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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냥 여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 밖에 없어요. 살고 싶으니까. 살기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수밖에 없는 거죠."

신경기변전소에 대한 얘기를 꺼내자 곧바로 돌아온 서완택(59세. 여주시 산북면 후리)씨의 답이다.

지난 13일 세종시 산업자원통상부 청사 앞에서 주민들과 함께 '신경기 변전소 백지화'를 외쳤던 이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그냥 땅을 천직으로 알고 농사를 짓던 평범한 시골 사람들이다.

세종시 산자부 앞 '신경기변전소 백지화' 집회
 세종시 산자부 앞 '신경기변전소 백지화' 집회
ⓒ 이장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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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완택씨는 학교를 마치고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15년전에 귀향했다. 환갑을 코앞에 두고 있지만, 마을에선 몇 안되는 '막내' 펄이 된다. 87세대 193명의 마을 사람 중에 대부분이 60세 이상의 70~80대가 가장 많은 마을이다 보니 젊은(?) 그가 마을의 많은 일을 맡게 되었다.

경기도 여주시 산북면 후리는 지난 해 11월 한국전력공사가 변전소 후보지로 발표한 경기 동부권의 5개 지역 중 하나다. 고려시대 거란의 침입을 담판으로 물리친 장위공 서희 선생의 묘역을 중심으로, 마을 입구는 '향지말'과 '등잔들', 마을 개울 뒤는 '뒷개울골' 등 곳곳이 정감어린 이름으로 불리는 조용한 농촌마을이다.

 '범죄없는 마을'이라는 표지판이 있는 경기도 여주시 산북면 후리 마을 입구
 '범죄없는 마을'이라는 표지판이 있는 경기도 여주시 산북면 후리 마을 입구
ⓒ 이장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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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입구의 '범죄 없는 마을'이라는 표지를 지나 도착한 마을회관에는 커다란 현수막에 '결사반대'의 의지를 담은 현수막이 걸려 있고, 맞은 편에 놓인 조립식 컨테이너에는 '결사투쟁 주민대책본부'라는 현수막과 함께 '초고압 변전소 죽음으로 맞서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현수막이 바람에 나풀거린다.

이 마을의 풍경과 어울리지 않을 법한 비장한 내용을 담은 현수막 사이로 마을에는 조용하다.

'신경기변전소백지화산북면투쟁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서완택씨의 말처럼, 이 마을 사람들은 '머리에 붉은 띠 매는 것'은 남의 일로만 알고 평생을 데모와는 담을 쌓고 살던 사람이다.

대책위 사무실로 쓰기 위한 콘테이너가 마을에 놓여 졌다.
 대책위 사무실로 쓰기 위한 콘테이너가 마을에 놓여 졌다.
ⓒ 이장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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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완택 부위원장과 함께 산북면 대책위원회 정책위원장을 맡고 있는 정석대(53세. 상품3리)씨는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돈(보상) 때문에 신경기변전소를 반대한다고 뒷말도 하는데 우리는 돈이 아니라 그냥 이대로 살고 싶고 살려는 것입니다. 우리를 그냥 놔두라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든지 참 이해하기 어렵네요"라며, 조용한 곳에서 맘 편히 살려고 귀농했는데 신경기변전소로 인해 '전기전문가'가 되었다며 씁쓰레하게 말한다.

"명품리에 사는 90세의 어르신이 '휠체어를 타고서라도 싸우겠다'고 할 정도로 산북면의 신경기변전소 백지화 요구는 강경하다"며 "그냥 이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에서 하나 둘 알다보니 전기정책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부수적으로 알게 되었다"는 정석대 정책위원장은 "산북면 주민들의 적극적인 지지가 있어 우리는 더 힘을 내고 있다"고 한다.

