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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론시에서 엘니도로 가는 정기 여객선
 코론시에서 엘니도로 가는 정기 여객선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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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카(필리핀 배) 선미 맨 끝에 자리를 잡았다. 선미에서 선수 쪽으로 비스듬히 경사진 나무 갑판 위였다. 두 바퀴쯤 구르면 옆 사람과 몸이 포개질 정도로 좁은 공간. 그 위에 햇빛 가리개 천막이 처져 있었다. 코론 시 항구에서 엘니도로 가는 정기 여객선이다.

뱃삯 1800페소(한화 약 4만 5천 원), 7시간쯤 걸리는 먼 바닷길이라 '대형 여객선이겠지' 했는데, 생각보다 작은 방카였다. 뱃멀미를 하지 않을까, 나는 그게 좀 걱정됐다. 다행히 날씨는 화창했고, 바다는 잔잔했다. 순탄한 항해가 될 것 같았다. 

내 옆에는 한 유럽 청년이 머리에 배낭을 받치고 일찌감치 누워 있었다. 외국인은 그와 나, 둘 뿐인 것 같다. 필리핀 승객 20여 명이 우리 아래쪽으로 앉았거나 누웠다. 

오전 7시 30분, 드디어 방카가 출발했다. 나는 멀어져가는 부수앙가 섬에서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다시 오지 못할 곳에, 다시 만나지 못할 그리운 사람들을 두고 떠나는 양, 애잔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19일 동안이나 떠돈 팔라완 칼라미안 제도의 바다와 섬들. 방카는 그 섬과 섬들 사이 바닷길을 따라 남서쪽으로 향했다.

코론시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나도 누웠다. 구명 조끼를 벗어 바닥에 깔고 배낭을 머리에 벴다. 방카의 엔진음과 뱃전에 부딪히는 물살과 바람 소리를 들으며 잠깐 눈을 감고 있었다. 지난 여행 시간들이 꿈길처럼 혼곤하게 밀려왔다 밀려갔다. 미지의 시간에 대한 설렘과 두려움도 교차했다. 여행 앞에선 늘 두 가지 감정이 뒤섞여 마음이 혼란스럽다. 

엘니도로 가는 정기 여객선. 햇빛 가리개 아래 갑판에 누워...
 엘니도로 가는 정기 여객선. 햇빛 가리개 아래 갑판에 누워...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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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몸도 마음도 가볍게

한센병 환자촌으로 유명한 쿨리온 섬에서 코론시로 돌아온 날, 나는 짐을 다시 정리했다. 먼 길을 앞에 두고 여행의 전열을 재정비하듯.

스쿠버다이빙 책 두 권, 여행 중 틈틈이 공부하겠다고 챙겼던 영어 전치사 문법책, 다시 보려고 책장에서 빼 온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 읽다가 들고 온 <북유럽 신화 여행>, 레인판초, 꽃무늬 원피스, 운동화, 선물 받은 몇 가지 소품들을 한국으로 부쳤다. 직원 두 사람이 일하는 코론시 우체국에서 소포로.

책을 덜어내니 배낭 무게가 팍 줄었다. 남은 짐은 반팔 티셔츠 두 장과 반바지, 긴 바지 하나씩, 세면도구, 비상 약품, 속옷, 사롱, 수건, 여행 일지, 볼펜 두 자루, 팔라완 가이드북, 맥가이버칼, 스노클링 장비, 샌들, 모자.

'가볍게 다녀야 자연을 더 즐길 수 있다! 가벼움은 자유다!'라며 가볍게 장비를 꾸려 트레킹을 하는 방법에 관한 책, 쓰치야 도모요시의 <울트라 라이트 하이킹>에서 말하는 8~9 킬로그램의 '경량' 짐을 그렇게 만들었다.

문제는 DSLR 카메라와 노트북이었다. 무거운 데다 챙겨 들고 다니기 조심스러운 물건들. 노트북은 여행 내내 애물단지가 될 것 같다. 전기와 인터넷 사정이 안 좋은 팔라완에서는 찍은 사진을 저장해놓는 것 말곤 더 써먹지 못할 것 같았다. 그날그날 여행기를 실시간 블로그에 올리겠다는 생각으로 들고 왔는데... 낭패다. 

