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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와 오토바이, 자전거들이 엉켜서 다닌다.
▲ 미얀마 딴린의 거리 자동차와 오토바이, 자전거들이 엉켜서 다닌다.
ⓒ 김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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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자출사'다. 순도 100%다. 운전면허가 없다. 자출을 하면 버스 꽁무니에서 페달을 밟을 때가 있다. 달리는 자전거가 갓 출발한 버스를 1차선으로 추월하기 어렵다고 판단하면 속도를 늦춰야 한다. 배기통에서 내뱉는 매연의 농도가 옅어질 때까지. 그날 그 뜨거운 거리에 섰을 때 나는 배기통과의 거리가 불과 20m 정도일 때 견뎌야 하는 매연의 농도를 느꼈다.    

인도 쪽으로 붙어서 갓길을 달리다가 버스가 뒤에서 빵빵거리면 승용차 운전자들처럼 나도 신경질이 난다. 혈기왕성했을 때는 2차선 가운데로 들어가서 무모하게 '1인 시위'를 한 적도 있다. 버스를 가로막고 깐죽거리는 자전거. 내가 버스 운전자였더라도 어이가 없겠지만 교통 법규상 자전거 도로가 없으면 인도가 아닌 차도로 주행해야 하는 '자전거도 차다!' 그런데 그 거리에서 섰더니 너도나도 빵빵거리는 통에 정신 줄을 놨다.   

고장 난 경운기를 밧줄로 끌고 가는 경운기, 자전거 옆에 수레(Side Car)를 달고 페달을 밟는 아저씨, 대형 트럭 짐 꼭대기에 위태롭게 앉은 4~5명의 노동자들, 오토바이에 4인 가족을 싣고 가면서 경적을 울리는 아버지. 아스팔트 위에 이렇게 다양한 교통수단들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대체 이 많은 사람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황금불탑의 나라 미얀마는 조용하지 않았다. 아니, 고요와 번잡함이 공존했다. 다나까를 얼굴에 칠하고 활짝 웃는 수투판 고아원 아이들의 얼굴은 평화로웠지만 거리에서는 도통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관광 안내 책자에는 붉은 적삼을 걸치고 맨발로 탁발하는 수행승의 고요함이 담겨 있었지만, 거리에 서니 비행기 안에서의 상상력이 날아갔다.

그 순간을 <오마이뉴스>의 새로운 모바일 플랫폼인 10초 영상 '섬'(SOME)에 담고 '모이'(Moi)로 날렸다. ☞ <모이> 맛보기

미얀마에서 본 장면을 곧바로 <모이>에 올렸다.
▲ <모이> 플랫폼 미얀마에서 본 장면을 곧바로 <모이>에 올렸다.
ⓒ 김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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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린의 거리] 15분 만에 도착한 '딴 세상'

하얀 코끼리 자원봉사자들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지고 대신 땀으로 옷이 젖을 무렵인 첫째 날(29일) 오후, 햇볕에 나가면 땀을 뻘뻘 흘린다고 엄살을 떨던 나의 룸메이트이자 칼럼니스트인 하도겸씨가 나를 유혹했다.

"혹시, 시내에 나가보실래요?"
"어떻게?"

귀가 솔깃했다. 페인트칠을 하는 자원봉사자들을 슬쩍 쳐다봤더니 거의 무아지경 상태였다. 우린 고아원을 빠져나왔다. 그가 운전대를 잡았다. 땡볕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자원봉사자들을 위한 간식 추진 조였다. 현지 적응력이 놀랄 정도로 빠른 그는 베스트 드라이버였다. 적어도 미얀마에서 그의 거친 운전은 통했다. 10여 분간 비포장 길을 먼지 폴폴 나게 달렸다. 행인과 경운기를 피하면서 곡예운전을 했다. 차가 요동칠 때 내 입에서 농담 반 걱정 반으로 한마디 튀어나왔다.

"어이쿠! 미얀마 원주민 같네. 국제운전면허는 있는 거죠?" 

우람한 돼지들이 도로 옆쪽에서 물을 핥아먹었다. 방목한 소는 닭들과 함께 어슬렁거렸다. 탈탈거리며 지나가는 경운기 위에 다나까를 바른 여자 농부가 무심하게 나를 쳐다봤다. 비녀 대신 칫솔을 머리에 꽂고 쭈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는 할머니가 스쳤다. 그 뒤쪽으로 나뭇잎 집이 기우뚱 스러져갔다. 비포장도로 옆에 쓰레기 무더기가 쌓여 있다. 내가 기억하는 70년대 여름, 충청도의 시골 풍경처럼. 