산북면 비상대책위원회 정석대(53세. 상품3리. 사진 왼쪽) 정책위원장과 서완택(59세. 여주시 산북면 후리) 부위원장
 산북면 비상대책위원회 정석대(53세. 상품3리. 사진 왼쪽) 정책위원장과 서완택(59세. 여주시 산북면 후리) 부위원장
ⓒ 이장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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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산과 앵자봉으로 유명한 여주시 산북면은 73%가 산으로 둘러 싸인 아담한 고장으로, 작년 6월말 기준으로 인구가 2537명에 불과한 작은 고장이다.

지난해 11월 한전이 신경기변전소 후보지로 여주시 산북면 후리와 금사면 전북리, 이천시 마장면 관리, 양평군 강하면 전수리, 광주시 곤지암읍 삼합리, 양평군 강하면 전수리 등 5곳을 발표했을 때 산북면에서는 후리뿐 아니라 9개 마을의 이장과 새마을지도자 등이 대책위원회를 꾸렸고 대응에 나섰다.

후보지로 발표된 5곳 중 가장 인구가 적은 곳의 하나지만 서완택 부위원장은 "예비후보지는 후리지만 산북면 사람들은 산북면의 일이고 우리 이웃의 일이라는 공감대가 강하다"고 강조한다.

인구 2500여 명 남짓한 이곳에서 대책위원회를 꾸리자 운영에 필요한 '기금 모으기'가 시작됐고 불과 서너 달 만에 1억여원 가까이 모였다.

돈뿐만 아니라 지난해 여주시청 앞 집회와 한전 본사 앞 집회, 밀양 방문 등 대대수 주민들의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산북면 주민 대부분이 참가해 '백지화'와 '결사반대'를 함께 외칠 정도로 산북면 공동체의 단단한 유대를 보였다.

정기적으로 1주일에 한 번씩 매주 토요일 저녁에 모여 신경기변전소 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일이 번거롭고 귀찮을 수도 있지만 한 마을의 일이 아니고 전체의 일이라는 인식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이 주민들의 말이다.

여주시 산북면사무소에서 바라 본 후리 마을의 전경
 여주시 산북면사무소에서 바라 본 후리 마을의 전경
ⓒ 이장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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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 준비에 한창이어야 할 농촌 어르신들을 '데모'로 내몬 것은 '전기'라는 생필품이 아니라 '불합리한 전력정책'"이라는 정석대 정책위원장의 말은 한전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화두처럼 들렸다.

'범죄 없는 마을'에 어울리지 않을 법한 '결사투쟁'의 낱말처럼, 이 마을 사람들의 삶은 한전이 발표한 신경기변전소 후보지로 인해 바뀌었다.

사람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회라면, 사람들의 평온한 삶을 강제로 송두리째 바꿔놓을 권한은 아무에게도 없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주민들이 동의없이 한국전력공사가 발표한 신경기변전소 후보지인 산북면 후리나 금사면 전북리, 이천시 마장면 관리, 양평군 강하면 전수리, 광주시 곤지암읍 삼합리, 양평군 강하면 전수리 주민들의 삶이 뒤흔들리고 있는 것은 불공정하다.

신경기변전소 백지화 의견을 적은 펼침막이 걸린 마을회관에는 솨사슬로 묶인 가스통이 놓여 있다
 신경기변전소 백지화 의견을 적은 펼침막이 걸린 마을회관에는 솨사슬로 묶인 가스통이 놓여 있다
ⓒ 이장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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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아픔'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지금 우리 사회가 선택할 것은 아직도 많다.

주민들이 주장하는 '백지화'와 '전력정책 개선'에 대해 우리 사회가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한국전력이 경기 동부권에 설치할 예정인 신경기변전소는 신울진원자력발전소에서 생산한 전력을 수도권에 공급하기 위해 짓는 시설로 부지면적 8만8천㎡에 765kv 주변압기, 755kv·345kv급 송전선로, 송전탑 170여 기 등으로 구성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4월 20일자 <남한강신문>에도 게재 됩니다.



태그:#여주시, #한전, #송전탑, #변전소, #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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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여주에서 지역신문 일을 하는 시골기자 입니다. 지역의 사람과 역사, 문화에 대해 탐구하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이런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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