코론시의 작은 우체국에서 여행 짐을 덜어 한국으로 보내다
 코론시의 작은 우체국에서 여행 짐을 덜어 한국으로 보내다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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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노련하게 계산'하며 짐을 덜어낸다고 덜어냈으니, '앞으로는 짐 때문에 고생도 덜 할 테고, 더 가볍게 자연을 즐길 수 있겠지' 기대했다.

눈을 감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오!" 갑자기 탄성이 들려왔다. 뭐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두리번거렸다. 옆자리 유럽 청년이 손짓으로 내 눈길을 동쪽 바다로 보냈다. 청년의 손가락 끝에 날치 몇 마리가 배지느러미를 활짝 편 채 날고 있었다. 통통통 물 수제비 뜨는 돌멩이처럼 수면을 스치며. 천적을 피해 수면 밖으로 날아올랐나. 푸른 심해에서.

다이빙 후 맥주 마시며 나눈 모험담

배를 타기 전날엔 스쿠버 다이빙을 하며, 코론에서의 마지막 하루를 보냈다. 마법의 푸른 세계처럼 신비한 바닷속으로 무서워 벌벌 떨면서도 또 들어갔다. 코피까지 흘리면서. 그 넓이도, 깊이도, 화려하고 기괴한 생명체들의 신비함도 가늠할 수 없는 굉장한 세상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놀랍다. 지구의 70퍼센트가 그렇다니.

한창훈의 <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에 시인 안상학이 망망대해를 항해하며 했다는 말이 나온다. 

"내 이 별이 뭔고 했더니 허공에 떠있는 푸른 물방울이었구만 그래."

다이빙을 마치고 간밤, 코론시에서 마지막으로 맥주를 마셨다. 다이빙 강사인 아영씨와 다이브숍의 매니저인 재남씨랑. 재남씨가 들려주는 바다 얘기가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도, 술잔이 비는 줄도 몰랐다. 훤칠하고 인물까지 잘난 청년 재남씨는 다이빙 15년 경력의 다이버 강사다. 15살 때부터 다이빙을 했단다. 다이버인 아버지가 반강제적으로 끌고 다닌 통에.

"처음 관심사는 바다 생물이었어요. 책이나 인터넷을 뒤져가며 나름 연구했죠. 특히 독 있는 산호들이 흥미로웠어요. 그다음엔 수중 촬영에 열을 쏟았죠. 사진 촬영, 동영상 촬영... 그다음엔 다이빙 포인트를 개발하겠다고, 남들 한 번도 가지 않은 바닷속을... 그리고는 난파선 보물찾기로 관심사가 바뀌었어요. 크크크! 지금은 다이빙 교육에 열중하고 있죠. 사람들에게 바다를 가르치고 리드하는 일, 뿌듯해요."

열대어와 산호가 아름다운 코론 섬 바다 풍경
 열대어와 산호가 아름다운 코론 섬 바다 풍경
ⓒ 이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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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어 바다에서 겪은 에피소드들을 쾌활한 목소리로 풀어 놓았다. 세부 바다에서 한국 여군들과 다이빙했을 때 '트리거 피쉬'가 오리발을 물어 당기고, 박치기해 졸도했던 일. 블랙 아일랜드에서 작살 사용 금지 수칙을 어긴 중국인이 소형 작살을 숨겨 들어와 '제비 활치'를 사냥하는 바람에 주변에서 유영하던 까만색 세로 줄무늬 제비 활치들의 몸이 하얗게 변하는 걸 목격한 일...

나는 그 밤을 밝혀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그의 바다 모험담에 빠져들었다. 나도 더 일찍이 바다를 만났다면, 다이버가 되어 오대양을 떠돌며 살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불쑥 그런 생각도 들었다. '푸른 물방울'의 마력에 사로잡혀, 그 아름다운 생명의 근원 속으로...