그의 거친 운전은 15분 만에 끝났고, 그는 나를 딴 세상으로 데려왔다. 버스는 뒷문을 열고 달렸다. 그 문에 매달려 몸을 반쯤 바깥으로 내놓은 남자 '차장'은 행선지를 외쳤다. 양손을 놓고 오토바이를 타는 기술자도 있었다. 수레를 단 자전거도 노인을 싣고 달렸다. 앞은 경운기인데 뒤쪽은 차량인 '반경반차'도 있었다. 뒷부분에 철제 골조만 남긴 트럭(Truck Bus)에도 사람들이 빽빽했다. 80년대에 나를 태운 군용트럭도 그렇게 달렸다.
앞뒤 문을 연채로 달린다.
▲ 미얀마 버스 앞뒤 문을 연채로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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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 위에 탄 사람들.
▲ 딴린의 거리 트럭 위에 탄 사람들.
ⓒ 김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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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분해서 '쌍권총 셔터'를 눌렀다

빵-빵-빵-빵-.

딴린의 거리는 예의가 없었다. 입 밖으로 육두문자가 나와야 경적을 울리는 우리와 달랐다. 오토바이와 승용차, 버스는 습관적으로 경적을 울렸다. 한국인인줄 알고 처음에는 신경질을 냈지만 익숙해졌다. 교통경찰도, 심지어 횡단보도와 신호등도 없는 거리에서 경적만이 유일한 사고방지 시스템으로 보였다. 행인들은 이 혼란스러운 도로를 무단 횡단했다.

이국에서 맛본 황당한 풍경. 엇나간 기자 정신이 꿈틀거렸다. 짧은 다리에 겨울 바지를 무릎까지 걷고 중앙선으로 나가서 질주하는 것들을 향해 '쌍권총 셔터'를 눌렀다. 한 손엔 후배에게 빌려온 카메라, 다른 한 손엔 동영상이 돌아가는 핸드폰 카메라를 들었다. 우스꽝스럽고 무모한 이국인을 알아볼 사람은 없을 테니까. 물론 적극적인 사진 취재와 사진의 질이 비례하는 건 아니다.

두발과 세 바퀴, 네 바퀴가 뒤죽박죽인 거리에서 느낀 속도감. 이게 바로 경제성장을 추구하면서 민심 이반을 다독이려는 미얀마 군부정권의 민낯인가? 군부정권이 버마에서 '미얀(빠르다)마(튼튼하다)'로 이름을 바꾼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일까? 혹시 이들도 우리처럼 속도에 취해 자본과 인간적인 삶을 맞바꾸려는 것은 아닐까? 목이 타는 딴린의 거리에서 심각한 질문을 던질 때, 또 다른 질문이 끼어들었다.
     
"맥주 한 잔 하실래요?"

매캐한 거리에서 룸메이트가 건넨 미얀마 캔 맥주는 시원했다. 수박과 음료수, 빵을 사들고 돌아온 수투판 고아원은 딴린의 거리와는 딴판이었다. 제3세계의 자원봉사자들이 땀을 흘리고 있었다. 미안했지만 평화로웠다. 건물 앞에 망부석처럼 앉았던 '공사반장' 영담 스님(사단법인 하얀 코끼리 이사장) 주변으로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미얀마 말을 잘한다거나 외모가 친근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의 즉석 출력 사진기(폴라로이드 사진기)가 비결이었다.

"야, 이 눔들아! 줄 좀 제대로 서라! 하-하."

물론 영담 스님은 한국말로 이야기했다. 나는 잠시 다른 나라를 다녀왔다는 착각이 들었다. 

야시장이 사람들로 붐빈다.
▲ 미얀마 딴린의 야시장 야시장이 사람들로 붐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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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시장] 심지어 게를 통째로 튀겨 먹었다

"오늘 밤, 야시장 갑니다."

영담 스님의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어린 자원봉사자들의 입이 귀에 걸렸다. 수투판 고아원 자원봉사를 끝내고 인근 사찰에서 벌어지는 축제의 야시장 투어였다. 숙소 식당에서 자기소개를 하고 평가회를 마친 뒤, 오후 9시 30분경부터 걸었다. 현지 안내인 마웅저씨는 "잠깐 걸어서 가면 된다"고 말했지만, 만만치 않은 거리였다.

대형트럭과 트럭버스, 관광버스, 오토바이, 자전거가 왕복 2차선 도로를 달렸다. 한 오토바이 운전자는 잠시 서서 뒤에 타라고 손짓했다. 내 주머니엔 짯(미얀마 돈)으로 바꾸지 못한 달러 밖에 없었고 그가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몰랐다. 우리는 인도가 따로 없고 가로등도 없는 도로 옆 흙길을 씽씽 달리는 자동차들의 헤드라이트 불빛에 의지해 위태롭게 걸었다. 무려 30여 분 동안이나.

"1년에 한번 열리는 축제가 어제부터 시작됐어요. 한 보름간 열립니다."

마웅저씨가 말했다. 딴린의 '짜익카욱 파고다' 불탑을 중심으로 한 'Full Moon Day of Pagoda Festival'이 시작됐다. 우리로 치면 대보름 행사를 2주일동안 하는 셈이다. 그 깊은 밤에 도로는 노점상과 행인, 차량으로 뒤죽박죽이었다. 아마도 낮에 본 딴린의 번잡함도 이 축제와 관련이 된 듯했다.

