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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1] 유리

2003년 12월 밤 페루의 라우니온, 졸업을 축하하는 마을 잔치에 나갔던 11살 유리는 다음날 아침 두개골이 함몰되고 온몸이 갈기갈기 찢긴 채 길가에 버려진 시체로 발견됐다. 외숙모는 그의 주검을 "어린 양을 반으로 갈라놓은 것 같았다"고 표현했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만들었을까.

라우니온에서 가장 부유한 페드로 아얄라가 그날 밤 유리를 끌어다 강간하고 살해했다는 명백한 증거들이 나왔다. 술 취한 페드로 옆에 이불을 덮고 있는 소녀를 보았다는 하인 헤라르도의 증언도 있었다. 모든 증거들은 경찰이 수레에 싣고 갔다.

이후 페드로는 돈을 주면 살 수 있는 변호사를 고용했다. 반면 유리의 엄마 루살라는 돈이 없어 변호사를 살 수 없다. 1~1.5달러를 하루 간신히 버는 그로서는 변호사는 꿈과 같은 이야기다. 증거나 증인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 후 증인은 페드로 측의 강요에 따라 진술을 그들의 구미에 맞게 번복해 나갔다. 유리의 살인 사건은 그렇게 페드로의 무죄로 판결났다. 루실라는 말한다.

"돈이 없으면 그걸로 끝입니다."(36쪽)

[사례2] 마리암마

마리암마는 인도의 방갈로르에서 60km 떨어진 벽돌 공장에서 일했다. 그러나
어느 날 다른 공장에서 일자리를 제안하며 정착금으로 333달러를 줬다. 가족 한 사람당 40달러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그 공장으로 옮기자마자 노예 살이가 시작됐다.

정착금을 빚이라고 주장하며 매일 폭력을 가했다. 가둬놓고 때리고, 밤낮없이 일을 시켰다. 남편을 때릴 때 마리암마가 남편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때 사장 부자가 마리암마를 끌고 다른 방으로 갔다. 머리를 벽에 찧어 주저앉자 돌아가며 욕을 보였다. "입을 열면 죽여버리겠다"며 윽박질렀다.

다른 여자들도 그렇게 성폭행을 당했다. 밤마다 공포였다. 먹지도 못하고, 날마다 공포에 질려 살면서 벽돌을 만들었다. 가까스로 탈출한 마리암마는 이렇게 증언한다.

"불의가 우리는 괴롭히지만 우리는 체념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잔인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돈도 힘도 없기 때문이지요. 경찰은 V(사장)의 말을 듣지 우리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우리는 V의 노예이기 때문입니다."(57쪽)

가난의 근본 문제

<폭력국가>(게리 하우겐과 빅터 부트로스 지음 / 최요한 옮김 / 옐로브릭 펴냄 / 2015. 1 / 1만8000원)
 <폭력국가>(게리 하우겐과 빅터 부트로스 지음 / 최요한 옮김 / 옐로브릭 펴냄 / 2015. 1 / 1만8000원)
ⓒ 옐로브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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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례들은 게리 하우겐과 빅터 부트로스의 <폭력국가- 무능한 국가와 그 희생자들(아래 폭력국가)>에 나오는 극히 일부의 이야기다. 우리는 가끔 매스컴을 통해 동네 어른이 어린아이를 강간했다거나, 장애인을 가두고 제대로 먹이지 않고 일만 시켰다는 보도를 접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분노하는 것으로 우리의 할 도리를 다한 양 착각한다.

<폭력국가>는 굶주림, 인신매매나 성폭행, 불법 감금과 인권유린 등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현장이 지금도 무수히 많다고 가르쳐준다. 저자는 가난의 본질은 날마다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약탈적 폭력이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식량을 공급하면 가난한 사회가 구제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너무 안일한 생각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짓밟는 가장 만연한 폭력은 성폭력이다. 전 세계 여성 세 명 중 한 명은 구타를 당하거나 강간을 당한다. 여동생이나 딸이 버릇없이 굴었다고 죽이는 경우도 있다. 자격 없는(타 종교, 타 신분) 이와 사랑에 빠졌다고 죽이기도 한다. 강간을 당해 더러워졌다는 이유로 죽일 때도 있다. 책은 이런 '명예 살인'으로 죽는 이가 한해 5천 명에 이른다고 언급했다.