팔라완의 남쪽 끝, 엘니도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공상에 젖었다. 작은 섬들이 심심찮게 보이는 잔잔한 바다를 바라보며. 얼마쯤 갔을까. 유럽 청년이 말을 걸어왔다. 배낭 여행 중이냐고. 그는 이스라엘 청년이었다. 이름은 아비. 마닐라에 있는 컴퓨터 게임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휴가 중이라고. 코론에서 다이빙을 했고, 엘니도에서 3일을 지내고 돌아갈 예정이라고 했다.  

그는 내게 한국의 인구와 종교, 그리고 '세월호' 참사에 대해 물었다.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며 안타까움과 놀라움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이빙 얘기를 했다. 그는 내 영어 실력을 금방 눈치채고, 쉬운 어휘로 또박또박 느리게 말했다.

방카 위 옆자리 이스라엘 청년 아비
 방카 위 옆자리 이스라엘 청년 아비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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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이 나왔다. 밥, 치킨 아도보, 바나나 한쪽을 담은 접시가 전해져왔다. 생수 한 병이랑. 나는 아침을 걸러 배가 고팠기에 싹 비웠다. 뱃멀미가 나지 않아 속이 편해 다행이었다. 점심을 먹고 아비는 독서에 빠졌다. 붉은 바탕의 책표지를 언뜻 보니, 조지 R.R 마틴의 <A Feast for Crows(까마귀의 향연)>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판타지 소설류 같았다.

나는 짐을 덜겠다고 한국으로 책을 다 보냈으니, 읽을거리가 없었다. 한 권쯤 남길 걸 그랬나. 팔라완 가이드북이나 꺼내 훑어볼밖에. 지금 가고 있는 엘니도는 팔라완 본섬 북쪽 끝에 있다. 엘니도(El Nido)는 스페인어로 '제비 둥지'라는 뜻이다. 팔라완에서 유명한 곳이었다.

나는 이제 코론에서 엘니도로 남하를 시작했다. 팔라완의 남쪽 끝까지 가볼 계획이었다. 접힌 우산처럼 길게 생긴 팔라완 지도를 들여다봤다. 어디 어디를 갈지 궁리하며. 물론 그때그때 인연 닿는 대로 발길이 향하겠지만. 

엘니도 가는 선상에서 먹은 점심
 엘니도 가는 선상에서 먹은 점심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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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물가물 잠들었다 깼다. 오후 1시 15분, 바다 한가운데 배가 멈췄다. 남쪽 하늘에 먹구름이 짙었다. 바람이 거칠었다. 바다색은 불길한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선원들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배를 점검하는지. 갑판 양옆의 가리개 천막도 내려졌다. 승객들은 벗어놓은 구명조끼를 챙겨 입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윽고 배가 천천히 다시 출발했다. 너울이 높았다. 배가 흔들렸다. 얼마 못 가 먹구름 구역으로 진입했다.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세찬 빗발이 후둑후둑 가리개 천막을 내리쳤다. 빗발은 뚫린 선미 쪽과 가리개 틈을 통해 가차 없이 안으로 들이쳤다. 승객들이 비를 피해 갑판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나도 얼른 짐을 챙겨 들고 이동했다. 카메라와 노트북 가방이 젖을까 노심초사. 안전한 곳으로 옮겨 놓고도 비가 튈까 안절부절못했다. 방수 커버라도 있으면 씌우련만.   

아비는 제자리에 혼자 꼿꼿이 앉아 있었다. 몸이 홀딱 젖는데도 표정이 여유로워 보였다. 나도 돌아가 비를 맞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떠난 자리, 돌아가면 모양새가 웃길 것 같다. 카메라와 노트북 가방만 없었다면 나도 그냥 버티고 있었을 텐데. 

짐을 덜어냈으니 '가벼움은 자유다!' 환호하며, 더 자연을 즐길 수 있겠지 싶었는데. 자유를 방해하는 짐은 꼭 무게로만 따질 게 아니었다. 나는 부러운 눈길로 아비를 바라보며 십수 년 전, 바다에서 겪었던 한 장면을 떠올렸다.   