버스트럭에 타고 있는 아이들.
▲ 미얀마 딴린 야시장 버스트럭에 타고 있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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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늠하기 어렵지만 야시장은 탑 주변으로 반경 2~3km에 걸쳐 열린 것 같았다. 품목은 달랐지만 한국판 남대문 시장과 비슷했다. 노점상들이 수천 명에 달했다. 옷과 중고 핸드폰, 보석, 액세서리 등 비교적 비싼 품목을 파는 상인들은 엉성한 천막 안쪽에서 사람들을 맞았고 삶은 계란, 옥수수, 풀빵, 다나까 나무 등을 파는 노점상들은 도로 바로 옆쪽에 진을 쳤다.

더운 나라였기에 튀김이 유독 많았다. 게까지 통째로 튀겨 먹었다. 작은 새우를 한 주먹씩 뭉쳐서 튀겨 파는 상인도 있었다. 한국에서 비행기로 5시간 떨어진 곳에서 삶은 메추리알과 계란을 보았을 때 반가웠고 동질감을 느꼈다. 형형색색의 색소가 들어간 길거리 음료수, 숯 화덕에 구운 빵, 꼬치, 나무속에 찐 밥 등 미얀마 음식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게를 통째로 튀겨 파는 노점상
▲ 딴린 야시장 게를 통째로 튀겨 파는 노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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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점상들은 삶의 활기를 팔았다

낮에 땀을 뻘뻘 흘린 하얀 코끼리 자원봉사자들은 관광객으로 변했다. 30여 분간 신기한 음식으로 눈요기를 하다가 자리 잡은 곳은 돼지 내장을 대나무에 끼어 길게 늘어놓은 노점상이었다. 내장에도, 내장을 끊이는 냄비 속에도 흙먼지가 들어가는 게 눈에 보였다.

앉은뱅이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더니 이쑤시개로 찍어먹을 수 있게 내장을 썰어서 식탁에 두 접시 올려줬다. 미지근한 게 비릿했다. 더운 날씨 때문에 음식을 식혀 먹는다는데, 도통 먹을 수가 없었다. 자칫 잘못 먹었다가 배탈이라도 난다면? 민폐였다. 아내의 경고가 떠올랐다. 대신 종지에 담긴 작은 고추를 한 입 베어 물었다가 혀가 벌겋게 익었다. 청양고추보다 매웠다. 

바로 옆에서 마술사가 공연을 했다. 큰 상자에 사람을 집어넣고 10여개의 칼을 꽂고 있었다. 내 옆의 한 청년은 침을 튀겨가면서 여자 친구에게 뻔한 스토리를 설명하는듯했다. 돈을 낸 사람들은 안쪽에 앉았고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먼발치에서 구경했다. 그런데 클라이맥스 직전에 마술사의 모습이 안 보이게 커튼을 쳤다. 맛보기였다. 행인들은 실망한 눈빛으로 흩어졌다. 미얀마 사람들이 마냥 너그러운 것은 아니었다. 

번쩍거리면서 놀이기구도 돌아갔다. 크지는 않지만 바이킹 같은 기구에 올라탄 아이들은 소리를 질렀다. 그 옆에서는 시끄럽게 음악을 틀어놓고 음식과 음료수를 팔았다. 도로 위에서는 트럭버스들과 오토바이가 경적을 울리고 다녔다. 거리 곳곳에서 아이를 엎거나 안은 거지들이 손을 내밀었다. 

화덕에 빵을 굽는 노점상.
▲ 미얀마 딴린의 야시장 화덕에 빵을 굽는 노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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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치를 파는 아저씨.
▲ 미얀마 딴린의 야시장 꼬치를 파는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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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시장에서 대화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시끄러운 음악과 경적소리들. 딴린의 거리에서 마주친 소음과는 결이 달랐다. 아니,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은 가난하고 어두운 거리에서 함께 달렸다. 축제의 거리에서는 삶의 활기를 팔고 나눴다. 지금은 동네슈퍼까지 대형마트에 쫓겨났지만 30~40년 전 시골 장바닥에서 우리도 그랬던 것처럼.

밤 12시경에 트럭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오던 길. 일행 중 한 명이 "우리가 이렇게 많이 걸었나?"라고 혼잣말을 했다. 나도 표현은 안 했지만 불안했다. 그 때 지폐를 쥔 손으로 트럭 꽁무니를 잡고 곡예를 하던 '남자 차장'이 달리는 차에서 머리를 옆으로 내민 채 큰 소리로 운전자와 심각한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길을 잃었다. 트럭버스 안에는 미얀마 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이러다가 새우잡이 배로 팔려가는 것 아녀?"

누군가 농반 진반으로 말했고, 그 때 베스트 드라이버인 나의 룸메이트가 조수석에 타서 길을 안내했다. '아니 저 자가 어떻게 길을 알지?' 다행히 우리는 새우잡이 배에 팔려가지 않았고 숙소에 도착했다. 그가 길잡이로 어느 정도 기여했는지 알 수 없지만 밥값은 한 것 같았다. 낮부터 정신 줄을 놓았기에 그날도 그가 코를 심하게 골았는지는 기억에 없다.

☞1편 바로 가기 : 뭐지? 몸에서 사리 나올 것 같은 이 분위기


태그:#미얀마, #하얀 코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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