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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의 한 포로수용소에서 1년 넘게 불안하고 답답한 생활을 하던 한 이탈리아인에게 어느 날 케냐 산이 눈에 들어온다. 산을 휘감고 넓게 깔린 거대한 구름이 조금씩 움직이는 장면에 홀딱 빠져 선 채로 몇 시간 동안 바라본 그는 그날부터 케냐 산과의 지독한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리하여 결국 '포로수용소를 탈출해 케냐 산에 갔다 오겠다'는 꿈을 갖는다.

케냐 산의 주봉들은 해발 ~5200m로, 아무나 감히 등반을 꿈꿀 수 없는 그런 위험천만한 설산이다. 그래도 그는 감시병들의 눈을 피해 동지를 물색하는 한편, 수용소 안의 고철이나 끈과 같은 잡동사니들로 등반에 필요한 각종 장비들을 만든다. 또 비상식량들을 비축하거나, 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동선을 짜는 등, 등반에 필요한 것들을 8개월 동안 준비한다.

식사라고는 쓰디 쓴 차 한 잔이 전부였다. 다음날 두 동료들에게 깜짝 선물로 선보이고자, 나는 비스킷 한 조각을 먹지 않은 채 몰래 보관하고 있었다.(…)드디어 비스킷을 꺼낼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나의 보물을 꺼내 돌멩이 위에 올려놓고 엔초에게 말했다. "어때? 정확히 삼등분을 하자고."

그때 놀라 쳐다보던 내 친구들의 표정을 나는 도저히 글로써 표현할 방법이 없다. 내가 보기에 엔초와 귀안은 자기들이 꿈이라도 꾸고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삼등분한 비스킷 조각은 손톱보다 크지 않은 정도였다. 나는 내 몫의 조각을 물컵에 담근 후 엄지손톱 크기로 부풀어 오를 때까지 1~2분 가량을 참고 기다렸다. 그건 천국의 맛이었다. 이틀 전 쌀로 만든 형편없는 저녁을 먹은 후 처음으로 접하는, 액체가 아니라 고체로 된 음식이었다. 엔초는 비스킷을 나누었던 돌멩이를 꼼꼼하게 검사했다. 현미경으로 관찰하지 않는 한 더 이상 남아 있는 부스러기를 찾아낼 수 없을 정도가 되자 그는 만족스럽게 이동을 재개하였다. - <미친 포로 원정대>에서.

결국 그는 하필 겨울 어느 날 포로 두 명과 포로수용소를 탈출해, 케냐 산 레나나 봉 등반에 성공한다. 이처럼 작은 비스킷 하나를 삼등분해 손톱보다 작아진 것을 이틀 만에라도 먹을 수 있음에 행복을 느낄 정도의 굶주림과 추위 등, 숱한 위험과 어려움들을 겪으면서 말이다.

오로지 산 등정을 위해 포로수용소를 탈출한 남자

<미친 포로 원정대> 책표지.
 <미친 포로 원정대> 책표지.
ⓒ 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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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포로 원정대>(박하 펴냄) 그 대략의 줄거리다.

참으로 황당한 것은 이들이 18일간의 험난한 여정 끝에 처벌만이 기다리고 있는 수용소로 되돌아갔다는 것이다.

케냐 산에서의 굶주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포로수용소를 선택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들이 탈출을 감행한 것은 오직 케냐 산에 가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수용소로 되돌아오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수용소로 되돌아갈 날짜까지 지정한 유서까지 작성해놓고 탈출했다고 한다.

'산에 미쳐 산에 간다고 목숨 걸고 탈출을 한다? 다른 곳도 아닌 탈출한 포로수용소로 되돌아간다?' 쉽지 않은 일이다. 이해 또한 쉽지 않다. 소설 속에나 있을 수 있는 일 혹은 제정신 아닌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선택 같다. 그런데 1943년에 실제 있었던 일이다.

저자 펠리체 베누치(1910~1988)는 국가대표 수영선수 활동을 할 정도로 뛰어난 운동신경 소유자였으나 나름의 포부로 로마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후 공무원의 길을 가게 된다. 그리하여 식민지청을 지원, 당시 이탈리아군이 점령하고 있던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로 파견된다.

