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밥이 어디서 나는지 알아?"아이가 어렸을 때 반찬 투정이 좀 심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아이에게 한 질문이다. 농부가 얼마나 고생해 쌀 한 톨을 생산하는지 일러주려는 질문이다. 한편으로는 어렸을 때 어머니의 농사를 도왔던 왕년 농부로서의 사명감이 불타서 나온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이의 대답은 여지 없이 내 기대를 어그러뜨린다.
"쌀나무에서 나는 거 아녜요?"아이는 태연히 대답한다. 뭘 그런 마땅한 질문을 하냐는 투다. 그러면 으레 꿀밤 한 대 안기곤 생산 과정을 설명한다. 쌀나무가 아니라 벼이며, 이른 봄에 볍씨를 뿌려 모판에서 자라게 한 후 모내기 철이 되면 모판의 벼를 갈아 놓은 논에 못줄을 띄우고 칸칸이 심었다는 고전 같은 이야기를 말이다.
몇 번의 김매기와 피사리며, 비료 살포 및 농약 살포에 이르기까지 농부가 얼마나 고생을 하는지, 가을 걷이 벼 베기, 탈곡을 하고 방앗간에 날라다 도정을 하는 이야기까지. 숨을 몰아쉬며 농부의 땀 흘리는 품을 아이 머릿속에 깊숙이 심어 주려고 한 마당 연설을 한다. 그러나 아이는 나를 맥 빠지게 하는 한 마디로 마무리 짓고 밥 숟가락을 놓고 일어선다.
"맛도 없는 밥을 뭐하러 먹어요. 농부 고생시키고. 이젠 빵이나 치킨으로 식사하면 되겠네요."이런 낭패가 어디 있나. 새삼 거의 30년 된 이야기가 떠오른 것은 커피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한두 잔의 커피를 마신다. 그간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먹는 음식이었던 김치를 제치고 커피가 그 자리를 꿰찼다는 보도를 접하기도 했다. 우리가 커피를 대하는 자세가 아이의 어린 시절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안락한 커피 소비자, 굶주린 커피 농민
큰사진보기
|
▲ <Brewing change>(릭 페이저, 빌 메어스 지음 / 박진희 옮김 / 테라로서 펴냄 / 2013. 11 / 247쪽 / 2만원) |
ⓒ 테라로사 |
관련사진보기 |
우리는 커피 맛이 있는지 없는지에 관심이 많다. 커피값이 비싼지 싼지에 관심이 많다. 그러나 정작 커피는 어디서 어떻게 재배되는지, 커피를 생산하는 농민들은 어떻게 사는지 거의 무관심하다. 안타깝게도 쌀을 생산하던 우리나라의 1950~1960년대 농민보다 더 가난하고 더 열악한 환경에서 산다. 우리가 커피를 아무리 많이 소비해도 그들의 삶은 도무지 나아지지 않는다. 그게 더 비극이다.
릭 페이저는 <Brewing change, 로스 메세스 플라코스 커피 산지의 굶주림>에서 아래와 같이 울분을 토한다.
"빌의 이야기를 듣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안락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우리가 마시는 커피를 재배하는 농민들은 가난하다니. 도대체 얼마나 가난하단 말인가? (중략) 난 너무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농민들이 그렇게 가난할 수 있단 말인가? 커피는 매년 수십 억 달러의 수익을 내는 산업인데." -<Brewing change> 38쪽 중에서'커피 키즈'라는 비영리단체를 통해 커피 산지의 농민을 돕는 빌을 통해 그들이 얼마나 가난한 지 듣고 화가 나서 릭이 한 말이다. 릭 페이저는 커피 회사 '그린 마운틴'의 직원으로, 커피 산지를 돕기 위한 프로젝트를 가장 강력하게 추진한 인물이다. 빌도 한때는 "과테말라에 가기 전엔 커피가 트럭 트렁크에서 나오는 줄 알았다"고 고백한다. 내 아이의 어린 시절 딱 그 모습이다.