갑자기 쏟아진 비, 피하지 않았다

긴 바닷길에서 몰려오는 먹구름
 긴 바닷길에서 몰려오는 먹구름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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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여객선을 타고 인도양 망망대해를 떠가고 있을 때였다. 그때도 혼자 배낭여행 중이었다. 항해 3일째였나. 날 맑은 오후였다. 승객들이 갑판에 나와 수백 마리의 날치 떼와 그 뒤를 따라가는 수백 마리의 돌고래 떼를 구경한 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화창한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졌다. 승객들은 비를 피해 소리를 지르며 선실로 뛰어 들어갔다. 나는 갑판 난간 구조물에 몸을 기댄 채, 바다를 바라보고 서서 비를 홀딱 맞았다.

그때까지 맞아 본 비 중에서 가장 시원하고 통쾌한 비였다. 하늘과 바다, 그 광활한 자연 속에 내 몸이 온전히 합류된 듯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전율이 일었다. 그렇게 얼마나 서 있었나. 돌아서 보니 갑판 맞은편에 한 사람이 나처럼 비를 홀딱 맞고 서 있는 게 아닌가. 

우리는 동시에 상대방 쪽을 향해 발을 떼었다. 심장이 쿵쿵쿵 뛰었다. 빗속 갑판 한가운데서 나는 맨발에 반바지만 입은 남자를 만났다. 키가 크고 가슴이 넓은 청년이었다. 맑은 얼굴, 어깨에 달라붙은 젖은 긴 머리카락, 푸른 눈... 내 모습은 그의 눈에 어떻게 비췄을까. 우리는 아무도 없는 갑판 위에서 비를 맞으며 놀란 표정으로 통성명했다. 

영국 청년이었다. 이름은 그린이라고 했다. 장기 여행자였다. 목걸이, 반지 같은 장신구와 소품들을 싼 나라에서 사서 다른 나라에 팔며 세계 여행 중이라고 했다. 그때까지 70여 개국을 돌아다녔다고. 한국에도 갔었다고 했다.  

엘니도의 절경이 다가오고 있다.
 엘니도의 절경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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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아들은 말이 그게 다였다. 그는 들뜬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아니, 천천히 하는 말인데도 내 영어 실력으로는 도저히 따라잡기 힘들었다. 나는 10분도 안 지나 지쳐버렸다. 나중에는 알아듣는 척,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 그는 나를 볼 때마다 다가왔고, 나는 피했다. 선상에서의 이상한 숨바꼭질. 멋져 보이는 청년이었는데, 내겐 '언어의 장벽'이 그렇게 높았다. 어쩌면 그때 나도 그를 따라 좌판을 펼치며 지구를 몇 바퀴 돌 수도 있었는데. 혼자 실없이 해보는 공상이지만. 

스멀스멀, 속이 울렁거리더니 욱! 구역질이 올라왔다. 휘몰아치는 비바람, 흔들리는 방카. 명치를 치받으며 장기들이 요동쳤다. 나는 꾹꾹 눌러 참다가 결국, 가리개 천막 틈을 비집고 얼굴을 밖으로 내밀었다. 굵은 빗발이 사정없이 머리를 내리쳤다.

거짓말 같이 토기가 싹 가셨다. 꼴은 우습게 됐지만. 결국 그렇게 머리만 비를 맞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북쪽으로 먹구름이 밀려갔다. 비가 그쳤다. 가리개 천막이 걷어 올려졌다. 나는 수건을 꺼내 젖은 머리를 닦았다.

오후 3시께, 남쪽으로 엘니도의 절경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주변의 작은 섬들 사이로. 엘니도 타운 뒤로 우뚝 솟아 있는 카르스트 석회암 절벽이 서서히 선명하게 다가왔다. 오후 3시 40분, 마침내 앨니도의 선착장에 방카가 들어섰다. 8시간 넘게 걸린 긴 바닷길이었다. 바다에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빗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나는 또 카메라와 노트북이 젖을까 봐 쩔쩔매며, 방카에서 내렸다. 

엘니도에 도착하니 다시 비가 내린다.
 엘니도에 도착하니 다시 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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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팔라완, #배낭여행, #코론, #엘니도, #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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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지리산으로 귀촌하였습니다. 2017년도 <아이슬란드가 아니었다면> 출간. 유튜브 <은경씨 놀다>. 네이버블로그 '강누나의깡여행'. 2019년부터 '강가한옥펜션'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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