자료에 의하면, 에티오피아 여성 59%가 성폭행을 당한다. 말라위는 38%, 가나는 30%에 이른다. 경찰이 강간으로 신고를 받은 피해자의 40%는 18세 미만이다. 이는 대부분 가난한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또한 여성들을 매음굴에 팔아넘기는 인신매매도 빈번히 벌어지는 일 중 하나다.

우리나라 남성들이 태국이나 필리핀에 가서 어린 여성들을 노리개로 삼았다는 기사를 접할 때가 있다. 이들 중 대부분이 인신매매에 의한 성매매 여성이란 걸 알면 충격에 빠진다. 물론 자발적으로 일본에 건너가 성 매매를 하는 우리나라 여성들이 있다는 보도도 접한다. 바텐더, 옷가게 점원, 가수, 커피가게 점원, 타자수, 가정부로 가는 줄 알고 갔다가 매음굴에 팔려간 예들도 즐비하다.

살인을 방조하는 나라는 나라가 아니다

돈이 인신매매나 성폭력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다. 유리도, 마리암마도 다 돈이 문제다. 돈이 없어 죽었다. 돈이 없어 죄인으로 남는다. 요즘 세월호를 인양해야 되느냐 마느냐 하며 시비를 붙는 것도 다 돈 이야기다. 돈이 많이 드니 인양하지 말자는 주장도 나왔다. 그럴싸해 보이지만 인권과 자유의 나라에서 말도 안 되는 논리이고, 불필요한 논쟁일 뿐이다.

세월호 참사로 온 나라가 분노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이들을 구조해야 할 나라가 제 구실을 못했기 때문이다. 무능한 정부의 살인 방조는 결코 가벼운 죄목이 아니다. 법이 있으나마나 한 일부 개도국에서 있을 법한 살인방조가 대명천지의 대한민국에서 일어났다. 세월호 참사는 두고두고 국가의 품격을 논의하는 자리에 등장할 게 뻔하다.

일부 개도국에서 성폭력과 인신매매, 현대판 노예 제도, 살인 방조가 이어지는 것은 나라가 나라 구실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나라들의 경찰은 그 숫자도 턱없을 뿐 아니라 혹 사건을 알고 경찰이 나타났다 할지라도 돈을 받고 눈감아 준다. 그게 그의 살길이다. 정부에서 주는 월급이 거의 없다. 그것은 검사나 판사도 마찬가지다. 정의를 기대하는 게 기적이다.

그러한 나라에서는 법 체계가 정의를 세우는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한다. 나라가 법 질서를 유지할 능력도 없다. 이런 나라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죄가 아니다. 돈이 없는 게 죄다. 책을 읽으며 참 가슴이 답답했다. 그들도 나와 같은 인간인데, 가난하고 무능한 정권 하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리 설움을 당하고 목숨을 내줘야 한다는 게 너무 아팠다. 지금 세월호 유가족들이 그런 심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책은 IJM(International Justice Mission)의 활동을 중심으로 몇몇 개도국의 구조적이며 일상적인 폭력을 어떻게 막을 것인지 방법을 제시한다. 식량 공급보다 시급한 게 폭력을 금지할 법 제정과 법체계 확립이라고 말한다. 책을 읽으며 이 글에 다 싣지 못하는 게 아쉽다. 하지만 더 가슴이 아픈 것은 법과 법 체계가 있음에도 국가가 살인을 방조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어찌 해야 하는지. 무능한 국가가 참 무섭다. 폭력이 난무하는 몇몇 국가들은 법 체계가 없어 무섭다. 우리나라는 법 체계가 있으나 마나 해서 무섭다.

덧붙이는 글 | <폭력국가>(게리 하우겐과 빅터 부트로스 지음 / 최요한 옮김 / 예로브릭 펴냄 / 2015. 1 / 1만 8000원)



폭력 국가 - 무능한 국가와 그 희생자들

게리 하우겐 외 지음, 최요한 옮김, 옐로브릭(2015)


태그:#폭력국가, #게리 하우겐, #빅터 부트로스 , #최요한,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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