하고 산악특수훈련을 마친 다음 '2009 히말라야 로체남벽 원정대'의 팀닥터로 참가한다는 사실과 그 원정의 정찰을 위해 이미 6189m 임자체 원정을 다녀오셨다는 것입니다. 

"세계 3대 거벽중의 하나인 로체남벽의 원정에 병원 진료실을 지켰던 대학생 딸을 둔 엄마가 참가하다니..."

알피니스트로 변신한 또래의 최 원장님과 그녀의 변신을 도왔던 김 대장님의 방문은 아내를 개안하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내의 잠자던 등반욕구에 불을 지핀 산악인 김남일대장님과 최영림원장님의 방문
 아내의 잠자던 등반욕구에 불을 지핀 산악인 김남일대장님과 최영림원장님의 방문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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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아내는 우여곡절 끝에 일년에 두 차례 모집하는 한국등산학교 정규반 74기로 입교하게 되었습니다. 아들 같은 교육생들과 함께 71명의 입학생중 한 명이 된 것입니다. 아내는 그해 도봉산 밤길을 오르내리며 동료들과 등반의 고통과 희열을 함께 느끼며 등반기초를 익혔고 다음해에는 또다시 41기 암벽반에 도전해서 훈련을 마쳤습니다.

한국등산학교에 입교해서 훈련을 받을 당시의 아내. 고된 훈련 뒤에 여운으로 남는 희열을 즐겼습니다.
 한국등산학교에 입교해서 훈련을 받을 당시의 아내. 고된 훈련 뒤에 여운으로 남는 희열을 즐겼습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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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후 2년간은 매주말 칼바위들을 오르내리는 모험을 즐겼습니다. 무릎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는 하소연도 허리가 아프다는 소리도 듣지 못했습니다. 

#2

그 후 치매로 힘들어하시는 친정엄마와 연로한 시부모를 함께 모시는 일로 경황이 없었습니다. 직장을 오가고 세 부모님을 모시는 일은 바위능선의 엣지를 타는 릿지등반 이상으로 집중을 요하는 일이었습니다.

작년에 친정어머님이 오빠부부에게로 가시고 올해 시부모님께서도 고향 집으로 내려가신 후 아내의 무릎과 허리는 다시 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해 전 이틀간의 휴가가 주어졌습니다. 남편은 모르는 일이었어요. 평소 그렇게 가보고 싶었던 여수 향일암(向日庵)에 가기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그래도 헤이리에서 고생할 남편에게는 행선지는 알려야지 싶어서 전화를 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모티프원의 일을 도와야하니 바로 헤이리로 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향일암 방문길을 헤이리로 돌렸습니다. 그런데 다음해 화재로 향일암의 대웅전이 전소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재건했겠지만 오래된 원래의 대웅전은 영원히 볼 수 없게 된 거지요. 지금도 남편이 단호하게 발길을 돌리라고했던 그때의 서운한 마음이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종주에는 6.25km로 4시간 정도가 소요되는 지리망산의 등반은 릿지등반 경험이 있으면 좀더 난코스의 절경을 즐길 수 있습니다.
 종주에는 6.25km로 4시간 정도가 소요되는 지리망산의 등반은 릿지등반 경험이 있으면 좀더 난코스의 절경을 즐길 수 있습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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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남들에게도 왕왕 그 일을 꺼내놓곤 합니다. 아내가 그 얘기를 꺼낼 때면 저는 기억도 나지 않는 그 일 때문에 항상 나쁜 남편이 되곤 합니다.

토요일 자정 무렵, 한국등반학교 74기 동기들과 전세버스로 경남 통영의 사량도(蛇梁島) 산행을 떠났던 아내가 일요일 오후에 지리산과 옥녀봉 등 사랑도 능선에서 찍은 스마트폰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사진 속 아내의 표정으로는 관절과 허리는 한 번도 이상 신호를 보낸 적이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일방적인 통보로 떠난 그 산행에 저는 향일암의 기억과 중첩되어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답을 보냈습니다. 

"자연에서 큰 깨달음 얻어오세요." 

어제 직장의 늦은 퇴근 후 아내가 제게로 왔습니다. 손에는 등반 때 먹다가 남긴 빵 하나와 퇴근길에 시장에서 샀다는 생오징어 두 마리가 들려있었습니다. 우리는 늦은 밤, 오징어를 삶아서 캔맥주 하나를 반씩 나누어 마주 않았습니다.

아내는 시종 눈아래로 남해의 다도해가 펼쳐지는 사량도의 등반이 얼마나 황홀했는지, 그리고 동기들 중 몇 명이 곧 결혼할 것인지 등을 즐겁게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진지한 어투로 바뀌어 말을 이었습니다. 

"카트만두와 포카라 사이에 강진이 발생해서 큰 손실이 있었다는 것을 서울로 와서 알았어요. 땅의 분노는 왜 그렇게 약자들에게 일어나는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가고 싶었던 네팔의 히말라야 트레킹이지만 아직 가보지 못했잖아요. 지난번 향일암의 화재도 마찬가지지만 이번 네팔의 지진으로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요. 우리가 지금 보고 발 딛고 있는 것이 모두 환영은 아닌지... "

아내는 우리의 실존자체를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음먹은 일들을 결코 미루어서는 안된다는 결의를 다시 다졌습니다. 나도 아내의 말처럼 매일을 'there and then'이 아니라 'here and now'의 삶을 살 것을 결심하곤 합니다.

하지만 저도 아내가 또다시 '며칠간 여행을 다녀올게요'라는 일방적인 선언을 한다면 흔쾌히 '그렇게 하세요'라는 답이 나올지도 의문이고 아내가 향일암의 사례를 남들 앞에 더 이상 꺼내지 않을지도 의문입니다.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태그:#사량도, #통영, #지리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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