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해서 집으로 가면 내가 베란다에서 가꾸는 조그만 식물들이 나를 반긴다. 아직 만개하지 않았지만 계절을 착각한 연산홍 봉오리에서부터 베고니아 꽃들과 군자란 꽃들이 매일 매일 조금씩 화사하게 피어난다. 아무도 없는 빈 집이 아닌 생기가 충만한 집이란 것을 알려주고 위안해준다.
사람으로 상처 받은 것은 사람으로 치유된다는 말을 흔히 한다. 인연으로 인한 상처와 치유를 뜻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일상적으로 늘 접촉하는 지인, 동료를 비롯해 생활근접권에 있는 온갖 거래처와 연계기관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어떤 이들의 일방적인 언행으로 상처받기도 한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않은 일로 해서 또 새로운 활력을 얻기도 한다. 우연히 메일을 열어 봤을 때 잘 모르는 사람으로 온 한 통의 메일도 거기에 포함된다.
내 <오마이뉴스> 기사의 열혈팬이라고 제목을 단 메일에는 "최근 기사를 보고 '깜놀'했어요. 2015년에는 좀 더 여유있고 건강하기를.."이라고 돼 있었다. 중증청각장애로 사람들의 언어를 잘 못 듣는 나는 '깜놀'이란 단어를 처음 대했다. 그래서 얼른 검색했다. '깜짝 놀라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찬찬히 생각해 보니 일상 중에 나를 '깜놀'하는 것이 상당히 많았다. 대부분이 '감동'의 깜놀이었다.
우리 기관에 새롭게 환경정비를 하는 직원이 왔는데 우즈베키스탄의 미녀이다. 과연 하루 1000명 가까이 들어와서 수백 명의 어르신들이 종일을 머무는 우리 기관의 구석구석을 청소할 수 있을까? 환경전문단체에서 파견된 전문인도 일 주일만에 그만 뒀는데...
그녀가 온 지 한달이 다 되어가는 요즈음 나는 그녀가 스쳐지나가는 자리마다 신선하게 '깜놀'한다. 청소를 할 때는 마스크와 머리수건 그리고 길고 긴 투명 앞치마로 완전무장한 그녀는 가끔 내게는 프로 전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층층마다 두 개씩 있는 화장실의 세면대들은 우리 집의 세면대가 부끄러울 정도로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항상 조각 난 비누가 덕지덕지 때가 묻은 비누통 안에 있었는데, 새 비누통같이 말끔히 닦여졌다. 10년 다 되어가는 지난 세월 속에 비누통과 휴지통 하나라도 이렇게 구석구석 새 것같이 보여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배가 무척 고프다고 말하면서도 이슬람교의 문화 때문인지 간식시간에 주어지는 피자와 만두는 전혀 먹지 않는 그녀! 그녀와 함께 밥을 먹으면서 궁금했던 가족 이야기를 물었더니 배시시 웃으면서 사진을 보여준다. 그녀의 어린 아들은 한국인의 얼굴상이지만 눈빛은 그녀를 닮아 무척 영롱하고 귀티가 나보였다.
오늘 아침에는 간암 투병을 하며 여러 차례 항암치료를 받으시는 어르신이 조용히 찾아와 인사하셨다. 설날 지나고 다시 입원하게 되어 묵향 공부를 한동안 못할 것 같다고 하셨다. 그 분에게도 나는' 깜놀'한다. 왜냐하면 매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셔서 완치된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서울로 그 힘든 검사와 항암치료를 가는 소식을 아주 담담하고 평온한 얼굴빛으로 말씀하셨다. 과연 내가 저렇게 많이 아파서 저렇게 많이 그 힘든 투병길을 수년 동안 걸어간다면, 그 분만큼 담담하게 또 매 순간 열심히 최선을 다할 수 있을까?
내게 '깜놀'했다고 한 열혈팬에게 답장을 했다.
"깊은 생각없이 그냥 일기를 쓰듯이 자연스럽게 자판을 치는 사는이야기를 읽고 '깜놀'하셔서 고맙고 마침 요즘에 교과서에 실린 작품저작료로 달력을 만들어 주변에 나누는 중인데 보내드릴까요?"금방 답이 왔다.
"아이들한테 자랑해야겠네요. 뭔 행운인가 싶습니다. 고맙습니다."아, 내가 누군가를 '깜놀'하게 하고 나아가 '행운'까지 선사하는 존재라니... 며칠 전에 사람으로 상처받은 내 가슴에서 초록색 새싹이 봄의 싹처럼 자라난다. 열혈팬의 '깜놀'과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귀공자 아들을 둔 그녀와 수없는 항암치료에도 담담한 어르신의 삶에 대한 자세에 대해 감동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