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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우리나라를 쳐들어온 지 1년이 지난 1593년 4월 19일에 일본군은 서울에서 물러나고, 우리 군사들은 명나라 군과 함께 4월 20일 서울로 들어갔다. 나도 명나라 군사들을 따라 서울 도성에 들어왔는데, 성안에서 살아남은 백성들은 100명에 1명꼴도 되지 않았다.

살아있는 사람들도 굶주려서 비쩍 마르고 병들고 지쳐 귀신처럼 보였다. 이때는 날씨가 몹시 더웠는데, 곳곳에 사람과 말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어서 썩는 냄새가 성안에 가득 찼다. 코를 막지 않고는 길을 지나갈 수 없을 정도였다. -<징비록> 144쪽-

임진왜란 당시, 서울의 실상을 기록하고 있는 <징비록> 내용 중 일부입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처참하고 끔찍합니다. 살아남은 백성이 채 1%도 되지 않았다고 하니 임진왜란 당시의 서울은 멸종에 가까운 참혹입니다.

영의정 유성룡이 기록한 임진왜란 실상 <징비록>

<징비록> (원작 유성룡 / 옮긴이 김기택 / 해설 임홍빈 / 그림 이부록 / 펴낸곳 알마 출판사 / 2015년 2월 15일 / 값 1만 3800원)
 <징비록> (원작 유성룡 / 옮긴이 김기택 / 해설 임홍빈 / 그림 이부록 / 펴낸곳 알마 출판사 / 2015년 2월 15일 / 값 1만 3800원)
ⓒ 알마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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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은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을 지냈던 유성룡이 남긴 기록입니다. 그렇습니다. <징비록>은 후대에 역사가들이 쓴 게 아닙니다.

모든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던 현직 영의정, 유성룡이 임진왜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임진왜란 당시 목격하거나 들었던 끔찍하고 처참했던 상황 등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평소 큰소리 떵떵 치며 행세깨나 했을 위정자들, 소위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도 빠트리지 않았습니다. 유성룡은 징비록을 쓴 이유를 '<시경(詩經)>에 "지난 일의 잘못을 주의하여 뒷날에 어려움이 없도록 조심한다"라고 했는데 이것이 징비록을 쓴 이유다'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징비록>을 읽다보면 임진왜란 당시, 성안에 살아남은 백성이 100명에 1명꼴도 되지 않을 만큼 처참하게 우리나라가 당할 수밖에 있었던 이유를 충분히 어림할 수 있습니다.

전란에서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제일의 덕목은 부하들이 기죽지 않고 싸울 수 있도록 지도력을 발휘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지도자 개인의 전투 능력, 통솔력, 뛰어난 체력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믿고 따를 수 있는 신뢰, 두려움 없이 싸울 수 있는 용기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역할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때 당시 조선의 지도자들이 보였던 모습은 못나고, 비겁하고, 무능력하고, 이기적인 모습입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중상모략, 암투, 시기, 공 가로채기, 허위보고가 횡횡하였으니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에서 그토록 참혹하게 패배하는 건 어쩜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수군을 맡고 있던 경상좌도 수사 박홍은 한 사람의 군사도 싸움터에 내보내지 못하고 도망갔고, 경상우도 수사 원균은 배를 많이 갖고 있었지만, 적이 보이기만 해도 멀리 피하여 한 번도 적군과 싸워보지 못했다. 육군을 맡고 있던 경상좌도 병사 이각은 도망만 다녔고, 경상우도 병사 조대곤은 김성일로 바뀌어 물러났다. 일본군은 마음껏 북을 치고 행진하면서 수백 리 길을 마치 아무도 없는 벌판을 지나가듯 마음껏 내달렸다. -<징비록> 55쪽-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을 치듯 달아나는 장수들에게 지도력이란 게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런 지도자들이 치르는 전쟁에서 싸울 수 있는 기(氣)가 살아 있을 리 없습니다. 기(氣) 꺾인 군사, 기(氣) 죽은 백성들은 왜군이 출몰했다는 소문만 들려도 지레 겁먹고 도망을 다녔으니 지도자들이 보였던 모습은 '찌질' 그 자체였습니다.

며칠 후에 일본군의 배가 가까운 성으로 쳐들어왔다. 이순신은 군사들을 보내 이를 다 쳐부수고, 적군의 머리 40개를 베어 모두 진린에게 주며 이 승리를 진린의 공으로 돌렸다. 진린은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대접을 받았다고 하면서 매우 기뻐했다. -<징비록> 176쪽-

이순신이 역사적 영웅이 될 수 있었던 배경

그러함에도 조선에는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중상모략을 입어 백의종군해야 하는 신세였지만 이순신은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모든 덕목을 갖춘 명장이자 덕장이었습니다.

그 어려운 여건에서 이순신이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명장이 될 수 있었었던 건, 명장의 덕목으로 보여준 전술전략과 지도력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에 버금가는 처세술이 있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명나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아야 했던 조선이지만, 함께 전쟁을 치러야 하는 명나라 장수 진린과 이순신은 자칫 갈등 관계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순신이 속 좁은 인간, 공명심에 들떠 공이나 챙기려는 졸장, 알량한 자존심만을 고집하는 지도자였다면 진린과 갈등의 관계가 되었을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진린을 진심으로 맞이해 주고, 승리의 공을 진린에게 돌림으로 진린의 믿음과 마음을 얻었습니다.

전투에서 얻은 승리, 승리의 공은 진린에게 돌린 이순신의 처세와 지도력은 나라를 구한 공으로 돼 한 나라의 역사에서 길이길이 추앙받는 불멸의 영웅으로 기록됩니다.

유성룡이 <징비록>을 쓴 진짜 이유

유성룡이 <징비록>을 기록한 이유는 조선의 영의정을 지낸 지도자로서 지난 잘못을 통렬히 고백하는 반성문이자 미래의 지도자들에게 보내는 경고문일지도 모릅니다. 입신양면과 사리사욕이 우선인 지도자, 무능력하고 무책임하고 인간성까지 찌질한 지도자는 나라를 위험하게 만들고, 국민들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걸 입증해 보이는 역사적 기록이라 생각됩니다.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위정자였던 유성룡이 <징비록>을 통해 후세의 위정자나 지도자들에게 보내고 싶었던 진짜 메시지는, 모든 지도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누군가는 알고 있고, 누군가는 기록하고 있다는 걸 명심하고 또 명심하라는 엄중한 역사적 경고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덧붙이는 글 | <징비록> (원작 유성룡 / 옮긴이 김기택 / 해설 임홍빈 / 그림 이부록 / 펴낸곳 알마 출판사 / 2015년 2월 15일 / 값 1만 3800원)



징비록 - 유성룡이 보고 겪은 참혹한 임진왜란

김기택 옮김, 임홍빈 해설, 이부록 그림, 유성룡 원작, 알마(2015)


태그:#징비록, #유성룡, #김기택, #알마, #임홍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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