그런데 그게 바로 나를 포함한 대부분 커피 소비자들의 모습이다. 이들은 너나없이 우아한 커피(?)를 소비한다.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시시덕거린다. 커피 한 잔을 시켜 놓고 휴대폰이나 노트북 등 최신 기기들을 켜고 세계의 정세와 요즘의 트렌드를 검색한다. 충분한 커피값을 지불했으니 그만큼의 호사는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충분한 값이 대형 커피 전문점과 도매상들의 마진으로만 자리매김하는 걸 알고 있는가. 미국 스페셜티 커피협회(SCAA, Speciality Coffee Association of American)가 공정 무역과 커피 산지의 가난에 눈을 돌릴 때인 1990년엔 대형 커피 전문점으로 대별되는 스타벅스는 참여하지 않았다. 8년 후 떠밀려 참여했다. 스타벅스가 특별히 악한 기업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커피 업계가 커피 농가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커피에도 필요하다[모습 1] 과테말라, 비포장 도로를 한참 달리다 조그만 예배당이 나온다. 가축들의 외양간들이 보인다. 알고 보니 외양간이 아니라 비만 피할 수 있는 열 가구의 집이다. 사생활도, 화장실도 아무것도 없다. 흙바닥에 가구 한 점 없다. 이들에게는 일 년에 몇 달씩 전혀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는 기간이 있다. '로스 메세스 플라코스(배고픈 시기)'라고 한다.
[모습 2] 그들이 일하는 농장은 거대한 농장 저택이 있고, 둘레로는 울타리가 쳐 있다. 웨트밀과 드라이밀 가공 시설이 완벽하다. 현대식 숙소와 과테말라 국조인 케잘의 모습이 박제된 장식이 놓여있다. 딱정 벌레가 커피 잎에 붙어 있다. 이는 유기농이라는 증거다. 잘 가꾸어진 나무들이 커피 나무에 그늘을 만들고 새들이 지저귄다. 무장을 한 경비원들이 강도라도 침입할까 봐 물 샐 틈없이 지킨다.
모두 과테말라 커피 산지의 모습이다. 이와 같은 모습은 대부분의 커피 벨트의 모습이기도 하다. 대농장과 커피 농민,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모습이 한 동네에서 펼쳐진다.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그렇게 한 동네에서 산다. 커피의 우아한 소비자인 우리는 어디에 속하는 걸까 생각하게 만든다.
커피 농민들은 '로스 메세스 플라코스'를 인내하며 지낸다. 커피를 판 돈이 떨어지거나, 옥수수나 콩의 가격이 올라갈 때 커피 농민들은 굶주림과 싸워야 한다. 거의 일년 중 절반을 그렇게 굶주림과 싸울 때도 있다고 책은 알려준다. 그러나 모두 건전하게 이 기간을 이겨내는 것만은 아니다. 마약 재배를 하는 농민들도 있다.
"에티오피아의 농민들이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커피 대신 마약 작물을 재배한다는 현실이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에티오피아는 커피의 고향이자 성지가 아닌가. 다시 한 번 커피 농민들의 어려움은 세계 공통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깨끗한 물과 음식, 의료 및 교육시설, 외부와의 교통수단이 절실했다. 그 중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겨우 15살 나이에 임신한 어린 소녀들에 대한 교육 혜택이 꼭 필요했다."- <Brewing change> 153쪽 중에서우리는 흔히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대하여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정작 커피를 소비하는 커피인으로서의 의무에 대하여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책의 저자 릭 페이저는 지속 가능한 커피 생산과 공정 무역, 유기농 커피라는 등식을 돈 벌기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굶주린 커피 농민의 삶의 개선에 초점을 맞춰 SCAA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커피 농민들의 삶의 질 개선을 위해, 구체적으로 깨끗한 물과 음식, 의료 및 교육 시설, 외부와의 교통 수단 등에 커피를 판 돈을 투자했다. 그 성공적인 이야기가 이 책이 되어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쌀나무에서 쌀이 나는 것'이라는 아이의 공상적 감각으로는 더 이상 커피의 우아한 즐김이 허물어질지도 모른다. 이제 공정 무역 커피와 유기농 커피를 즐거운 마음으로 제값 주고 마시는 운동에 동참하면 어떨까.
덧붙이는 글 | (릭 페이저, 빌 메어스 지음 / 박진희 옮김 / 테라로서 펴냄 / 2013. 11 / 247쪽 / 2만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