그런데 1941년에 연합군이 그가 근무하는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그는 자동적으로 전쟁포로가 됐고, 연합국의 한 국가인 영국의 식민지 케냐의 제354 수용소에서 포로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케냐 산 등반의 꿈을 꿀 때까지도 전혀 몰랐던 포로 두 명과 케냐 산을 등정한 후 '최소 4주간의 감방 처분'이 기다리고 있는 포로수용소로 돌아온다.

펠리체 베누치가 동료 포로 두 명과 감행한 자신의 이 황당하고 용감한 모험을 책으로 쓴 것은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1946년 8월 직후. 책은 1947년에 이탈리아에서 출간되었다. 그리고 이후 세계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 출간되어 산악 논픽션의 고전으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책의 존재를 아는 세계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이들의 해발 5000m 가까운 케냐 산 레나나 봉 등정은 이들이 깃발을 꽂은 그 며칠 후 '운 좋게 레나나 봉 등정에 성공한' 또 다른 산악인이 이들의 급조된 듯한 깃발을 발견하면서 세상에 알려진다. 그리고 당시 세계 여러 신문들이 보도, 세계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현실에 대한 용서이자, 자신에 대한 위로

포로수용소에서의 생활과 그 어려운 현실을 극복한 이들의 모험이 많은 사람들에게 절망과 고난을 이겨내는 힘이 되었음은 물론일 것이다. 때문에 오랜 세월 사랑받는 것이 아닐까.

당시 탁월한 기량을 지닌 세계적인 등반가였던 십튼과 틸만이 '여름에조차 가망이 없다'는 케냐 산 등반을 겨울에, 대개의 등반가들이 잘 먹는 것으로 체력을 보충한다거나, 최적의 장비들을 갖춘다거나, 엄청난 무게의 배낭을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다거나, 등반을 목표로 수개월 전부터 몸을 단련하는 것 등과 전혀 정반대인 최악의 조건에서 도전했기 때문이다.

서른을 갓 넘은 나이에 국가가 벌인 전쟁으로 포로가 되어 갇혀 살아야만 했던 펠리체 베누치는 억울했을 것이다. 그는 가장이었다. 가족들 걱정에 앞날이 캄캄했을 것이다. 이런 처지의 그가 선택한 케냐 산은 말하자면 자신에게 드리운 어둠을 극복해내는 희망이자,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자신을 포로로 만든 현실에 대한 용서이자, 그런 자신에 대한 위로이지 않았을까.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의도와 전혀 다른 고난과 역경을 맞닥뜨리게 된다. 또한 이 책의 저자처럼 누군가의 잘못(제1차 세계대전 중이었다)으로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한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동안 이처럼 수없이 겪게 되는 불행 혹은 고난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한 사람의 가치는 고난과 역경, 그 좋지 못한 상황을 어떻게 이겨 내는가에 있다고 믿기 때문일까. 줄거리와 책 정보만으로 언뜻 황당하게 여겨졌던 이들의 모험은 책을 읽을수록 가슴에 잔잔한 감동과 설렘을 일으켰다. 가끔은 떠오를 것 같다. 생명까지 위험한 순간들을 끈끈한 인간애로 이겨내며 케냐 산을 향해 나아가던 이들의 모험, 그 과정들이 말이다.

그들은 왜 목숨 걸고 탈출한 그 지긋지긋한 포로수용소로 되돌아갔을까? 케냐 산을 만나기 전에 지옥 같았던 포로수용소는 이젠 더 이상 극복할 필요가 없는 특별한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 아니었을까? 힘든 누군가에게 절망스런 현실을 적극적으로 이겨낸 그 자체인 이 책이 희망을 향해 가는 길이 되고, 그 길을 가는 힘이 되어 주리라.

덧붙이는 글 | <미친 포로원정대>| (펠리체 베누치) | 윤석영 옮김| 박하 | 2015-04-06 | 원제 Fuga Sul Kenya (1948년) | 1만2500원



미친 포로원정대

펠리체 베누치 지음, 윤석영 옮김, 박하(2015)


태그:#케냐 산, #레나나 봉, #논픽션, #포로수용소, #제1차 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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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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